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술이 인간의 연결을 대체하는 시대, 역설적이게도 미국 사회의 화두는 다시, 그리고 여전히 커뮤니티다. 미국의 석학 로버트 퍼트넘(Robert David Putnam)은 저서 ‘볼링 얼론(Bowling Alone)’을 통해 현대인이 파편화될수록 사회적 신뢰라는 자산이 붕괴된다고 경고했다. 50개 주가 저마다 독립적인 제도와 상이한 정서·환경을 지닌 미국에서 자연재해나 사회적 갈등, 위기 상황이 닥쳤을 때 가장 빠르게 작동하는 생존 인프라는 종종 국가의 공공 안전망이 아니라 현장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온 민간의 커뮤니티다.
미국인들은 생존과 성장을 위해 수많은 사교 모임과 자원봉사 단체라는 풀뿌리 커뮤니티를 스스로 만들어왔고, 이런 자발적인 연대와 느슨하지만 단단한 네트워크를 통해 행정의 안전망이 미처 닿지 못하는 곳을 메워왔다. 이처럼 커뮤니티를 통해 삶의 기회와 안전을 확보하는 정서는 비즈니스 생태계, 특히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기업들의 관계론과도 맞닿아 있다. 사회 불평등이 심화되고 정치·경제적 불확실성이 전 세계적으로 높아지는 시대에 기업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지난 4월 찾은 미국 중서부 도시 밀워키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밀워키는 미국 위스콘신주의 중심 도시로, 인구 약 53만 명의 미국 31번째 규모 도시다. 방문 목적은 ‘챔피언스 리트릿 2026(Champions Retreat 2026)’ 참석이었다. 챔피언스 리트릿은 글로벌 비영리 네트워크 비랩(B Lab)의 글로벌 파트너 중 하나인 비랩 미국&캐나다(B Lab U.S. & Canada)가 2년마다 개최하는 행사로, 북미 지역 비콥(B Corp) 커뮤니티가 한데 모이는 컨퍼런스이자 네트워킹 이벤트다. 2006년 설립된 비랩이 사회적·환경적 책임을 일정 기준 이상 충족하는 영리 기업에 인증하는 비콥 기업은 2026년 7월 기준 102개국에서 1만900개를 넘어섰다.
미국과 캐나다 전역에서 온 600명 이상이 참여한 이번 행사에는 비콥 기업뿐 아니라 지속가능한 비즈니스와 관련된 학계, 공공·민간 분야의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함께했다. 총 112개의 세션과 워크숍, 지역 단체와 협업한 참여형 프로그램이 다채롭게 열린 5일 동안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국가 정책 전문가, 사회정의 운동가, 여러 비즈니스의 리더들까지 공통적으로 더 나은 비즈니스의 미래를 위해 ‘사랑’과 ‘관계’를 이야기했다는 것이었다.
전체 오프닝 세션의 기조연설에서 저명한 인권·사회정의 활동가이자 캘리포니아에 기반한 미국의 대표적 국책 연구 및 행동주의 싱크탱크 폴리시링크(PolicyLink)의 대표인 마이클 맥아피 박사(Dr. Michael McAfee)는 비즈니스 리더들이 사회 변화를 위해 체화해야 할 6가지 핵심 역량을 제안했다. 그는 시대를 꿰뚫어보는 감각, 혁신적 상상력, 대담함, 자아 성찰과 쇄신에 더해 인간과 지구에 대한 사랑, 협력에 대한 믿음을 꼽았다. 마이클 박사뿐 아니라 여러 리더들은 사회 변화를 이끄는 원동력으로 사랑에 기반한 관계를 이야기했고, 이 관계의 다양한 형태를 5일간 펼쳐진 세션과 전시, 마켓플레이스, 참여형 프로그램 전반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첫 번째는 기업이 지역사회와 맺는 관계다. 지역의 결핍을 관계의 기회로 삼고, 평소 로컬 생태계와 끈끈한 신뢰 자본을 쌓아둔 기업은 커뮤니티의 붕괴를 막는 든든한 버팀목이 된다. 동시에 지역사회는 그 기업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이자 방어벽이 되어준다.

1993년 밀워키에서 시작해 현재 위스콘신주 전역에 12개 매장을 운영하고 있는 커피 로스터리 스톤 크릭 커피(Stone Creek Coffee)는 밀워키의 홈리스 쉼터이자 자립을 돕는 비영리 단체 게스트 하우스 오브 밀워키(Guest House of Milwaukee) 이용자들을 위해 정기적으로 음식을 만들어 후원하고 있다. 코로나19 확산 당시에는 수백 파운드의 커피 원두를 쉼터에 무상 지원했고, 매년 수백 시간의 직원 봉사활동과 함께 상당한 규모의 현금 및 물품 기부를 이어가고 있다.
밀워키는 러스트벨트 지역 중 하나로, 미국 내 인구 50만 명 이상 대도시 가운데 디트로이트에 이어 두 번째로 빈곤율이 높고 이는 미국 평균 빈곤율의 두 배에 달한다. 스톤 크릭 커피가 주최한 프로그램에 참여해 홈리스 쉼터에 보낼 약 700인분의 샌드위치를 만드는 데 힘을 보탰다. 평일 아침 넓은 카페 공간을 채운 지역 주민들을 보며, 24년간 이어온 비즈니스의 성장 저력이 기반한 지역을 살피고 상생하려는 노력과 무관하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지역사회와 연대하려는 기업의 노력은 시카고 비콥 방문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 플라워즈 포 드림즈(Flowers for Dreams)는 꽃다발 제작·배송 전문 기업으로 시카고, 밀워키, 디트로이트에 매장을 두고 있으며 매달 기업 수익의 25%를 지역 자선단체에 기부하고 있다. 특히 이민자 보호를 포함한 사회 취약계층 지원에 관심을 쏟고 있는데, 2012년부터 현재까지 누적 기부액은 176만 달러를 넘는다.
플라워즈 포 드림즈는 자체 재단을 통해 세 지역의 여러 자선단체와 장기적인 파트너십을 맺고 이민자 가족 보호, 정신건강 관리, 식량 접근성과 농업 보호, 다양한 사회적 정체성에 대한 지원 등의 영역에서 지역사회와 긴밀히 연대하고 있다. 이러한 적극적인 행동주의 실천과 탄소 배출을 대폭 절감하는 비즈니스 모델로 2022년 비즈니스 인사이더(Business Insider)가 선정한 ‘미국에서 가장 영감을 주는 기업 20곳(20 Most Inspiring Companies in America)’ 중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

두 번째는 기업이 기업 구성원과 맺는 관계다. 이 관계를 지탱하고 성장시키는 힘의 원천은 구성원의 주인의식에 있고, 기업과 구성원을 가장 단단하게 묶어주는 현대적 해법은 기업을 소유하는 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 직원 소유제 기업으로 잘 알려진 킹 아서 베이킹(King Arthur Baking)이 대표적 사례다.
킹 아서 베이킹은 1790년 설립된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대표적 제분·베이킹 기업으로, 이번 행사에 스폰서로 참여해 밀워키의 대표적인 푸드뱅크 헝거 태스크 포스(Hunger Task Force)가 주최한 식료품 포장 자원봉사와 쿠킹클래스 프로그램을 후원했다. 킹 아서 베이킹은 1996년 당시 소유주였던 샌즈(Sands) 부부가 기업의 전통과 사명을 유지하기 위해 지분을 직원들에게 매각하기 시작했고, 2004년 100% 직원 소유제 기업으로 전환했다. 매년 회사가 출연한 주식은 직원들의 연간 급여 비율에 따라 배분되며, 모든 직원이 주주로서 기업의 이익을 공유하고 경영 투명성과 수평적 소통을 중시하는 기업문화를 실천하고 있다.
또 다른 사례는 세션에서 만났다. 거버넌스 변화를 통해 포용성을 실천한 미국 수영 교육업계 최초의 비콥, 오카쿠아틱스 스윔 스쿨(Ocaquatics Swim School)이다. 설립자 미렌 오카(Miren Oca)는 1989년 마이애미의 집 뒷마당에서 수영 강습을 시작해 1994년 스윔 스쿨을 설립했고, 현재 마이애미 전역에 5개의 대형 실내 수영장을 갖추고 매주 6500개 이상의 레슨을 운영하고 있다.
미렌은 자신의 비즈니스 여정에서 가장 결정적인 변화의 순간으로 2024년 직원 소유제로 100% 전환한 때를 꼽았다. 수영은 오랫동안 인종적 편견이 존재했던 스포츠이기도 하다. 스윔 스쿨 구성원의 대다수는 여성과 유색인종, 이민자 출신으로, 이들은 거버넌스 변화를 통해 단순 피고용인이 아닌 공동의 소유주가 됐다. 미렌은 이 변화를 통해 비즈니스 경쟁력이 더욱 강해졌고, 지역사회에서 수중 안전과 교육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파도가 일어났다고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셋째는 서로의 영감과 성장 동력이 되는 기업 간 관계다. 파편화된 각 비즈니스의 환경을 극복하고 미국적 역동성을 만들어내는 힘은 기업 간 상호 협력과 연대에 있다.

올해 3월부터 개편·적용된 비콥 인증 기준인 새로운 비랩 표준(B Lab Standards)은 지난 20년간 유지됐던 점수제에서 벗어나 인권, 기후 행동 등 사회·환경을 아우르는 총 7개의 임팩트 주제에서 기업이 비즈니스 생태계의 변화를 이끄는 행동을 하도록 요구한다. 여러 비콥 기업들이 이 표준 전환을 실행하는 여정을 함께 걷고 있었고, 그들이 입을 모아 강조한 것은 바로 ‘함께할 것’이었다.
버톤(Burton), 붓처박스(ButcherBox), 베어 레이크 커피(Bear Lake Coffee)는 협력 사례를 공유했다. 세 기업은 각각 스노보드 용품, 육류와 해산물, 커피를 다뤄 제품의 성격과 기업 규모는 다르지만 도소매 유통이라는 공통점 속에서 지속가능성 직무를 맡은 담당자들이 각자의 전문성과 강점을 나누며 서로의 경영 개선을 돕고 있었다. 이들은 다른 기업들에 대한 조언으로, 서로 다른 산업군에 속해 있더라도 유사한 업무를 맡고 있는 사람들과 지식과 자료, 도전적인 과제와 좋은 실천 사례를 적극적으로 공유할 것을 강조했다.
공동의 경험과 성공, 연대는 시스템의 변화를 가능하게 한다. 비콥 기업 리더들과 ESG 전략 전문가, 위스콘신주 의회 하원의원 사무실 실무자가 참여한 패널 토의에서는 이제 기업이 내부의 친환경·지속가능 경영을 잘하는 것은 기본이 됐고, 앞으로는 기업들이 사회적 영향력과 자본력을 활용해 시장 전체의 판도를 바꾸는 정부 정책과 입법 운동에 집합적인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데 공감대가 형성됐다.
폐회식에서는 지난해 작고한 비랩 공동설립자 앤드류 캐소이(Andrew Kassoy)를 추모하며 그가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돌봄(Duty of Care)’의 철학을 되새기는 시간을 가졌다. 앤드류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자신만을 위해 부를 축적하고 타인은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무관심’이라는 개념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앞서 살펴본 세 가지 관계의 관점에서 본다면 관계의 반대편에는 바로 무관심이 서 있다. 모든 비즈니스는 기업 구성원과 지역사회, 지구, 공급망 안의 모든 사람을 돌보기 위해 존재한다는 돌봄의 철학은 기술의 발달로 기업 간 경쟁의 속도가 더욱 빨라지는 지금, 마치 오래된 미래처럼 우리의 시야를 환기한다.
올해 챔피언스 리트릿의 주제는 ‘잔물결에서 파도로(Ripples to Waves)’였다. 물결이 모두 한 방향으로 향하면 흐름은 생기지만 이내 사라진다. 하지만 서로 다른 방향으로 향하는 물결들이 만나면 큰 파도가 된다. 기업들이 가진 더 나은 비즈니스를 향한 의지와 각자가 만들어내는 임팩트가 ‘관계’라는 상호작용을 통해 만나, 비즈니스 생태계를 바꾸는 큰 변화의 힘이 되길 기대한다.
이미진 비랩코리아 프로젝트 매니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