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6일(금)

“여러분이 읽으면 노숙인들의 절박한 꿈 이룹니다”

잡지 ‘빅이슈’ 판매 르포
전 세계 10개국 발행 수익금 50% 이상 노숙인에게…
“커피 한 잔도 안 되는 금액으로 모두가 웃는 세상 만들 수 있어”

미상_그래픽_빅이슈_독서_2010올 들어 가장 추운 날이었다. 서민들이 제일 많이 이용한다는 1호선과 2호선이 교차하는 신도림역. 1번 출구 앞의 사람들은 칼바람만큼이나 빠르게 지나갔다.

“안녕하세요. 빅이슈입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빅이슈는 지난 7월 창간한 ‘노숙인 자활을 돕는 잡지’다. 독자가 3000원을 내고 잡지를 사면 1600원이 판매자인 노숙인에게 돌아간다. 석 달 경력의 ‘빅판(빅이슈 판매자)’인 양정선(50)씨 옆에서 일일 ‘빅돔(빅이슈 판매도우미)’을 체험하는 기자 역시 빅이슈에서 정한 슬로건을 외쳤다. “여러분이 읽으면 세상이 바뀝니다. 빅이슈입니다.” 그 말을 듣더니 양씨는 껄껄 웃었다. “세상까지는 안 바뀌더라고요.”

양씨는 “1차 목표는 하루에 30부 파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침 9시부터 시작한 빅이슈 판매는 30분이 지나도록 개시(開始)도 못하고 있었다. 손을 외투 주머니에 넣고 목도리를 턱까지 끌어올린 사람들은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지나갔다.

“커피 한 잔 드세요.” 양씨가 가방에서 보온병을 꺼내 커피를 따라줬다. 달달한 커피가 목으로 넘어가니 추위에 바짝 긴장했던 몸이 스르르 풀렸다. 양씨는 커피를 손에 들고 이야기를 꺼냈다. “일주일 전만 해도 빅이슈를 팔며 ‘노숙인의 자활을 돕는 잡지입니다’라는 말을 안 했어요. ‘노숙인’이라는 단어를 제 입으로 하기 그렇잖아요.”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행인들과 눈을 맞추며 “노숙인의 자활을 돕는 잡지 ‘빅이슈’입니다”라고 크게 외친다. 양 씨는 “빅이슈를 팔면서 사람들이나 사회와 관계를 회복한 것 같다”며 미소를 지었다.

양씨의 휴대폰으로 문자가 도착했다. ‘오늘 날씨가 춥습니다. 감기 조심하세요.’ 그와 함께 잡지를 팔았던 ‘빅돔’이 보낸 것이었다. “문자 받고 보내는 게 좋아요. 빅이슈 판매하기 전에는 한 달에 10개 정도 썼는데 지금은 아마 한 달에 300~400개는 보낼 거예요.” 양씨가 파는 잡지 제일 뒷면에는 ‘항상 웃고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겠다’는 글귀와 그의 휴대폰 번호가 적혀 있다. 그 번호를 보고 익명의 독자가 문자를 보내기도 했다. 양씨는 그 번호를 ‘빅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저장해놓았다.

신보경 기자(오른쪽)가 ‘빅판’ 양정선씨와 신도림역 1번 출구 앞에서 빅이슈를 판매하고 있다. 올 들어 가장 추운 날, 빅이슈를 산 4명의 독자가 한없이 고마웠다.
신보경 기자(오른쪽)가 ‘빅판’ 양정선씨와 신도림역 1번 출구 앞에서 빅이슈를 판매하고 있다. 올 들어 가장 추운 날, 빅이슈를 산 4명의 독자가 한없이 고마웠다.

잡지를 한 권도 팔지 못하고 어느덧 한 시간이 흘렀다. 빅이슈 판매도우미인 ‘빅돔’으로 와서 오히려 그의 장사를 방해하는 것 같아 마음이 초조했다. 잠시 화장실에 간다며 자리를 비운 양씨 대신 목소리를 높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빅이슈입니다.” 한 여성이 다가왔다. “이 잡지가 뭔가요?” 다가온 기회를 놓칠세라 “전 세계 10개국에서 발행되는 잡지로 이 잡지를 파는 노숙인에게 수익의 50% 이상이 돌아갑니다”라고 설명했다.

아침 10시 5분, 드디어 첫 잡지를 팔았다. 대형 커피전문점의 커피 한 잔 값에도 못 미치는 3000원이지만 ‘내가 해냈다’는 뿌듯함이 들었다. 멀리서 다가오는 양씨에게 받은 돈을 흔들며 “잡지 팔았어요”라고 외쳤다.

오전이 다 가도록 양씨와 기자가 판 잡지는 4권. 그는 “아무래도 월간지이다 보니 월말이 될수록 판매부수가 떨어진다”고 말했다.

양씨의 꿈은 임대주택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왕이면 방 한 칸보다는 두 칸짜리에 살고 싶다고 했다. 술을 많이 마시며 가정을 등한시했던 자신을 첫째 딸은 아직 용서하지 못했지만, 대전에서 대학을 다니는 둘째와 셋째 딸이 오면 같이 고기라도 구워먹을 수 있는 공간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술만 조심하면 된다”고 웃으며 말하는 그는 점심식사 후 오늘 오후와 내일 팔 잡지를 사러 간다며 신도림역 앞에 묶어두었던 자전거 열쇠를 끌렀다. 빅이슈 판매를 시작하며 구입한 4만5000원짜리 자전거다. “수리비로 3만원이나 들었지만 운동도 되고 좋아요”라고 말하는 그는 행복해 보였다. 꿈을 조금이라도 빨리 이루고 싶은 양씨는 일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신도림역 1번 출구로 나간다. 만약 당신이 그곳에 간다면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 빅이슈입니다”라고 외치는 그의 밝은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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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1호 2024.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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