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양행 ‘유일한 아카데미’ PBL 교육 현장
당사자 인터뷰 통해 관점 전환…“해법이 바뀐 건, 더 깊이 들여다봤기 때문”
“처음엔 누구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막상 인터뷰를 해보니, 그 전에 필요한 건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어떻게 찾느냐였더라고요.”
‘유일한 아카데미’에 참여한 이호인(차의과학대 간호학과 2년) 씨는 발달장애인의 사회적 고립 문제를 주제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 씨가 속한 ‘살구씨 프로젝트’ 조는 처음엔 돌봄자 간 소통을 위한 커뮤니티 플랫폼을 구상했다. 정보 공유와 정서적 지지를 통해 고립을 완화하자는 취지였고, 커뮤니티 지속 운영을 위한 배너 광고 모델까지 고민했다.
하지만 무의 홍윤희 대표를 비롯한 현장 전문가들과의 인터뷰를 거치며, 프로젝트의 초점은 바뀌었다. 홍 대표는 “발달장애는 진단 경계가 불분명하고 치료법도 확립되지 않아 상업적으로 악용되기 쉽다”며 “실제로 온라인상엔 치료 효과를 과장하거나, 광고와 당사자 정보가 섞인 콘텐츠도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 씨는 “인터뷰를 통해 지체장애인이 병원을 찾는 데조차 정보 부족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점을 알게 됐다”며 “정보 접근성이야말로 사회적 고립을 풀기 위한 첫 관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살구씨 프로젝트 팀은 신뢰할 수 있는 병원 정보를 모아 시각적으로 제공하는 ‘1차 병원 정보 지도’ 제작으로 방향을 전면 수정했다. 단순한 커뮤니티 공간보다, 장애 당사자와 보호자들이 병원 이용의 진입장벽을 낮출 수 있는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도구가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현재는 정보 업데이트의 지속성을 확보하기 위해 자조모임이나 관련 기관과의 연계 방식까지 논의 중이다.
◇ 문제를 정의하고, 다시 묻고…현장에서 해법을 찾다
이 프로젝트는 유한양행이 더나은미래, 희망친구 기아대책, 진저티프로젝트와 함께 운영하는 ‘유일한 아카데미’ 교육 과정의 일환이다. 제약·바이오에 관심 있는 청년들이 보건·복지 분야 사회문제를 문제기반학습(Problem-Based Learning·이하 PBL) 방식으로 탐색하고, 해법을 설계해보는 교육 프로그램이다.
학생들은 본격적인 프로젝트에 앞서 문제정의 방법론, 디자인씽킹, 질적 인터뷰 기법 등 교육 과정을 먼저 수강했다. ‘문제는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 ‘당사자의 언어를 어떻게 수집하고 분석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바탕으로, 5인 1조로 팀을 이룬 학생들은 청년, 장애인, 다문화 가정, 노인, 청소년, 영유아 등이 마주한 보건·복지 분야 사회문제를 설정하고 탐색했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은 현장을 탐방하고, 문제 당사자나 전문가와 인터뷰하며 자신이 놓친 부분을 되짚고, 해법의 방향을 수정해 나갔다.
‘뿌리깊은청년’ 조는 청년 우울 문제를 주제로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학생들은 조현식 사단법인 온기 대표, 김옥란 푸른고래리커버리센터 센터장을 만나 청년들의 심리 지원 현장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들은 “정신건강 문제를 모든 사람에게 적용하려 하면 메시지가 흐려진다”며 “좁고 명확한 대상부터 출발해야 실질적인 변화가 가능하다”고 조언했다. 이후 조는 우울 증상을 겪는 특정 청년층을 타깃으로 솔루션 방향을 좁혔다.
청소년 흡연 문제를 고민한 ‘청문해’ 조는 서울시립일시청소년쉼터를 찾아 “금연 교육보다 흡연 자체에 노출되지 않도록 하는 교육과 캠페인이 더 효과적”이라는 조언을 듣고 청소년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흡연 예방 교육으로 방향을 수정했다.
◇ 시혜에서 권리로…청년들, 시선을 바꾸다
학생들은 현장에서 마주한 이야기 속에서 당사자를 다시 바라보는 시선도 배웠다. 미등록 이주아동 문제를 탐색한 ‘물음표’ 조는 희년의료공제회 박점남 사무처장을 만나 “이주아동을 돕는 대상이 아니라, 이 사회의 시민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시혜가 아닌 권리 중심의 정책 제안 활동으로 방향을 바꿨다.
치매 환자 돌봄을 주제로 한 ‘라초이스’ 조는 처음엔 법과 제도 개선이 해법이라고 봤다. 하지만 강동구치매안심센터 홍종석 사회복지사를 만나면서 관점이 바뀌었다. 홍 사회복지사는 “제도가 없는 게 아니라, 그 제도를 실행할 사람이 부족한 것이 더 큰 문제”라고 말했다.
허서윤(중앙대 바이오메디컬공학과 4년) 씨는 “치매 환자와 사회가 공존하려면, 법보다 사람들의 인식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며 “특히 대학생으로서 현실적으로 실행가능한 솔루션에 주목하고 있다”고 했다. 조는 이후, 치매 환자가 낯선 공간에서 실종되거나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이웃이 자연스럽게 도울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드는 캠페인을 기획하고 있다.
영유아 양육자 정보 문제를 다룬 ‘유아독존’ 조는 ‘열나요’ 오남수 공동창업자와 부모들을 인터뷰하며, 정보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자녀가 아플 때 당황해 필요한 정보를 선별하는 것이 어렵다는 현실을 확인했다. 조는 이후 부모의 심리적 안정과 선택을 돕는 지침을 만들기로 했다.
유일한 아카데미의 PBL 교육 과정을 기획·운영한 진저티프로젝트의 안지혜 디렉터는 “제약·바이오 분야로 진로를 고민하는 청년들이 사회문제를 스스로 탐구하고 이해하는 경험 자체가 가장 큰 의미”라고 말했다. 이어 “해법이 바뀐다는 건 오히려 문제를 더 깊이 이해했다는 증거”라며 “이 과정은 학생들이 앞으로의 진로와 삶에서 사회를 건강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기를 수 있도록 설계했다”고 덧붙였다.
채예빈 더나은미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