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다문화 혼인의 ‘첫 장면’, 호주·뉴질랜드는 달랐다

다문화 혼인은 더 이상 예외적인 선택이 아니다. 국가통계포털의 2024년 다문화 인구동태 통계에 따르면 전체 혼인 가운데 다문화 혼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9.6%로, 혼인 10건 중 1건에 이른다. 다문화 이혼 역시 전체 이혼의 8.7%를 차지한다. 특히 결혼 5년 미만에 이혼하는 비율은 31.3%로, 한국인 간 혼인(15.3%)의 두 배에 가깝다. 문제는 이 수치가 개인의 선택이나 적응 실패만으로 설명되기 어렵다는 데 있다. 다문화 혼인 가족의 초기 정착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단절은, 상당 부분 제도와 지원 구조의 한계에서 비롯된다. 코로나19 이후 다문화 혼인이 다시 증가하는 상황에서, 우리 사회가 초기 정착 지원에서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이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찾기 위해 아산 프론티어 아카데미 14기 사회혁신 프로젝트 팀 ‘비비빅(VVVIC)’은 2025년 9월 이민 선진국으로 꼽히는 호주 시드니와 뉴질랜드 해밀턴을 방문하여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현지에서 만난 기관들은 다문화 가족의 정착을 ‘개인의 적응’이 아니라, 관계와 환경을 함께 설계해야 할 사회적 과제로 바라보고 있었다. ◇ “정착은 이주여성 혼자의 몫이 아닙니다” 2002년에 설립된 뉴질랜드 해밀턴의 샤마(Shama Ethnic Women’s Trust, 이하 샤마)는 이주여성들이 주도해 만든 비영리단체다. 설립 초기에는 기존 이주여성 정착 프로그램이 실제 정착 과정에서 충분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소규모 풀뿌리 조직에 가까웠다. 샤마는 이후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보조금, 민간 재단과 개인 기부, 프로젝트 단위 펀딩 등을 통해 조직의 기반을 확장해 왔다. 사회서비스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이주여성들의

이주민 정보, 왜 닿지 않나…독일·네덜란드가 만든 ‘사람 중심’ 해법

국내 체류 외국인은 2025년 6월 기준 270만 명에 이른다. 결혼 이주 여성만 해도 약 14만6000명으로, 2006년과 비교해 77%가량 늘었다. 한국 사회는 이미 다문화·다언어 환경으로 진입했지만, 이주민이 필요한 정보를 제때, 제대로 얻을 수 있는 구조는 여전히 취약하다. 정부와 지자체는 각종 안내서와 정보 플랫폼을 마련해 왔지만, 언어와 문화의 장벽 앞에서 정보는 종종 전달되지 않는다. 자녀 양육, 의료, 주거, 생계와 같은 기본적인 생활 정보조차 이주 여성에게는 닿지 않는 경우가 많다. 정보 접근성의 격차는 단순한 편의의 문제가 아니라 안전과 건강, 정착과 자립으로 이어지는 구조적 문제다. 이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아산 프론티어 아카데미 14기 사회혁신 프로젝트 팀 ‘코끼리마루’는 지난해 9월 독일과 네덜란드를 찾았다. 이주민과 난민을 국가 공동체의 일부로 받아들여 온 두 나라는, 이주민의 정보 접근성을 어떻게 설계하고 있을까. ◇ 베를린에서 본 ‘사람’ 중심 정보 설계 베를린에서 방문한 ‘핸드북 독일(Handbook Germany)’은 다양한 배경의 언론인들이 주축이 돼 만든 비영리 단체로, 독일 사회에 새로 도착한 이주민과 난민을 위한 디지털 정보 플랫폼을 운영한다. 독일어·영어·터키어 등 9개 언어로 제공되는 정보는 단순 번역이 아니었다. 담당자가 직접 선별하고 맥락을 보완한 콘텐츠였다. 체류 자격 같은 법·행정 정보부터 일상 속 정신 건강까지, 이주민이 실제로 마주하는 질문을 중심에 두고 내용을 설계했다. 플랫폼 안의 커뮤니티 포럼도 인상적이었다. 이용자의 질문에 다른 이주민과 전문가, 커뮤니티 매니저가 함께 답하며 경험과 정보가 축적되는 구조였다. 이곳에서 정보는 일방적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청년 농업의 공백, 벨기에·네덜란드에서 답을 찾다

농촌에는 여전히 비옥한 땅이 남아 있다. 그러나 그 위에 설 청년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2022년 기준 국내 농가 인구 중 65세 이상 비율은 49.8%에 달한다. 농업은 고령화 문제를 넘어, 다음 세대가 부재한 산업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도시 청년에게 농업은 점점 더 ‘선택하기 어려운 진로’가 됐고, 기존 정책은 높은 진입 장벽만을 부각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해 왔다. 아산 프론티어 아카데미 14기 사회혁신 프로젝트 팀 ‘K-파밍브릿지’는 이 지점에서 질문을 바꿨다. “어떻게 청년을 농업으로 끌어들일 것인가”가 아니라, “왜 청년은 처음부터 농업을 진로로 고려하지 않는가”라는 물음이었다. 답을 찾기 위해 팀은 지난해 9월 12일부터 21일까지 벨기에와 네덜란드의 농업 현장을 9박 10일간 찾았다. 이곳은 첨단 기술뿐 아니라, 청년이 농업을 선택하고 지속할 수 있는 조건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작동하는 지역이었다. ◇ 신뢰로 시작하는 청년 농업 첫 번째 방문지는 벨기에 겐트 인근의 그루엔겜 농장(Groentegem)이었다. 대중교통을 타고 도착한 마을은 한국의 읍내와 비슷해 보였지만, 정돈된 도로와 주택이 어우러진 풍경은 유럽 농촌 특유의 안정감을 보여주고 있었다. 벤트 헨드릭스(Bengt Hendrickx)와 로라 에스카우지에(Laura Eschauzier) 부부가 운영하는 이 농장은 예상보다 규모가 컸다. 대형 하우스 한 동과 함께, 목재 팔레트를 재활용해 만든 교육 공간, 수확물을 판매하는 작은 매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루엔겜 농장은 지역사회지원농업(CSA, Community Supported Agriculture) 방식으로 운영된다. 250명의 회원이 연회비를 선결제하고, 필요한 농산물을 직접 수확하는 구조다. 농장 설립에 필요한 초기 자본 대부분은 이 선결제 방식으로 충당됐다. 부채

네덜란드·독일에서 확인한 동물복지 전환의 조건

한국에서 동물복지 양돈은 여전히 낯설다. 국내 동물복지 인증을 받은 돼지 농장은 26곳, 전체의 0.3%에 불과하다. 생산자는 “기준이 높고 비용이 부담된다”고 말하고, 소비자는 “좋지만 비싸고 어디서 사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수요와 공급은 엇갈린다. 2025년 국내 소비자 대상으로 한 ‘동물복지인증 축산물 소비패턴 분석 연구’에 따르면,  국민의 90% 이상이 동물복지 돼지고기를 ‘먹고 싶다’고 답했지만, 실제 구매 경험이 있는 비율은 1%에도 미치지 못했다. 아산 프론티어 아카데미 14기 사회혁신 프로젝트 팀 ‘모소리(모두를 위한 축산, 모두를 위한 소비)’는 이 정체의 원인을 공공급식에서 찾고자 했다. ‘한 끼로 구조를 바꾼다’는 문제의식이었다. 일회성 캠페인이 아니라, 생산·유통·소비가 실제로 연결되는 지점을 만들 수 있는가가 핵심 질문이었다. 그렇다면 이 전환은 해외에서는 어떻게 작동하고 있을까. 모소리팀이 탐방지로 선택한 곳은 네덜란드와 독일이었다. 두 나라는 동물복지 축산과 공공급식을 제도·시장·소비가 함께 움직이는 방식으로 전환해 온 국가다.  ◇ “돼지가 돼지답게 살아도, 농장은 지속됩니다” 지난해 9월, 네덜란드 오버레이설(Overijssel) 주 헤이노(Heino)에 위치한 양돈 농장 니쉬케스 에르프(Nieske’s erf)를 찾았다. 암스테르담에서 차로 약 한 시간 반을 달려 도착한 이 농장은 전통적인 네덜란드 농촌 풍경 속에 자리 잡고 있었고, 첫인상부터 내가 떠올리던 기존의 양돈 농장 이미지와는 확연히 달랐다. 돼지들이 좁은 칸막이 대신 흙바닥 위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햇빛이 드는 외부 공간에서 몸을 비비고, 꼬리를 흔들며 흙을 파는 모습은 한국의 양돈 농장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항생제 사용은 적었고 폐사율도 낮았다. ‘동물복지’라는 말이 붙기 전,

영국은 어떻게 ‘들을 권리’를 일상으로 만들었나

청각장애는 국내에서 매년 가장 빠르게 늘어나는 장애 유형이다. 2023년 장애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청각장애인의 95%는 후천적 원인으로 장애를 겪고 있으며, 94.7%는 수어가 아닌 음성언어를 사용한다. 노화와 소음 노출이 일상이 된 사회에서 난청은 더 이상 일부의 문제가 아니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조건이 됐다. 그러나 이들이 일상에서 마주하는 현실은 여전히 녹록지 않다. 보청기나 인공와우만으로는 넓은 공간의 울림과 배경 소음을 온전히 걸러내기 어렵다. 공공장소에서 흘러나오는 안내방송조차 제대로 알아듣기 힘든 이유다. 난청인이 원하는 것은 단순한 ‘보조기기’가 아니라, 제대로 들을 수 있는 환경이다. 이 간극을 메우는 기술이 ‘청취보조시스템(Assistive Listening System)’이다. 해외에서는 이미 공공 인프라로 자리 잡았지만, 한국에서는 개념조차 낯설다. 사단법인 히어사이클 조사에 따르면 국내에서 청취보조시스템이 설치된 곳은 전국 20여 곳에 불과하다. 그마저도 상당수는 작동하지 않거나 방치된 상태였다. 이 격차의 이유를 확인하기 위해, 아산 프론티어 아카데미 14기 사회혁신 프로젝트 팀 ‘와우와우’는 영국을 찾았다. ◇ 청취보조시스템이 ‘일상’이 된 도시 지난해 9월 말 찾은 런던 킹스크로스역(King’s Cross Station). 하루에도 수십만 명이 오가는 분주한 역사 내 소음 속에서도, 매표소 창구마다 부착된 휠체어 표지 옆에 파란색 귀 모양의 청취보조시스템 안내 표지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기차 매표소와 지하철 개찰구, 은행 창구는 물론 공중전화 부스까지, 도시는 처음부터 ‘들을 수 있는 공간’으로 설계돼 있었다. 기차 매표소 직원에게 사용 가능 여부를 묻자, 그의 의아한 표정이 돌아왔다. 인공와우를 텔레코일 모드(T-mode·보청기와 인공와우에 내장된 구리 코일이 전자신호를

청년 기자들, 현장에서 ‘작동하는 해법’을 묻다

SSIR Korea 센터·더나은미래 ‘솔루션 저널리즘 프로젝트’ 수료식 현장 고발을 넘어 해법을 묻는 저널리즘을 현장에서 배우다 “그동안 사회의 부정적인 면을 고발하는 기사만 써왔는데, 솔루션 저널리즘을 하면서 문제를 실제로 해결하는 사례를 찾는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한양대학교 SSIR Korea 센터와 더나은미래가 공동 주최한 ‘솔루션 저널리즘 프로젝트’에 참여한 박선윤(한양대 정치외교학과 4학년) 청년기자의 말이다. ‘문제는 비명을 지르지만 해법은 속삭인다’는 말처럼, 문제를 지적하는 일보다 실제로 작동하는 해결책을 찾아내는 일은 훨씬 어렵다. 그러나 그만큼 지금의 저널리즘에 요구되는 과제이기도 하다. 이번 프로젝트는 청년 기자들이 그 과정을 직접 경험해보는 자리였다. 지난 27일, 서울 성동구 헤이그라운드 성수시작점에서 열린 수료식에는 1월 6일부터 3주간 진행된 프로젝트에 참여한 3개 팀, 9명의 한양대 학생이 함께했다. 참가자들은 솔루션 저널리즘을 이론이 아닌 실제 취재와 기사 제작을 통해 익혔고, 완성된 세 편의 기사는 더나은미래에 게재됐다. 해당 기사들은 향후 SSIR 한국어판 웹페이지에도 게시될 예정이다. 청년 기자들은 각자의 관심사를 바탕으로 노인·청소년·노동 문제를 주제로 삼아, 보다 구체적인 쟁점을 좁혀 들어갔다. 문제의 현황을 짚고, 당사자와 전문가를 직접 만나 구조적 원인과 해결 가능성을 살핀 뒤 이를 기사로 정리하는 전 과정을 경험했다. 이 과정에는 더나은미래 기자들이 멘토로 참여해 취재와 작성을 함께했다. 서현선 SSIR 편집장은 “문제 해결을 위한 기사를 쓰고자 하는 이들이 하나의 완결된 저널리즘 사이클을 경험해 보길 바라는 마음으로 프로젝트를 기획했다”며 “주제 발굴부터 취재, 작성까지 전 과정을 실제로 겪어본 경험은 향후 더

도시를 깨끗하게 하는 노동, 안전은 왜 비켜서 있나

야간 수거·‘죽음의 발판’이 일상이 된 현장 왜 안전 기준은 작동하지 않는가 지난 19일 새벽 1시. 비가 그친 뒤의 서울 성동구 용답동 골목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인적이 끊긴 시간, 골목을 채운 것은 사람들이 아니라 집집마다 배출 시간에 맞춰 내놓은 쓰레기봉투였다. 한 상점 앞에는 50리터 종량제 봉투 다섯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봉투 입구는 제대로 묶이지도 못한 채 원통처럼 부풀어 있었다. 기자가 봉투 하나를 들어 올리자 중심을 잡기 어려울 만큼 묵직했다. 약 한 시간 반 뒤, 골목 안으로 수거 차량이 들어왔다. 두 명의 환경공무관이 차에서 내려 봉투를 집어 들었다. 습기를 머금은 봉투들은 거침없이 트럭 위로 던져졌다. 한 명이 봉투를 들어 올리면, 다른 한 명은 계단 세 단 높이의 적재함 위에 올라 ‘토스’하듯 받아 올렸다. 골목을 돌수록 차량 위에 쌓인 봉투 더미는 점점 높아졌다. 기온은 영하 3도. 얼굴에는 이내 땀방울이 맺혔다. 쉼 없이 이어지는 작업 탓이었다. 기자가 뛰어 수거 차량을 따라잡을 수 있을 만큼 정차 지점은 촘촘했다. 성동구 환경공무관의 야간 근무 시간은 자정부터 오전 8시까지. 제한된 시간 안에 담당 구역을 끝내야 하다 보니 작업 속도는 빨라질 수밖에 없었다. 나흘 뒤 찾은 도봉구에서는 ‘주간 수거’가 이뤄지고 있었다. 작업 시간은 오전 6시부터 오후 3시까지. 현장에서는 2인 1조 또는 3인 1조가 움직이고 있었다. 한 명이 차량을 운전하고, 나머지 인원은 도보로 골목을 돌며 쓰레기를 한곳에 모은 뒤

교실을 벗어난 청소년들, ‘꿈드림’에서 다시 길을 묻다

학교 밖 청소년의 진로·관계·생활을 다시 잇는 ‘꿈드림’ 현장에서 확인한 ‘안전망’과 남은 과제는 “어렸을 때부터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았어요. 선택지가 많다 보니 오히려 진로를 정하는 게 더 어려웠죠. 세상은 늘 한 가지 길만 요구했는데, 그 기준에 저를 맞추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학교를 떠나게 됐어요.” 조혜민(21)씨는 12살이 되던 해 학교를 그만뒀다. 그의 선택은 예외적인 사례가 아니다. 성평등가족부 청소년정책리포트에 따르면 2024년 기준 국내 학교 밖 청소년은 약 17만3800명으로 추정된다. 매년 5만 명 안팎의 청소년이 새롭게 학교를 떠난다. 통계에 잡히지 않는 고립·은둔 청소년까지 포함하면 규모는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성평등가족부의 ‘2023년 학교 밖 청소년 실태조사’에 따르면 학교를 그만둔 이유로는 ‘심리·정신적 어려움’(31.4%)과 ‘원하는 것을 배우고 싶어서’(27.1%)가 가장 많았다. 학교 밖 청소년은 흔히 ‘탈락자’로 묘사되지만, 조사 결과는 다르게 말한다. 이들 상당수는 목표가 없어서가 아니라, 기존 제도 안에서 자신의 선택지를 찾기 어려워 학교 밖을 선택했다. 조씨는 “공모전이나 대회에 지원할 때 ‘소속 학교’란에 무엇을 써야 할지 몰라 주최 측에 여러 번 전화를 걸어야 했다”며 “학교 재학생만 가능하다는 답을 들을 때마다, 세상은 여전히 청소년은 모두 학교에 다닌다고 전제하는 것 같아 답답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학교 밖 청소년이 겪는 어려움은 진로 탐색 이전 단계에서부터 시작된다. 같은 조사에서 이들은 학업 중단 이후 겪는 가장 큰 어려움으로 ‘선입견·편견·무시’(26.2%)를 꼽았다. ‘새로운 친구 만들기 어려움’(25.0%), ‘의욕 저하’(24.2%), ‘진로 찾기 어려움’(23.2%)도 뒤를 이었다. 현장 전문가들은 이

경로당에 들어온 AI, 노년 복지의 실험이 성공하려면

건강·행정·교육까지… 생활 공간으로 확장되는 ‘스마트 경로당’ AI 기술 보급이 목적 아닌, 필요에서 출발한 노년 복지 모델의 성공 조건 “어르신, 병원에 한 번 가보세요.” 경기도 부천시의 한 경로당. 태블릿 화면에서 흘러나온 인공지능(AI) 음성에 대화를 나누던 어르신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곧이어 차분한 안내 음성이 이어진다. 질문에 답하듯 말을 이어가자, 화면에는 말의 속도와 발음, 억양을 분석한 결과가 실시간으로 표시된다. 음성 인식을 통해 발화의 끊김과 흐름을 살펴 인지 변화 신호를 포착하고, 치매 가능성을 가늠하는 과정이다. 경로당 한쪽에서는 스마트 저울과 혈압계 앞에 어르신들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측정 결과는 태블릿에 저장된 뒤 곧바로 보건소로 전달된다. 고위험군으로 분류되면 병원 방문을 권유하는 안내가 이어진다. 부천시 관계자는 “경로당에서 측정된 건강 데이터가 보건소와 실시간으로 공유되면서, 어르신 건강 상태를 선제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체계가 갖춰졌다”고 설명했다. 동네 진료소가 경로당 안으로 들어온 듯한 풍경이다. ◇ 디지털 격차, 경로당에서 답을 찾다 이제 경로당은 더 이상 바둑판과 담소에 머무는 공간이 아니다. 전국 곳곳에서 경로당은 AI를 통해 건강관리·교육·행정 기능을 아우르는 생활 복지의 거점으로 변모하고 있다. 변화의 중심에는 ‘스마트 경로당’이 있다. 스마트 경로당은 노년층이 주로 이용하는 기존 경로당에 디지털 기술을 접목한 공간이다. 대형 스크린과 화상 장비, 태블릿 등을 활용해 운동·노래·건강관리 프로그램을 대면과 비대면 방식으로 동시에 운영한다. 2021년부터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스마트빌리지 확산 사업’의 하나로 추진됐으며, 중앙정부가 일괄 모델을 정하는 방식이 아니라 지자체가 자율적으로 설계·운영하는 포괄보조사업 형태다. 이 같은

좋아하는 일을 ‘오래’ 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 [임팩트 커리어 인터뷰]

임팩트 커리어 릴레이 인터뷰 <2> 오혜정 총신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대신 말하는 역할에서, 더 정확히 드러내는 역할로” “기자로서 저는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대신 전하는 사람이었다면, 지금은 연구를 통해 그 목소리가 왜 묻히는지를 드러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공익 전문 기자, 기업 재단 실무자, 그리고 사회복지학자. 오혜정 총신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의 커리어는 임팩트 생태계의 여러 지점을 가로지른다. 기업 사회공헌 컨설팅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그는 교육 관련 회사를 거쳐, 2010년 조선일보 공익섹션 <더나은미래> 창간과 함께 공익 전문 기자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기업 재단에서 약 10년간 실무를 경험한 뒤, 현재는 아동·이주배경 아동과 청소년, 다문화 가족을 연구하며 정책과 현장을 함께 들여다보고 있다. ◇ 긴장 속에서 배운 ‘현장’의 감각 오 교수는 기자 시절을 “항상 긴장 속에 있던 시간”으로 기억한다. 그는 “내가 쓴 글이 내부 문서가 아니라,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기사라는 점이 늘 부담이었다”며 “출고를 앞두고는 취재가 충분했는지, 놓친 맥락은 없는지 계속 점검하다가 악몽을 꾸기도 했다”고 말했다. 긴장과 부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만큼 현장과 가까이 설 수 있었던 시간이기도 했다. 기억에 남는 취재로 그는 ‘아동 학대 현장’을 꼽았다. 현장을 동행 취재한 뒤 기사가 나가자 “도와주고 싶다”는 연락이 여러 차례 이어졌고, 알려야 할 이야기를 대신 전하는 역할의 무게와 보람을 동시에 실감했다. 특히 2010년 창간 특집 ‘세계 Top 10 사회적 기업가를 찾아서’ 시리즈는 이후 그의 커리어를 바라보는 기준이 됐다. 직접

기록하던 기자, 설계하는 연구자가 된 이유는 [임팩트 커리어 인터뷰]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일을 ‘직업’으로 선택한 사람들은 어떻게 이 생태계에 들어와, 어떤 방향으로 자신의 일을 확장해 왔을까요. 2026년 신년을 맞아 <더나은미래>는 사회혁신 영역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선택과 이동을 따라가는 릴레이 인터뷰를 시작합니다. 이 시리즈는 개인의 이력을 넘어, 임팩트 생태계가 사람을 어떻게 길러내고 붙잡아 왔는지를 기록합니다. 첫 번째 주인공은 <더나은미래> 창립 멤버이자 사회혁신 R&D 기업 이노소셜랩을 이끌고 있는 고대권 대표입니다. /편집자 주 임팩트 커리어 릴레이 인터뷰 <1> 고대권 이노소셜랩 대표 “해결책을 찾는 만큼, 질문을 누가 던질지 고민해야 한다” “사회문제가 커지는 속도에 비해, 그것을 해결하는 속도는 늘 더디다고 느꼈습니다. 그 격차를 줄이기 위해 선택한 방식이 R&D 기반 접근이었죠.” 사회혁신 R&D 기업 이노소셜랩을 이끌고 있는 고대권 대표의 말이다. 공익 전문 기자로 사회혁신 현장을 기록해 온 그는 2015년 이노소셜랩을 창업하며, 관찰과 취재의 자리에서 문제를 분석하고 구조적으로 다루는 연구·설계의 영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기록에서 현장으로…지식으로 사회문제에 접근하다 고 대표가 사회혁신 생태계와 처음 연결된 계기는 ‘영화’였다. 영화 평론을 하며 사회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고, 홈리스들과 함께 저자를 초대해 인문학 책을 보는 모임을 진행하기도 했다. 이 경험은 CJ그룹과 함께 지방 분교에서 사흘간 영화를 제작하고, 마을에서 상영하는 사회공헌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이 프로젝트를 계기로 그는 2010년 3월 조선일보 공익섹션 <더나은미래>에 합류해 창간호부터 2년간 공익 전문 기자로 활동했다. 그는 기자 시절을 돌아보며 지면 기획이 가장 기억에 남는 시도였다고 말했다. 고 대표는 “당시 8면으로 발행되던

사회혁신적인 대학이 사회혁신가를 키운다

전공과 진로를 넘어 ‘경험’으로 설계된 사회혁신 커리어의 출발점 한양대 사례로 본 사회혁신 이니셔티브의 조건과 한계 사회혁신은 특정 전공이나 직업군의 전유물이 아니다. 실내건축디자인, 경영학, 산업공학을 전공한 세 명의 청년은 각기 다른 출발점에서 사회혁신을 접했고, 이후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커리어를 재설계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대학에서 사회혁신을 개념이 아닌 경험으로 접했다는 점이다. 실내건축디자인을 전공한 이정인 씨는 수업을 통해 사회혁신을 처음 알게 됐다. 사회혁신은 전공과 무관한 영역이라고 생각했지만, 수업에서 수용자 자녀를 지원하는 단체를 인터뷰하며 돌봄의 사각지대를 접했고, 이후 전공 수업에서 수용자 부모와 자녀가 만나는 접견 공간을 설계 주제로 삼았다. 공간 디자인이 사회문제 해결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파이낸스경영학을 전공한 조수연 씨는 취업 준비 과정에서 사회혁신융합전공 수업을 선택했다. 사회혁신을 막연히 사회복지와 유사한 개념으로 이해하던 그는 수업과 인턴십을 통해 이 영역이 요구하는 전문성과 가치지향성을 체감했다. 졸업 후 대기업인 삼성전자에 입사했지만, 의미와 효능감을 느끼기 어려웠고 결국 회사를 떠나 사회혁신 조직 임팩트리서치랩에서 일을 하고 있다. 산업공학을 전공한 백경은 씨는 ‘사회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가 공존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했다. 사회적기업 동아리 활동을 통해 캠퍼스 내 자원순환을 촉진하는 기부 모델을 개발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임팩트 지향 조직에서의 인턴십 경험을 거쳐 영리 기업에서 커리어를 시작한 그녀는, 현재 현대자동차그룹에서 자신의 업무를 임팩트 관점에서 해석하며 일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한양대학교에서 사회혁신을 경험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한양대는 2018년 사회혁신융합전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