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령사회·자산 양극화 속 ‘사회적 상속’ 대안으로 부상
여야, 상속세 개편 통한 ‘레거시 텐’ 도입 가능성 검토
초고령사회 진입과 자산 양극화 심화 속에서 유산기부를 제도화해 ‘사회적 상속’으로 확장해야 한다는 논의가 국회에서 본격화됐다. 상속을 가족 내부의 이전에 그치지 않고, 공익으로 순환시키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자는 문제의식이다. 여야는 상속세·증여세 개편을 통해 유산기부를 활성화하는 방안을 놓고 정책 논의에 착수했다.
정태호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박수영 국민의힘 의원은 21일 국회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유산기부 활성화를 위한 한국의 레거시 텐(Legacy 10) 제도 도입에 관한 정책 토론회’를 공동 개최했다. 여야 재정경제기획위원회 간사가 함께 주최한 이번 토론회에는 정치권과 시민사회, 학계, 정부 관계자 등 450여 명이 참석했다.

◇ 늘어난 기부 총액, 정체된 ‘유산기부’
이번 논의의 출발점은 국내 기부 규모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음에도, 유산기부만은 제도적 한계 속에 정체돼 있다는 문제의식이다. 2023년 기준 국내 총 기부금액은 약 16조 원에 달하지만, 상속·증여 재산 가운데 공익법인에 출연되는 유산기부 비중은 1% 이내에 머물고 있다.
반면 영국은 상속재산의 일정 비율을 기부할 경우 상속세를 감면해 주는 ‘레거시 10’ 제도를 통해 유산기부가 전체 모금의 약 30%를 차지하고 있다. 저출산·고령화와 1인 가구 증가로 돌봄·복지 수요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유산기부를 개인의 선의에만 맡길 것이 아니라 제도로 뒷받침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는 배경이다.
정태호 의원은 개회사에서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어려움에 빠졌을 때 도와줄 사람이 없다’고 답한 비율이 40%에 달한다”며 “외로움과 고독감 지표는 다른 선진국의 두 배 이상”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부의 세습 문제가 사회적 화두로 떠오른 지금, 상속의 방향을 바꾸는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수영 의원도 “레거시 10 제도가 사회적 전환의 밑거름이 되기를 바란다”며 “여야가 공동으로 논의하는 만큼 입법 과정에서도 책임 있게 논의를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황영기 한국자선단체협의회 이사장은 환영사를 통해 “우리 국민의 기부 참여는 연간 944만 명에 달할 정도로 보편화됐지만, 유산기부 비중은 기부 선진국인 영국(30%) 등에 비해 1% 미만에 그치고 있다”며 “저출산과 비혼 가구 증가로 직계 자녀가 없는 인구 구조 변화에 맞춰 유산기부 활성화를 위한 제도적 뒷받침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원혜영 웰다잉문화운동 공동대표는 “이번 논의가 제도 차원에 머물지 않고 시민들의 삶 한 구석에 자리 잡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며 “기부와 봉사를 더 큰 사회적 가치로 받아들이는 공직사회의 인식 전환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광화문에 사랑의 온도탑이 있듯, 유산기부 약정 온도탑이 만들어져 일상에서 사회적 상속을 고민하는 문화가 확산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 “세수 감소 아닌 사회적 자본…정책 투자로 봐야”
주제 발제를 맡은 박훈 서울시립대 세무학과 교수는 영국의 레거시 10 제도 도입 사례를 분석하며 “유산기부에 대한 세제 혜택은 단순한 세수 감소가 아니라, 민간 자본이 공공 복지의 일부를 선제적으로 분담하는 ‘재정 보완 장치’”라고 설명했다. 그는 “영국에서도 초기에는 세수 감소가 있었지만, 그에 비해 약 9배에 달하는 사회적 편익이 발생했다”고 말했다.

영국의 유산기부 총액은 레거시 10 제도 도입 이후 2012년 23억2000만 유로(약 4조1000억 원)에서 2024년 45억 유로(약 7조9000억 원)로 두 배 가까이 늘었다. 박 교수는 “한국형 레거시 10 제도가 도입될 경우 민간 공익 재원을 확충하는 동시에 비영리 생태계의 성장과 신뢰를 함께 높일 수 있다”고 평가했다.
현장에서는 유산기부를 실천한 기부자의 목소리도 공유됐다. 손봉호 서울대 명예교수는 “같은 돈이라도 어디에 쓰이느냐에 따라 사회적 가치는 달라진다”며 “기부는 더 행복한 사람을 만드는 데 쓰기보다, 고통받는 사람의 고통을 줄이는 데 쓰일 때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그는 “유산기부를 통해 출발선의 격차를 줄이고, 다음 세대가 살아갈 사회를 ‘덜 고통스러운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손원익 한국비영리학회 회장 겸 연세대 사회복지전문대학원 교수가 좌장을 맡은 패널 토론에서는 유산 기부 제도 도입을 가로막는 법·제도적 과제도 집중적으로 논의됐다. 강남규 법무법인 가온 변호사, 김희정 한국자선단체협의회 사무총장, 장세정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병철 기획재정부 정책관, 이성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본부장 등은 상속세법 개정, 유류분 제도 개선, 신탁을 활용한 기부 활성화 방안 등을 제시했다. 특히 유류분 제도로 인해 기부된 재산이 다시 반환되는 구조를 보완하지 않으면 제도의 실효성이 떨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이번 토론회를 주관한 한국자선단체협의회의 김희정 사무총장은 “영국 정부가 재정 압박 속에서 레거시 10 제도를 통해 새로운 공익 재원을 창출해 온 것처럼, 유산기부는 소외계층과 미래 세대를 위한 재원을 사회적으로 확충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이날 여야 의원실에는 유산기부 입법화를 촉구하는 210개 단체의 공동 서명서가 전달됐다. 서명에는 어린이재단, 월드비전, 굿네이버스, 세이브더칠드런, 밀알복지재단, 기아대책, 대한적십자사,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한국컴패션 등 주요 자선·복지단체들이 참여했다.
김규리 더나은미래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