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공지능(AI)은 더 이상 기술 산업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이제 AI는 사회문제 해결의 동반자로서, 그 역할의 무게를 새롭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특히 최근 몇 년 사이, 기존 시스템이 외면했던 사회·환경 문제에 AI가 정교하게 진입하면서, 우리는 기술의 진보가 아닌 ‘문제 해결력의 진보’를 목격하고 있습니다.
AI의 등장은 문제를 정의하고 접근하는 방식 자체를 바꾸는 일입니다. 기후 위기, 건강 불평등, 돌봄 격차, 정보 소외 등 복합적인 문제는 단순한 인과관계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다양한 변수와 다층적 맥락을 함께 고려해야 하며, AI는 대규모 비정형 데이터를 학습하고 분석함으로써 보다 정밀한 예측과 개입을 가능하게 합니다.
AI는 인간의 언어, 이미지, 영상, 센서 등 다양한 비정형 데이터를 기반으로 패턴을 도출하고, 이를 토대로 판단과 예측을 수행합니다. 특히 머신러닝(ML)과 딥러닝 기술은 변수 간의 복잡한 관계를 빠르고 깊이 있게 학습할 수 있어, 다층적 원인과 구조가 얽힌 사회문제 해결에 강점을 발휘합니다.
의료 영상 속 이상을 자동 탐지하거나, 위성 영상을 통해 농업 기후 패턴을 분석하는 사례가 대표적입니다. 예컨대, 오랜 기간 고비용 인력 투입에 의존해온 탄소배출 MRV(측정·보고·검증) 시스템은, 최근 국내 스타트업이 AI 기반 위성 분석 기술을 적용하면서 벼농사에서의 메탄 배출량을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 기술은 농가의 탄소배출권 시장 진입을 가능하게 만들었고, 단순한 분석 효율 향상을 넘어 저탄소 농업 전환의 핵심 수단이자, 새로운 시장 참여 방식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결국 AI는 그 자체로 임팩트를 만들어내기보다는, 임팩트를 정밀하게 구현하는 도구입니다. 하지만 모든 AI가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것은 아닙니다. 핵심은 기술이 ‘어디에’, ‘어떻게’ 사용되는가입니다. 기술의 방향은 시장 논리만으로 결정되지 않으며, 공공성과 사회적 필요를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 AI, 글로벌 임팩트 시장에 부상하다
글로벌 임팩트 투자 시장은 이미 AI를 ‘임팩트 생성 엔진’으로 주목하고 있습니다. 딜룸(Dealroom)과 임팩트VC의 2023년 보고서에 따르면, 유럽에서는 2020년부터 2023년 사이 250개 이상의 임팩트 AI 스타트업이 설립됐고, 이 중 절반 이상이 기후기술, 디지털 헬스케어, 공공안전, 포용금융 분야에 집중돼 있습니다.
대표 사례로는 미국의 ‘스프링헬스(Spring Health)’가 있습니다. 이 기업은 AI 기반 정신건강 분석 솔루션을 통해 기존 의료 시스템의 사각지대에 놓인 노동자와 가족들의 치료 접근성을 획기적으로 개선했습니다. 임상 데이터와 자연어처리 기반 AI 모델을 활용해, 개인에게 최적화된 치료 방식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기후 분야에서는 미국의 ‘카본플랜(CarbonPlan)’, 영국의 ‘오픈 클라이밋 픽스(Open Climate Fix)’, 인도의 ‘블루스카이 애널리틱스(Blue Sky Analytics)’ 등이 AI를 통해 탄소 데이터의 정합성과 투명성을 높이고, 정책 및 시장과의 연계를 촉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기업 대부분은 초기 자본 유입 단계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벤처캐피털(VC)은 ‘임팩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임팩트 투자자는 ‘딥테크’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술성과 사회적 가치를 함께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는 투자자가 여전히 부족한 것이 현실입니다.
이에 따라 오미디야 네트워크(Omidyar Network), 모질라 파운데이션(Mozilla Foundation) 등 글로벌 재단과 민간 자본은 이 간극을 해소하기 위한 ‘임팩트 딥테크 펀드’를 조성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공공보건, 재난 대응, 에너지 효율 등 특정 분야에 특화된 AI 기업을 대상으로 실증 프로젝트를 직접 지원하는 방식으로 전략을 전환하고 있습니다.
◇ 가능성은 있으나 구조는 없는 한국의 현주소
국내에서도 가능성은 곳곳에 존재합니다. 한국사회투자가 임팩트 투자를 통해 지원한 사례로는, 탄소감축 MRV 솔루션을 개발한 ‘땡쓰카본’, 시각장애인을 위한 AI 기반 안내 솔루션을 제공하는 ‘투아트’, AI 표정인식 기술로 가상공간 심리상담을 지원하는 ‘야타브엔터’, 일용직 근로자와 건설사 일자리 매칭 솔루션을 운영하는 ‘웍스메이트’ 등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기술 기반으로 사회문제 해결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입니다. 특히 땡쓰카본은 2024년 기준 국내 유일의 논벼 기반 메탄 감축 솔루션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투아트는 CES에 진출한 유일한 시각장애인 안내 스타트업으로 기록됐습니다.
하지만 이들 기업이 직면한 현실은 녹록지 않습니다. 첫째, 국내 임팩트 펀드는 여전히 전통적인 사회적 가치 창출 중심으로 설계돼 있어, AI 기반 스타트업이 기술력과 시장성만으로 평가받기 어렵습니다. 둘째, 공공조달 기준과 인증 절차, 데이터 민감성 등은 대부분 대기업이나 병원 기반의 R&D를 전제로 구성돼 있어 초기 기업에게는 진입장벽이 높습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려면 ‘투자–실증–정책’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생태계를 조성해야 합니다. 민간 자본과 공익 자본이 협력해 실험과 검증이 가능한 구조를 만들고, 기술 기반 사회문제 해결에 자본이 선도적인 역할을 해야 합니다.
◇ 기술과 임팩트는 함께 설계되어야 한다
AI가 임팩트를 설계할 수 있을까요? 그 해답은 기술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기술이 어떤 문제를 다루고, 누구를 위한 솔루션으로 사용되는가에 따라 결과는 달라집니다. AI는 공정성과 가치를 내포한 존재가 아니며, 적용되는 사회적 맥락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술 창업가의 상상력과 임팩트 자본의 전략적 통찰이 만나는 접점입니다. 단순히 ‘딥테크에 투자할 것인가’가 아니라,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술에 어떻게 투자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시점입니다.
기술이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동력이 되기 위해서는, 그 기술을 신중하게 선택하고 적절히 활용할 수 있는 투자, 정책, 실행 체계를 함께 갖춰야 합니다.
임팩트를 설계하는 데 있어 기술은 도구일 뿐입니다. 그 도구를 어떤 방향으로 사용할 것인지는 우리 사회 전체의 인식과 투자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기술과 임팩트가 함께 설계되는 새로운 구조를 모색해야 할 때입니다.
이순열 한국사회투자 대표
한국사회투자의 <임팩트의 좌표> ‘임팩트 투자’라는 개념이 한국 사회에 공식적으로 도입된 지 1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할 시점에 와 있습니다. 단순히 자본을 임팩트 기업에 전달하는 것을 넘어, 우리는 과연 ‘진짜 임팩트’를 만들어내고 있을까요? 임팩트 투자가 일반적인 벤처 투자와 구별되는 지점은 무엇이며, 자본의 출처는 어떤 철학을 담고 있고, 그 자본은 어떤 방식으로, 누구에게, 어떤 시선으로 도달하고 있을까요? 이제는 ‘임팩트’라는 단어의 무게에 걸맞은 실천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냉정하게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임팩트의 좌표> 시리즈는 한국 임팩트 투자의 현재 위치와 그 좌표계를 진단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경로를 함께 모색합니다. 기술, 환경, 사회서비스, 농식품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실험되고 있는 임팩트 자본의 흐름을 추적하며, ‘임팩트’라는 단어가 단순한 슬로건이 아니라, 전이 가능한 사회적 변화의 수단으로 자리 잡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