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7일(수)

[Cover Story] [‘기업 사회공헌의 현실과 대안’ 시리즈] ②CEO 눈치보며 오락가락… 뿌리 못 내리는 사회공헌

기업 사회공헌 현실과 대안 ②
홍보 효과 따져보고 사회적 분위기 따라 손바닥 뒤집듯 바꿔
일부 기업은 기부금을 쌈짓돈 쓰듯
스위스UBS은행 지속·전략적 공헌으로 불량도시를 예술도시로

지난해 8월 프랑스 파리에서 ‘홈리스(homeless·노숙인) 월드컵’이 열렸다. 총 10개의 노숙인 축구팀에서 1, 2차 선발전을 통해 실력 있는 8명의 선수가 선발됐다. 그러나 대회 날짜가 다가올수록 ‘홈리스 월드컵’ 한국팀 관계자들의 마음은 무거워졌다. 대회에 출전하기 위한 항공료, 약 열흘간의 체류비 등 재정적 어려움 때문이었다. 사회 공헌에 적극적이거나 스포츠 복지에 관심이 많은 기업에 후원을 부탁했지만 반응은 싸늘했다. 결국 후원을 받지 못한 채 한국팀 관계자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파리행 비행기에 올랐다. 하지만 현지에 도착한 한국팀 관계자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다른 나라에서 출전한 선수들 유니폼에 삼성, 현대, 기아차 등 국내 대기업 로고가 붙어 있었기 때문. 한 외국인 선수 유니폼엔 무려 6곳의 한국 기업 로고가 붙어 있었다. 한국팀 관계자는 “만약 ‘홈리스 월드컵’ 지원이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면 한국 노숙인을 먼저 돕지 않았겠는가”라면서 진정성보다는 비즈니스를 위해 사회 공헌에 신경 쓰는 기업의 풍토를 지적했다.

미상_그래픽_기업사회공헌_나무_2012◇CEO 바뀌면 사회 공헌 테마도 바뀐다

‘더나은미래’가 시가총액 50대 기업의 최근 5년간 사회 공헌 프로그램을 조사한 결과 상당수 기업이 CEO가 바뀌면 사회 공헌 프로그램 방향을 바꾸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오너 없는 금융권의 경우 이런 경향이 더욱 심했다. 삼성생명의 경우 10년 넘게 유지해온 여성 가장 창업 지원 프로그램을 2011년 CEO가 바뀐 이후 ‘아동’으로 핵심 테마를 바꿨다. ‘세살마을 지원사업’과 청소년 문화활동 지원사업인 ‘세로토닌 드럼클럽’ 등이 대표 프로그램이 됐다. 삼성생명 관계자는 “저출산·청소년문제가 사회적으로 대두되면서 이 분야에 대한 사회 공헌을 강화할 필요성이 생겼다”고 말했다.

◇대표 프로그램이 없다

50대 기업의 CSR 활동을 분석한 결과 절반 이상의 기업이 사회 공헌 프로그램을 1년 단위로 계속 바꾸는 모습을 보였다. 2010년 소외계층을 위한 ‘사랑모아봉사단’ 활동에 주력하던 대한생명보험은 2011년 청소년 대상 문화예술교육으로 방향을 바꿨고, 2012년에는 다문화 가정 지원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아동·청소년·장애인·다문화 등으로 분류되는 사회 공헌 핵심 대상을 최근 3년 사이에 바꾼 기업도 29곳에 달했다. 2010년까지 거제도를 중심으로 한 사회 공헌 활동을 했던 대우조선해양은 2012년 교육과학기술부와 ‘교육 기부’ 협약을 체결하면서 ‘청소년 교육’을 중점 프로그램으로 변경했다. 대우조선해양 관계자는 “매년 도움이 필요한 곳과 사회적 이슈가 달라지지 않느냐”면서 “사회적 분위기와 흐름을 파악한 뒤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실질적 도움을 찾아 지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CSR 중점 사업을 해마다 바꾸다 보니 ‘대표 사회 공헌 프로그램’이 없는 기업이 대부분이었고, CSR 활동을 5년 이상 지속하는 곳도 발견하기 어려웠다. 전문가들은 “기업들이 대표 프로그램 없이 계속 사업을 바꾸는 이유는 이슈가 될 만한 것, 홍보가 잘될 수 있는 프로그램에만 집중하기 때문”이라면서 “사회 공헌 프로그램의 성과가 나타나기까지 최소 3~5년이 걸리기 때문에 당장의 재무적 성과로 평가하려 하지 말고, 좀 더 ‘지속성’에 중점을 둬야 한다”고 지적했다.

◇기부금을 자기 돈처럼 쓴다

사회 공헌비용을 쌈짓돈으로 생각해 자신들이 필요한 부분에 자의적으로 쓰는 기업도 있다. 국내의 대형 유통업체 A사는 홈쇼핑 승인을 받을 당시 영업이익의 4%를 사회 공헌비용으로 쓰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NGO에 기부금을 전달한 A사는 이 돈을 마치 자신들의 금고처럼 이용하며, 사회 공헌비용을 홍보비로 사용했다.

임직원 복지를 위한 투자가 사회 공헌 프로그램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국내의 한 금융회사는 사회 공헌으로 소외계층을 위한 자율형 사립고를 설립한다며 대대적인 홍보에 나섰다. 하지만 이 고등학교에는 해당 기업의 임직원 자녀를 전체 정원의 20%에 한해 ‘특별전형’으로 뽑기로 해 논란을 빚었다. 유통업체 L사의 경우 임직원과 협력사 직원을 위한 친환경 어린이집 건립비용을 사회 공헌비용으로 책정하기도 했다. 이뿐만 아니다. 고객 포인트로 기부된 금액을 기업이 마치 자체 사회 공헌비용을 댄 것처럼 홍보하는 카드사도 있다.

◇’지속성’으로 지역사회 전체를 변화시킨 스위스 UBS은행

반면 사회 공헌 역사가 깊은 해외 선진국의 경우 전략적 사회 공헌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린 후 이를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경우가 많다. 글로벌 금융그룹인 스위스 UBS은행은 30년에 걸친 사회 공헌 프로그램으로 지역사회 전체를 변화시켰다. 가난, 폭력, 절망이 가득하던 영국의 헤크니는 지역 주민의 40%가 실업자고, 영국에서 가장 살기 힘든 곳으로 꼽힐 만큼 ‘불량도시’였다. UBS는 이 지역 주민들의 교육과 자립을 위한 ‘커뮤니티 활성화 프로그램’을 위해 200개 이상의 지역 민간단체에 자금을 지원했다. 7000명에 달하는 직원들이 자원봉사에 나섰다. 마침 임대료가 싼 작업실을 찾던 예술가들이 헤크니로 몰려들었고, 예술가들은 지역 주민과 우범 청소년을 위해 음악·미술·춤 등 다양한 종류의 문화예술 교육을 진행했다. 최근 5년 동안 범죄율도 30% 감소했고, 실업률도 절반 넘게 줄었다. 런던시의 골칫거리였던 헤크니는 이제 미디어·디자인산업을 아우르는 ‘예술의 메카’가 됐다. 김지혜 남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기업이 사회 공헌을 하면서 추구해야 할 것은 ‘사회적 변화’이지 ‘홍보’가 아니다”면서 “진정성을 가지고 지속적인 CSR 활동을 하다 보면 홍보는 자연스럽게 이뤄지고 소비자들도 그 기업의 제품을 찾게 된다”고 말했다.

정유진 기자

김경하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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