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민·김창숙 캄보디아 기아봉사단 요즘이 캄보디아의 1년 중 가장 시원한 때라고 했는데, 기온은 여전히 30도를 넘었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3시간여를 포장도 안 된 붉은 흙길을 달렸다. 차창을 통해 들어오는 뜨거운 햇빛 속에 꼼짝없이 앉아 있다 보니, 온몸은 땀으로 젖고 속은 메슥거렸다. 수도 프놈펜에서 남서쪽으로 120㎞ 떨어져 있는 ‘쭘끼리’군(郡)에 도착하자마자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부터 찾았다. ‘쭘끼리’라는 이름은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뜻이다. 이름처럼 산악지대와 밀림지대가 많은 이곳은 캄보디아에서도 특히 눈물과 상처가 많은 지역이다. 게릴라전을 펼치기 좋은 지형 탓에 이곳에서는 크고 작은 전쟁이 끊이질 않았다. ‘킬링필드’로 대변되는 학살과 내전을 1998년까지 겪었다. 1979년 크메르루주 정권이 무너지면서 일부 군대가이 지역 산악지대로 숨어들었기 때문이다. 마을 모든 집이 가족을 잃거나 장애인이 된 식구를 끌어안고 산다. 이 땅에서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상처를 치료하고 있는 부부를 만나기 위해 서울에서부터 이 먼 거리를 쉼 없이 왔다. 국제구호개발 NGO인 기아대책에서 15년 전 캄보디아 기아봉사단으로 파견한 이성민(53)·김창숙(48) 부부다. “당시만 해도 총을 든 군인들이 거리를 활보하던 시절인데,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모르겠어요. 6살·3살의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캄보디아에 왔습니다. 긴급구호 활동을 펼치느라 항상 위험한 곳에 있으면서 많이 용감해졌죠, 뭐.” 이성민 씨는 국내에서 긴급구호, 국제개발 활동 자체가 없었던 1989년, 해외 원조를 목적으로 세운 기아대책의 1호 간사이자 긴급구호 활동가다. 대한민국표(表) 1세대 해외 긴급구호 활동가인 셈이다. “그 시절 이 지역은 외부와의 왕래도 거의 없었어요. 먹을 것도 부족한 형편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