2024년 5월 5일(일)

[Cover Story] ‘청년 기부왕’ 박철상

[Cover Story] 주식으로 수백억 자산가 된 대학생… 장학기금만 6개, 매년 3억7000만원 후원

“장학생 선발 면접을 보러 온 학생들이 앞에 앉은 저를 보고 깜짝깜짝 놀라요. 보통 장학기금 설립자라고 하면 중년의 사업가나 나이 지긋한 어르신을 생각하는데, 또래 청년이 앉아있으니까요(웃음).”

5일 경북대학교 캠퍼스, 체크무늬 셔츠에 뿔테 안경을 낀 박철상(31·경북대 정치외교학과 4년)씨는 여느 대학생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학비를 모으기 위해 끼니를 거르던 그는 20대 초반에 주식투자를 시작해 수백억대 자산가가 됐고, 그렇게 번 돈을 장학사업에 기부했다. 현재 박씨가 100% 개인자산으로 운용하는 장학기금은 6개, 매년 새로 들어가는 기부금만 3억7000만원에 이른다. 그는 ‘대학생’이지만 ‘청년 자산가’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고액 기부자’다. 하지만 기존의 어떤 말로도 그를 표현하기에는 부족했다. 자신의 능력보다 사회적 책임을, 공로보다 영향력을 생각하는 특별한 청년 박철상의 숨겨진 이야기를 들었다.

(윗쪽 그래픽) Getty Images / 멀티비츠. (아랫쪽 사진) 박철상을 세계적 부호 워런 버핏에 비유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박씨는 “제2의 버핏은 되고 싶지 않다” 며 고개를 저었다. 그의 목표는 큰돈으로 높은 명예를 쌓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까지 이어지는 가치관을 남기는 것이다. /방창준 사진작가
(윗쪽 그래픽) Getty Images / 멀티비츠. (아랫쪽 사진) 박철상을 세계적 부호 워런 버핏에 비유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박씨는 “제2의 버핏은 되고 싶지 않다” 며 고개를 저었다. 그의 목표는 큰돈으로 높은 명예를 쌓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까지 이어지는 가치관을 남기는 것이다. /방창준 사진작가

◇아무도 몰랐던 수백억대 청년 자산가의 이야기

박철상씨가 처음 주식을 접한 것은 중학생 때다. 15살 생일을 맞아 아버지가 만들어준 0원짜리 증권 계좌는 그에게 실용경제 감각을 일깨워줬다. 그에게 주식은 돈벌이가 아닌 세상을 배우는 과정이었다.

“학창 시절에 4년 정도 모의투자를 하면서 공부를 많이 했어요. 시장의 흐름을 보려면 경제학뿐만 아니라 세계 정세, 인문학, 사회학, 철학 등 다방면의 지식이 필요하거든요. 자기계발서와 재테크서적을 빼곤 거의 모든 종류의 책을 가리지 않고 읽었던 것 같아요. 성인이 돼서 실제로 자산을 운용할 때 그 시절의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됐죠.”

과외 아르바이트로 번 돈과 장학금 등을 모아 자산 운용을 시작한 그는 곧 적지 않은 돈을 벌게 됐다. 하지만 수백억대 자산가라고 하기에 그의 생활은 지나칠 만큼 검소하다. 지금도 자가용 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고가의 옷도 입지 않는다. 좌우명인 ‘관인엄기(寬人嚴己·남에게 관대하고 자신에게 엄격하라)’를 그대로 실천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나마 유일하게 돈을 쓰는 곳은 책이다. 1년에 150여권을 읽는데 지금 사는 집에만 500여권, 울산에 있는 본가에는 1400여권의 장서가 쌓여 있다. 검소한 생활과 끊임없는 공부, 철저한 자기관리까지. 그는 “나보다는 주변에서 더 답답해한다”며 웃었다.

“사치품에는 원래 관심이 없어요. 부동산도 마찬가지고요. 오히려 또래보다 조금 빨리 여러 가지를 이룬 만큼, 조심해야 할 것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평범한 청년이 한 말이라면 아무렇지 않을 이야기도, 제가 하면 더 큰 상처가 될 수 있으니까요.”

그의 이처럼 겸손한 성품은 부모님의 영향이 크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가 수백억대 자산가이자 1년에 200명을 후원하는 장학기금 설립자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부모님과 남동생뿐이었다. 자식 자랑 한번 하고 싶을 법도 한데, 누군가 그의 안부를 물으면 부모님은 “그냥 대학생”이라며 웃었다.

“제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어머님이 식당에 근무하셨는데 아직도 일을 계속 하고 계세요. 그만두시면 안 되겠느냐고 사정했는데도 듣질 않으시죠. 제가 교만해질까 봐, 말씀 대신 행동으로 보여주시는 것 같습니다. 어머니가 식당일로 버는 월급이 60만원 남짓인데, 그 돈의 귀함을 아는 제가 어떻게 함부로 나태한 생활을 할 수 있겠어요.”

◇청년, 나눔을 만나다

자산가(資産家)라고 해서 모두 자선가(慈善家)가 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소년소녀가장,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시민활동가 등 사회 전반에 기부한 금액만 10억이 넘는 그 역시 처음부터 공익사업에 큰 뜻을 둔 것은 아니었다. 왜 기부를 시작하게 됐을까. 계기를 묻자 박씨는 ‘부채 의식’을 가장 먼저 입에 올렸다.

“입시 때 가세가 기울면서 원하던 대학과 학과를 포기해야 했어요. 입학한 뒤로도 학비를 모아야 한다는 생각에 반년 정도 점심을 걸렀고요. 돈 때문에 무언가를 포기한 경험들이 오히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더라고요. 약간의 굴곡이 있었지만, 저는 훌륭한 부모님 밑에서 좋은 가르침을 받으며 성장했어요. 제가 노력해서 얻은 행복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거죠. 반면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기회를 박탈당해버린 친구들도 있어요. 그 친구들에게 빚을 진 것처럼 마음이 무거웠죠. 내 앞에 진수성찬이 있으면 허기진 사람과 같이 먹는 게 당연한 거잖아요. 그래서 군대에 있는 동안 결심을 했습니다. 만약 여유가 생기면 그런 친구들한테 도움을 주겠다고요.”

Getty Images B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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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전역한 그는 이듬해에 복학해 가장 먼저 인근 보육원을 찾았다.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형 오늘 가면 언제 또 와?”라는 아이의 목소리에 2년이나 발도장을 찍었다. 투자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방문 봉사는 어려워졌지만, 대신 다달이 조금씩 돈을 부쳤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제대로 된 자선사업은 40~50대에 시작할 생각이었다. 어린 나이, 세간의 이목이 조심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것은 한 경북대학교 학생의 죽음이었다.

“재작년에 여학생 한 명이 안타까운 사고로 세상을 떠난 일이 있었습니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밝고 성실한 모습으로 배울 점이 많았다고 해요. 그런 친구가 학비를 벌기 위해 하루 8~9시간씩 일하다 너무 안타까운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더군요. 제가 40~50대에 기부를 하려 했던 건 남의 이목을 신경 썼기 때문이었어요. 지금 도움이 필요한 친구들이 있는데, 이 친구들이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이 제겐 너무 큰 기회비용으로 느껴졌습니다. 당장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에 2013년 경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학생을 대상으로 첫 장학기금을 만들었습니다.”

◇10원도 새지 않도록…재단 대신 장학기금으로

“살면서 제일 열심히 한 일이 뭐냐고 물어보면 단연코 장학기금 설립입니다. 수십 명의 사람을 만났고, 수백 통의 전화가 오갔습니다. 잠자는 시간도 반으로 줄였어요. 주변에선 돈 주고 사서 고생한다며 미쳤다고 했죠(웃음).”

그는 정치외교학과 장학기금에 이어 사탑장학기금(사대), 법주장학기금(법전원), 경북대학교 재학생을 위한 복현장학기금을 세웠다. 경북여고와 서부고 학생을 대상으로 5년간 18억5000만원의 장학금을 지급하는 기금도 설립했다. 이처럼 장학사업이 늘어난 이유는 지난해 4월에 발생한 세월호 참사 때문이다.

“당시 중간고사 기간이었는데 아무것도 손에 잡히질 않았어요. 가서 뭐라도 하자는 생각에 친구랑 둘이 진도로 내려가 3일간 봉사활동을 했습니다. 마지막 날 안산 임시분향소에 올라갔다가 다시 대구로 돌아오려고 했는데, 현장에 가보니 취객이 난동을 부리고 있더라고요. 위험할 것 같아서 그 자리에서 13시간을 꼬박 어머님들과 함께 있었어요. 그때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후 대구에 돌아와 세 가지 결심을 했죠. ‘첫째, 학교 전체를 지원하는 장학기금을 만든다’ ‘둘째, 대상을 고등학교로 넓힌다’ ‘셋째, 좋은 선생님·법관 등 사회 전반에 긍정적 영향을 주는 인재를 육성한다’.”

그가 재단이 아닌 장학기금의 형태로 학생들을 지원하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기금은 출연한 돈을 사업에 쓸 수 있어 마지막 10원 한 장까지 학생들에게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재단을 만들면 기금보다 세제혜택은 크지만, 출연금이 고정자산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사업비로 쓰기 어렵다.

그가 설립한 기금은 성적과 소득분위를 기준으로 수혜 대상을 선발하는 일반 장학제도와 다르다. 학생 선발 기준부터 배분 시스템까지 모두 새로 설계했다.

“앞서 진행된 장학 프로그램 20~30여개를 참고했는데 본보기로 삼을 만한 게 없었습니다. 소득을 기준으로 하면 맹점이 생기고, 성적을 기준으로 하면 공부 잘하는 아이들 용돈밖에 안 될까 봐 걱정이 됐죠. 장학금 지급 후 사후관리도 생각해야 했어요. 회의를 거듭한 결과 현재 2개 고등학교에 지원하고 있는 기금 1억5000만원 중 절반은 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통해 저소득·기초수급자·차상위계층 등 복지사업 대상에게 지원하고, 나머지 절반은 서류상의 허점으로 어디서도 도움받지 못하는 학생과 수혜자 사후관리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중복 수혜도 가능하게 만들었어요. 국가장학금 받아 학비를 해결한 뒤에도 생활비나 꼭 필요한 곳에 보태 쓸 수 있게요. 이러한 세밀한 설계가 가능했던 건 이정우 경북대 경제통상학부 교수님께서 애정어린 마음으로 함께 고민해주신 덕분이었습니다.”

모든 기금의 장학생은 공모 또는 추천을 통해 선발하고 있다. 자기소개서와 면접 전형도 있다. 단순히 물질적 후원뿐만 아니라 학생들과 소통하고자 하는 그의 의지가 담겼다. 박씨는 “800여명의 신청자가 쓴 자기소개서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읽은 뒤에 면담을 가졌다”면서 ‘속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선배’의 역할을 강조했다.

“면담을 한 친구들이 ‘내가 장학생으로 선발되지 못하더라도 감사하다’고 하더군요. 그만큼 이야기를 들어 줄 사람이 절실했던 거예요. 저는 하나의 장학기금이 하나의 커뮤니티로 성장하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저 한 명이지만, 제가 매년 돕는 200명의 친구 중 20%만 후배들을 위해 뜻을 모아줘도 파급 효과는 점점 커질 거예요.”

큰돈을 꾸준히 내놓아야 하는 장학사업이 부담스럽지는 않을까. 기자의 질문에 그는 한 소녀와의 면담에서 있었던 일을 들려줬다.

“아픈 어머님과 함께 사는 여고생이 장학생으로 선발돼 100만원을 지원받았는데, 그 돈을 전부 어머니 병원비로 썼더라고요. 저한테 그 100만원이 있었다면, 아무 역할도 없이 그냥 은행에 잠들어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그 친구에게 가서는 단순한 100만원 그 이상의 가치로 활용됐죠. 제 개인의 부(富)는 죽으면 사라져요. 하지만 그게 사회적인 가치로 환원되면, 훨씬 오래, 더 큰 의미로 남을 수 있지 않을까요?”

◇투표처럼 누구나 기부하는 세상 원해

앞서 많은 매체가 그와의 인터뷰를 시도했다. 강연자로 서주길 바라는 곳도 많았다. 기부를 할 때마다 기념사진을 촬영했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자주 들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전면에 나서는 모든 자리를 번번이 고사했다. 그 흔한 전달식 한 번 제대로 한 적이 없다.

이유는 명확했다. 박씨의 선행이 처음 의도치 않게 한 매체에 보도되자마자, 그가 유명세를 이용해 돈을 벌 목적이라는 오해가 쏟아졌다. 정치외교학 전공자이니 혹시 출마를 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심도 받았다. 마음고생이 심했다. 그럼에도 그가 지난달 아너소사이어티에 공개적으로 가입하고, 인터뷰에 응하기 시작한 것은 기부문화가 더욱 확산되길 바라기 때문이다.

“장학사업을 시작하고 보니 어려운 친구들이 너무 많았어요. 마음은 있지만, 아직 머뭇거리는 분들께 같이 움직여 주십사 청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어린 놈도 했는데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지’ 하면서 나서주시는 분이 있다면 그걸로 제가 대외에 얼굴을 드러낸 목적은 달성한 것 같아요.”

KB금융지주경영연구소가 발표한 ‘2015 한국부자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에 금융자산 10억원 이상인 자산가는 약 18만2000여명. 반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고액 기부자 클럽인 아너소사이어티의 회원은 839명(6월 기준)에 그친다. 그에게 국내 고액 기부 문화가 좀처럼 활성화되지 않은 이유를 물었다.

“가끔 인간의 욕심이란 정말 한도 끝도 없다는 것을 느낍니다. 저도 ‘조금 더 모았다가 해야지’라고 마음먹었더라면 아마 기부를 시작하기 쉽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반면 기부 의지는 있는데 선뜻 나서지 못하는 분도 많습니다. 아직 고액 기부와 관련된 시스템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기도 했고, 유인책이 될 만한 세제상의 혜택도 크지 않으니까요. 기부자가 반드시 뛰어난 목표의식, 사회적 가치에 방점을 찍지 않았더라도, 고액 기부가 많아지면 더 많은 사람이 효율적으로 혜택을 받을 수 있으니 이 부분이 개선되는 것도 분명 기부자를 늘리는 데 도움이 되겠죠.”

그러나 그가 진정으로 바라는 기부의 모습은 민주주의에서 한 사람이 1표를 행사하듯, 금액에 상관없이 나눔이 누구에게나 널리 퍼지는 것이다.

“나눔은 액수로 가치를 따질 수 없는 일이잖아요. 지난 연말에 서문시장에서 채소장사를 하시던 할머니가 평생 모은 돈 1억원을 경북대에 기부하셨는데, 저는 그분의 50만원이 제 50억보다 더 크다고 생각해요. 사회적 분위기가 ‘많은 돈을 기부해야만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여기지 않게 언론의 역할도 중요할 것 같아요.”

한편 그는 내년 가을 미국으로 떠나 MBA(경영전문대학원)를 수료한 뒤, 독일에서 철학 공부를 이어갈 예정이다. 그가 계획한 시간은 10년. 유학 기간 동안은 통신자문으로 장학기금 운영에 참여하고, 장학생들과는 일 년에 네 차례 한국에서 만날 계획이다.

자산 운용도 내년을 마지막으로 더이상 하지 않는다. 그의 오랜 바람인 ‘초야에 묻혀 공부하는 삶’을 위한 결정이다. 앞으로는 자산에서 운용 수익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매년 수익의 15%를 떼어 운영하던 기부용 계좌도 해지한다. 대신 지금까지 모은 총 자산의 80%를 장학기금 운영과 공익사업에 활용할 예정이다. 물가상승률과 장학사업 확대 등을 다방면으로 고려하더라도 추후 40년간 기부를 계속 할 수 있는 돈이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면 사업 지속성을 위해 장학재단을 만들 생각도 있어요. 지금의 장학기금은 학교 관계자와 후배들의 봉사로 운영되는 거나 마찬가지거든요. 좋은 선생님들을 모시고 전인교육을 할 수 있는 학교를 세우는 것도 좋을 것 같고요. 후학을 양성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그건 제가 스스로 누군가를 가르칠 만한 사람이라고 인정할 수 있을 때나 가능할 것 같아요. 설익은 과일을 나누면 해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계획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제 꿈은 하나예요. 마지막까지 제가 지원하는 친구들을 실망시키지 않는 것. 그거면 만족스러운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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