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사회공헌 현실과 대안 ③ 기업 무리한 요구… 맞춰가며 일정 짜놓으면 행사 직전 취소한 경우도 납품 단가 조정 압력에 협력업체들 몰래 기부 전담팀 갖춘 기업 33.9%… 지속적 활동하기 어려워
최근 국내의 한 NGO 실무자는 대기업 S사로부터 “임직원 500명이 함께 봉사할 수 있는 사회공헌 프로그램을 기획해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해당 NGO 실무자는 거절의사를 밝혔다. 봉사단 규모가 커질수록 수혜처를 발굴하기 어렵고, 수혜처에 대한 배려보다는 봉사자 중심의 프로그램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500명은 너무 많으니 100명 규모로 줄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을 해도, S사 관계자는 “원래 규모대로 진행하지 않으면 함께 할 수 없다”며 압력을 넣었다. 결국 어렵게 나무심기 프로그램을 기획한 해당 NGO실무자는 행사 당일 오전, S사로부터 황당한 전화를 받았다. “회사 사정으로 봉사활동을 취소하겠다”는 것이었다. 행사 전날까지 설득을 거듭해 수혜처를 겨우 확보한 터라, 이제 와서 약속을 어길 순 없었다. 해당 NGO는 급히 자원봉사자를 모집해 S사 임직원 대신 나무심기 봉사를 진행했다. 당시 프로그램에 관여한 NGO실무자는 “사회공헌 활동을 기업의 단순한 행사로 생각하는 이가 많다”면서 “사회공헌의 목적이 단순 홍보가 아닌 진정성에 있었다면, 수혜자와의 중요한 약속을 그렇게 쉽게 깨진 않았을 것”이라고 전했다.
◇이벤트로 전락한 기업 사회공헌 활동
기업의 사회적책임(CSR)이 선택이 아닌 필수로 자리 잡게 됐지만, 그러나 기업들이 경쟁적으로 사회공헌 활동을 시작하면서 부작용이 생겨났다. 국내의 한 대형 홍보대행사 관계자는 “기업의 사회공헌 활동이 ‘규모의 싸움’이 돼버렸다”면서 “봉사활동에 참여하는 임직원 수가 많을수록 사회공헌 프로그램이 성공적으로 진행됐다고 여기는 문화가 자리 잡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기업 사회공헌 활동들이 단순 이벤트 행사로 느껴진다”는 지적도 늘고 있다. 대규모 인원이 투입되는 프로그램을 기업 담당자가 직접 실행하기 어렵다 보니, 기업 내부 마케팅 부서와 연결된 이벤트 회사들이 사회공헌 프로그램을 대행하게 됐기 때문이다. 이벤트 회사는 행사 현장과 수혜자를 발굴하기 위해 NGO를 찾게 됐고, NGO는 이벤트 회사의 지시를 받아 기업의 사회공헌 프로그램을 실행하는 입장이 됐다. 기업-이벤트 회사-NGO로 이어지는 갑-을-병 관계 파트너십이 형성된 것. 국내의 한 복지재단 관계자는 “최근 들어 기업 담당자들 대신 이벤트 대행사로부터 연락이 많이 온다”면서 “기업의 이벤트 행사를 왜 도와줘야 하는지 회의가 들 때가 잦다”고 토로했다.
◇파트너십이 없다
행사 직전에 갑자기 계획을 취소하거나 변경하는 기업도 많다. 지난해 11월, 국내 음료업체 A사와 캠페인을 함께 진행한 국내의 한 국제개발 NGO는 “홍보대사를 섭외하지 않으면 캠페인을 함께 하지 않겠다”는 강요로 어렵게 홍보대사를 초청했다. 하지만 A사는 2개월 사이에 일정을 5번이나 번복했다. 취소 사유는 ‘행사를 진행하려는 A사 점포 앞에 상인들이 시위하고 있어, 그림이 좋지 않아 언론매체를 부를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해당 NGO 담당자는 “하루 이틀 앞두고 일정을 계속 취소하는 바람에 더는 홍보대사에게 부탁할 면목이 없었다”고 말했다. NGO가 업무 협약서를 요구하자 계약을 파기하는 기업도 있다. 지난해 대형보험업체인 S사는 1년 동안 NGO와 함께 임직원 나눔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로 합의했다. 그런데 해당 NGO가 합의 내용을 문서로 작성해주길 바라자 협약 자체를 무산시켰다. NGO 담당자는 “1년짜리 프로그램을 기획하려면 수혜처를 발굴하고 예산안을 짜는 등 직원들의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어가는데, 이를 전혀 보상해주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했다”고 전했다. 취재 결과 대부분의 NGO는 ‘대기업과 함께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 계약서나 업무협약서를 써 본 적이 없다’고 답했다. 이에 한 대기업 사회공헌팀 관계자는 “업무협약서를 쓸 경우 기업 사회공헌 담당자들이 법무팀, 회계팀 등에 협조를 구해야 하는데 업무가 늘어나는 것이 귀찮은 게 사실”이라며 “기업 내에서 사회공헌팀이 ‘돈 쓰는 부서’라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에 협약서를 쓸 때마다 일일이 상부에 보고하는 게 눈치가 보인다”고 귀띔했다.
◇대기업 눈치 보느라 협력업체들 사회공헌도 맘껏 못해
국내 대기업으로부터 용역을 받아 공장을 운영하는 협력업체들은 사회공헌 활동도 맘 편히 하지 못한다. 국내 최대 제조업체인 S사의 제품을 만들어 공급하는 한 협력업체의 사회공헌 홍보전략은 ‘최대한 모르게’라고 한다. 이 협력업체의 홍보팀 관계자는 “회사에서 도움이 필요한 곳을 찾아 매년 억 단위로 사회공헌 활동을 하고 있지만, 보도자료 한 번 뿌려본 적 없다”면서 “예전에 쓰나미 지역에 1억원을 기부한 적이 있었는데, S사가 그 사실을 알고 ‘사회공헌 활동을 할 정도로 형편이 여유로운 것 같으니 납품 단가를 조정하겠다’고 압력을 넣었다”고 말했다. 최근 한 NGO 마케팅 담당자는 국내 유명 중소기업 사장으로부터 “1억원을 아무도 모르게 기부하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다. “글로벌 기업과 함께 일하려면 사회공헌 활동 내역이 필요한데, 현재 거래하는 국내 대기업이 기부한 사실을 알면 억지로 납품단가를 낮추려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을 파트너로 인정하고 지원을 해주는 것도 대기업의 CSR”이라며 “잘못된 파트너십은 기업의 사회공헌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고 지적했다. ◇사회공헌 전담인력 부족 수혜자에게 꼭 필요한 부분을 찾고, NGO 등 파트너들과 지속적으로 사회공헌 프로그램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기업 내부에도 CSR을 이해하는 전문가가 필요하다. 매출액 기준 100대 기업 중 사회공헌 활동을 위한 전담 조직과 인력을 모두 배치하고 있는 기업은 33.9%에 불과하다. 전담 인력만 있는 기업은 37.1%, 전담 인력은 없지만 그 업무를 담당하는 직원이 있는 기업은 24.2%에 달한다. 지난해 (주)한국리서치가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매출액 순위 100대 기업 모두 “사회공헌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고 답했으나, 그 중 전담 조직과 인력이 전혀 없는 기업도 4.8%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2011, 한국리서치). 3년간 기업 사회공헌팀에서 일하다가 NGO로 자리를 옮긴 모금 전문가는 “기업 사회공헌팀에 소속된 정규직 직원은 팀장·과장급이 유일하고, 대부분이 계약직 직원”이라며 “과장 이외의 정규직 직원은 잠깐 파견 왔다가 다른 팀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파트너와 관계가 금방 끊기고, 지속적인 프로그램 진행도 어렵다”고 설명했다. 정무성 숭실대 사회복지학부 교수는 “기업이 직접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보다는 전문성 있는 NGO와 함께 협력할 때보다 지속적인 CSR이 가능해진다”면서 “기업 사회공헌 담당자와 NGO실무자들이 충분히 소통하면서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