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발달·참여·돌봄 4대 권리 담아
10월 23~29일 첫 ‘대한민국 영케어러 위크’…18개 기관 참여
“우리는 가족돌봄을 할지, 하지 않을지, 지속할지를 스스로 결정하고 그 선택을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
가족의 질병이나 장애 등으로 어린 나이부터 돌봄을 책임져 온 아동·청년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담은 선언문을 내놨다. 가족을 돌보는 일을 당연한 의무로 여기지 말고, 돌봄을 선택할 권리와 자신의 삶을 살아갈 권리를 보장해 달라는 목소리다. 그동안 사회적 보호와 지원의 대상으로 주로 다뤄졌던 영케어러(Young Carer·가족돌봄 아동·청년)가 스스로 권리의 주체임을 강조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영케어러는 질병이나 장애, 정신질환 등으로 돌봄이 필요한 가족에게 간호·간병과 가사, 정서적·경제적 지원 등을 제공하는 아동·청년을 뜻한다. 국내에서는 약 10만 명으로 추정된다. 보건복지부의 2022년 가족돌봄청년 실태조사에 따르면, 영케어러는 일주일 평균 21.6시간씩, 평균 46.1개월 동안 가족을 돌본 것으로 나타났다. 우울감 유병률은 61.5%로 일반 청년의 7배를 넘었다.
◇ 돌봄청소년·청년 22명, 자신의 경험을 권리의 언어로
아동복지전문기관 초록우산을 비롯한 ‘제1회 대한민국 영케어러 위크’ 추진협의회는 23일 ‘영케어러 권리선언문’을 공개했다. 대한민국 영케어러 위크는 영케어러가 처한 현실을 사회에 알리고, 당사자를 조기에 발견해 필요한 지원으로 연결하는 협력체계를 구축하기 위한 국내 첫 공동행사다.
초록우산은 지난 9월 4일 ‘제1회 대한민국 영케어러 위크 추진협의회’를 출범했다. 협의회에는 국가아동권리보장원, 대한의료사회복지사협회, 한국사회복지관협회, 지자체 청년미래센터 등 공공기관과 학계, 복지 현장, 당사자 단체를 아우르는 총 18개 기관이 참여했다. 공익미디어 <더나은미래>는 미디어파트너로 참여해 영케어러의 현실과 제도적 과제, 국내외 지원 사례 등을 연속 보도하고 있다.
이번 권리선언문은 영케어러 당사자들이 직접 참여해 만들었다. 지난 9월 중순 서울·인천·경기·강원·대구·경남·부산 등 전국 각지의 돌봄청소년 11명과 돌봄청년 11명이 온라인으로 ‘영케어러 권리 선언 워크숍’에 참여했다.
워크숍은 총 3일에 걸쳐 진행됐다. 첫날에는 각자의 돌봄 경험을 나누고, 둘째 날에는 경험 속에서 필요한 지원을 찾아 이를 권리의 언어로 발전시켰다. 마지막 날에는 권리 문장들을 선언문 형태로 정리하고, 참여자들이 한 문장씩 소리 내어 읽으며 표현을 다듬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나 자연스럽게 읽히지 않는 문장은 당사자들이 일상에서 사용하는 언어로 고쳤다.

특히 청소년들이 자신의 경험을 직접 표현할 수 있도록 다양한 방식이 활용됐다. 참여자들은 돌봄 경험을 색과 사진, 그림, 사물 등에 빗대어 표현했다. 임시방편으로 붙여둔 테이프, 접착력이 떨어진 반창고, 배터리가 닳아 깜빡이는 손전등 등에는 오랜 돌봄으로 인한 피로와 불안, 책임감이 담겼다.
◇ “아이답게, 청년답게, 나답게” 당사자들이 요구한 4대 권리
참여자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선언문에는 존엄권·발달권·참여권·돌봄권 등 4개 영역의 권리가 담겼다. 먼저 ‘존엄권’은 가족을 돌보거나 돌보지 않는다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강조한다. 가족돌봄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적 시선이 만들어 내는 책임감과 죄책감에서 벗어날 권리도 명시했다. 주거와 생계 등 경제적·사회적 지원을 보장하고, 돌봄으로 인한 빈곤과 피해가 미래까지 이어지지 않도록 장기적인 지원을 제공해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발달권’은 돌봄으로 인해 잃어버리기 쉬운 시간과 기회를 되찾는 데 초점을 맞췄다. 선언문은 “우리는 아이답게, 청소년답게, 청년답게, 나답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고 명시했다. 충분한 휴식과 수면,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보장받고, 친구들과 관계를 맺거나 여가를 즐길 권리도 담았다. 돌봄 부담 때문에 학업을 포기하거나 진로 선택에 제약받지 않도록 학습 시간과 교육·자격 취득에 필요한 지원을 보장해야 한다는 요구도 포함됐다.
‘참여권’에서는 돌봄에 관한 결정권이 당사자에게 있음을 분명히 했다. 가족돌봄을 시작하거나 중단할지 스스로 결정하고, 그 선택을 존중받을 권리다. 나이와 관계없이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정책과 제도의 결정·평가 과정에 참여할 권리, 가족의 상황을 이야기할 때 비밀을 보장받을 권리도 제시했다.
마지막으로 ‘돌봄권’은 가족돌봄을 개인에게만 맡겨두지 않을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다. 영케어러가 필요한 정보를 쉽게 얻고 통합적인 돌봄서비스를 충분히 제공받을 권리를 명시했다. 주양육자의 부재로 보호 공백이 발생하거나 돌봄 과정에서 응급 상황이 생겼을 때 신속하고 적절한 지원을 받을 권리도 담았다.
권리선언문 제작을 총괄한 조기현 N인분 대표는 “그동안 가족의 몫으로 여겨졌던 돌봄을 이제는 사회가 함께 책임져야 한다”며 “영케어러가 살기 좋은 나라는 결국 모든 돌봄자가 살기 좋은 나라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영케어러 문제를 변화의 지렛대로 삼아 대한민국을 더 나은 돌봄 사회로 만들어야 한다”덧붙였다.
◇ 국내 첫 ‘영케어러 위크’…18개 기관 힘 모았다

한편, 올해 영케어러 위크는 ‘영케어러의 오늘에 쉼표를, 내일에 날개를’을 슬로건으로 다양한 행사와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첫날인 23일에는 숭실대학교에서 영케어러 토크콘서트 ‘애프터 스토리(After Story)’가 열린다. 28일에는 온라인 세미나 ‘영케어러, 어떻게 발견할 것인가?’를 통해 조기 발굴과 지원 연계 방안을 논의한다.

29일에는 연세대학교에서 공동 기념행사가 열린다. 유엔이 지정한 ‘국제 돌봄과 지원의 날’에 맞춰 영케어러 당사자들이 직접 작성한 권리선언문을 공식 발표한다. 이어 30일 국회의원회관에서는 ‘위기아동·청년법 시행 이후, 무엇이 달라졌는가’를 주제로 정책토론회가 진행된다.
추진협의회는 이번 영케어러 위크를 계기로 기관 간 협력 방안을 구체화하고, 영케어러를 조기에 발견해 지원으로 연결하기 위한 공동 대응체계를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장기적으로는 영케어러 위크를 매년 이어지는 사회적 주간으로 정착시키는 것이 목표다.
조유현 더나은미래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