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만에 점수제 폐지…7개 핵심 영역 모두 충족해야 ‘비콥 인증’
재무적 이익과 사회·환경적 성과를 함께 추구하는 글로벌 기업 인증 ‘비콥(B Corp)’이 20여 년 만에 인증 체계를 대폭 개편했다. 기존의 합산 점수제를 폐지하고, 기업의 지배구조와 노동, 포용성, 기후행동 등 모든 핵심 영역에서 필수 기준을 고르게 충족하도록 바꾼 것이 핵심이다. 비랩코리아는 지난 29일 서울 성수동에서 설명회를 열고, 올해 3월부터 적용된 새로운 인증 체계를 국내 기업들에 소개했다.

◇ 기업을 위한 자발적 ‘사회·환경 성적표’
비콥은 2006년 미국 비영리단체 비랩(B Lab)이 ‘기업을 선한 영향력의 주체로 만들자’는 취지에서 시작한 글로벌 인증이자 기업 운동이다. 유기농이나 공정무역처럼 특정 제품을 인증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의 목적과 거버넌스, 노동, 인권, 환경 등 경영 전반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인증을 부여한다. 현재 전 세계 100여 개국, 160여 개 산업에서 1만 900여 개 기업이 인증을 받았다.
대표적인 글로벌 비콥 기업으로는 네스프레소, 이솝, 록시땅, 파타고니아 등이 있다. 국내에서도 토스뱅크, 법무법인 디엘지(DLG), 임팩트스퀘어, 토도웍스 등 34개 기업이 이름을 올렸다.
엄격한 평가를 거치는 만큼 비콥 인증은 투자 유치, 인재 채용, 글로벌 사업 확장 등에서 실질적인 경쟁력으로 작용한다. 정태은 비랩코리아 사무국장은 “한국 IT 벤처기업 이큐포올은 북미 시장에서 비콥 기업임을 내세워 신뢰를 빠르게 구축할 수 있었고, 프랑스 공공투자은행(Bpifrance)은 다논(Danone)이 비콥 인증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저금리 대출을 제공하기도 했다”며 비콥의 실제 파급력을 강조했다.
◇ ‘잘하는 한 분야’보다 ‘모든 영역의 책임’

개편된 비콥 인증에서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모든 핵심 영역의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는 점이다. 기존에는 환경, 노동, 지역사회, 거버넌스 등 여러 영역의 점수를 합산해 평가했다. 이 때문에 특정 분야에서 높은 점수를 받으면 다른 영역의 부족한 점수를 보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새 표준에서는 7대 임팩트 주제 전반에서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 7대 주제는 ▲기업의 목적과 이해관계자 거버넌스 ▲공정한 노동 ▲정의·형평성·다양성·포용성(DEI) ▲인권 ▲기후행동 ▲환경관리 및 순환 ▲대정부관계 및 집합적 행동이다.
기업이 충족해야 하는 세부 요건은 규모와 산업, 사업 부문 등에 따라 최소 20개에서 최대 124개까지 달라진다. 인증 이후에도 정기 심사를 통해 기준 충족 여부와 지속적인 개선 노력을 확인받아야 한다.
비랩은 기업들이 ESG 공시나 보고에 머무르지 않고 실제 사회·환경적 성과를 만들어내도록 하기 위해 새 표준을 마련했다고 설명한다. 이를 위해 GRI, 과학기반 감축목표(SBTi) 등 기존 지속가능성 프레임워크와의 연계성도 높였다.
빌리 하나피 비랩 글로벌 인증 운영 전략 리드는 “최근 ESG와 지속가능성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비랩도 인증 기준을 더욱 엄격하게 만들고 있다”며 “기업들이 지속가능성 성과를 더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변화”라고 말했다.
◇ 기업 규모에 맞춘 책임

현장에서는 새 표준이 도입되면서 인증 문턱이 지나치게 높아지는 것 아니냐는 질문도 나왔다. 특히 인력과 자원이 부족한 중소기업은 새 기준을 충족하기 더 어려워질 수 있다는 우려다.
이에 빌리 하나피 리드는 “기업 규모에 따라 적용되는 요건도 달라진다”며 “대기업에는 더 많은 기준이 적용되지만, 중소기업은 기본적인 수준부터 시작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고 답했다. 이어 “‘이윤 없이는 미션도 없다’는 말처럼 기업이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려면 먼저 생존하고 성장해야 하므로, 규모에 맞는 기준을 적용하는 원칙을 세웠다”고 덧붙였다.
정태은 사무국장은 비콥 인증을 기업의 ‘건강검진’에 비유하며, 참여 기업들이 글로벌 스탠더드에 부합하는 기준점을 짚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람이 2년에 한 번씩 건강검진을 받듯, 기업도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잘 가고 있는지 주기적으로 점검해야 합니다. 비콥 인증은 바로 그 과정입니다.”
비랩은 앞으로 새 표준을 적용한 기업들의 사례 연구를 공개할 계획이다. 이달에는 스위스의 허브사탕 제조기업 리콜라가 새 표준에 따른 첫 인증 기업으로 이름을 올렸다. 비랩은 다양한 기업이 성공과 시행착오를 공유하는 과정 자체가 공동 학습으로 이어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채예빈 더나은미래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