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이창호 더불어사는사람들 대표
“금융권에서 ‘신용 불량자’라고, 마음까지 ‘불량자’인 것은 아니잖아요.”
담보도, 보증도, 이자도 없다. 전화로 사연을 듣고, 문자로 이름·계좌번호·대출금액·용도를 받으면 심사가 끝난다. 사단법인 ‘더불어사는사람들’이 운영하는 무이자 소액대출은 이렇게 14년째 이어지고 있다. 지난달 초 기준 누적 이용자는 9200여 명, 대출액은 40억원을 넘었다. 상환율은 93%에 달한다.
이 금융 모델을 만든 이는 이창호(70) 대표다. 지난달 24일 <더나은미래>와 만난 그는 소외계층 금융에 눈을 돌린 계기를 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렸다. “1973년, 공고를 막 졸업하고 공장에 취직했죠. 그런데 같은 일을 하는데도 상고를 나온 동료 월급이 더 많더군요.” 수년 뒤 방송통신대 경영학과에서 ‘동일노동 동일임금’ 개념을 배우고서야 그때의 감정을 ‘불공정’이라 부를 수 있었다.

이 경험은 ‘함께 잘 사는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키웠다. 공장 신용협동조합에서 조합원으로 활동하며 신협의 철학과 운영 방식을 접했고, 지역 주민이 서로 돕는 ‘협동 정신’의 힘을 목격했다. 1985년에는 최연소 중앙신용협동조합 감사로 임명됐다. 그때부터 “더불어 사는 것”은 그의 평생 철학이 됐다.
◇ 신협에서 배운 협동 정신, 한국판 ‘그라민 은행’으로
2007년 말 명예퇴직 뒤, 다시 신협에 들어가려 했지만 ‘나이’가 걸림돌이었다. 그 무렵 2006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무함마드 유누스의 ‘그라민 은행(Grameen Bank)’을 떠올렸다. 보건복지부 ‘자활공동체 창업지원사업’으로 마이크로크레딧을 배우며 “내가 꿈꾸던 신협을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규모가 커진 신협은 소액대출이 어렵고, 신용불량자 등 금융 사각지대는 방치되고 있었죠.”
2011년 사재 3000만원과 기부금을 모아 ‘한국판 그라민 은행’을 세웠다. 초창기에는 대출 신청자를 만났지만, 2012년 언론 보도로 알려진 뒤 전국에서 문의가 폭주하자 ‘비대면 대출’을 도입했다. 첫 대출은 10만원부터, 성실 상환 시 최대 300만원까지 늘린다. 이자는 없다. 매달 대출자에겐 “입금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힘들어도 ‘더불어 사는 사람들’의 끈을 놓지 마세요”라는 문자를 보낸다.
이 대표의 통화는 대출 심사라기보다 ‘재무 상담’에 가깝다. 먼저 서민금융진흥원의 불법사금융예방대출이나 신용회복위원회의 신용대출처럼 제도권 금융을 활용할 수 있는지 살핀 뒤, 이용이 어렵다면 더불어사는사람들의 대출을 연결한다.
그는 소액이 만드는 변화를 믿는다. 설립 초기 책정한 첫 대출금 30만 원은 한 달 최저생계비를 기준으로 했다. “월급을 받으려면 한 달을 버텨야 하니, 어쩔 수 없이 일당을 주는 일만 합니다. 그 한 달을 버티게 하는 게 우리의 역할입니다.” 얼굴도 보지 않고 빌려주지만 상환율이 93%에 이르는 이유다. “어려울 때 믿어준 대출이잖아요. 요즘은 자기를 믿어주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우리는 얼굴도 안 보고 믿어줬죠.”
◇ 돈만 빌려주는 곳이 아닌, 삶을 함께 일으키는 금융
‘더불어사는사람들’은 대출만 하는 곳이 아니다. MRI 촬영비가 없어 대출을 문의한 이에게는 무료 촬영 병원을 연결했고, 치아 문제로 식사가 어려운 이에겐 본인 부담금 없는 치과를 소개했다. 안경·가발 등 생활 필수품 지원과 무료 재무·신용 상담도 한다.
그는 대출 상환 기록이 신용점수에 반영돼 제도권 금융을 이용할 수 있는 ‘징검다리’가 되길 바란다. 최근에는 정책 개선에도 목소리를 높인다. 서민금융진흥원의 불법사금융예방대출 금리가 연 15.9%인 점을 국회의원들에게 직접 문자로 알렸고, 지난달 31일엔 이학영 국회부의장을 만나 금리 인하 필요성을 전달했다.
이 대표는 포용적인 금융을 위해서는 현실에 맞는 정책 설계가 필수라고 강조한다. 예를 들어, 2020년부터 3년간 시행된 ‘경기극저신용대출’은 연 1%라는 낮은 금리를 적용했음에도, 이달 기준 상환율이 24.1%에 그쳤다. 그는 그 원인으로 5년 만기의 일시상환 구조를 짚었다.
“12개월 분할 상환은 매달 감당 가능한 금액을 조금씩 갚아 나가기 때문에 상환율을 높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기를 길게 잡고 목돈을 한 번에 갚도록 하면, 취약계층에게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죠.”
그는 매월 일정 금액을 갚으면 ‘다음 대출을 받을 수 있다’는 동기부여가 생기고, 이러한 상환 경험이 곧 신용 회복의 기반이 된다고 설명했다. 반대로 장기 만기 일시상환은 상환 습관이 형성되지 않을 뿐 아니라, 목돈 마련 부담을 키워 연체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다.
“앞으로 목표는 어려운 사람이 없어져서 문을 닫는 겁니다. 경기 침체로 올해는 매달 1만 명이 홈페이지에 접속하지만, 기금 한계로 모두에게 대출을 해드리진 못해 가장 미안합니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후원자들 덕분입니다.”
그는 이 방식을 이어갈 사람이 곳곳에 더 생기길 바란다. “이런 기관이 전국에 하나씩만 있어도, 우리는 서로를 믿고 의지하는 ‘신용 사회’에 더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요?”
김규리 더나은미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