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민(거꾸로캠퍼스 재학생)
[Z의 휠체어] 전통과 장애의 공존

지난해 말 가족들과 서울 종로구 익선동에 놀러 갔다. 익선동은 볼거리, 놀거리, 먹을거리들이 가득한 소위 ‘핫플레이스’다. 근방에 창덕궁, 경복궁, 운현궁이 있고 거리 곳곳에 한옥 식당, 카페, 상점도 많다. 그러나 휠체어를 타고 갈 수 있는 곳은 거의 없었다. 그렇게 많은 가게를 앞에 두고도 하염없이 거리를 걷기만 했다. 과거와 현대의 멋이 공존하는 한옥은 장애인에게 ‘그림의 떡’ 같은 존재이다. 초등학생 시절 체험학습으로 궁에 가는 걸 싫어했다. 애초에 계획 단계부터 배제당했다. ‘어차피 가기 힘드니까’라는 말로 시작하는 문장을 수십 번 들었다. 어찌어찌 가더라도 관람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다른 친구들이 건물을 둘러보고 설명을 듣는 동안 가만히 기다리기 일쑤였다. 그냥 집에 보내달라고 말하던 어린 마음엔 큰 상처가 남았다. 2020년 8월, 이 문제의 해결 방안으로 SK텔레콤이 AR(증강현실)을 통해 궁을 관람하는 ‘창덕ARirang’을 선보였다. 창덕ARirang 광고에는 휠체어를 탄 아이가 나온다. 그는 친구들과 함께 창덕궁에 놀러 갔지만 휠체어 바퀴가 턱에 걸려 내부로 들어가지 못한다. 이어 아이는 스마트폰 앱으로 창덕궁 내부를 관람한다. 이러한 앱은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다. 장애인에게도 ‘직접 경험할 권리’가 있다. 이 권리의 공백은 어떤 기술의 발전도 채워줄 수 없다. 대다수의 한옥은 단차가 높고 내부가 좁다. 대대적인 개조를 하지 않는 이상 휠체어로 가기 매우 힘들다. 궁이나 한옥마을의 ‘준수한 휠체어 접근성’은 보통 내부 이동로와 화장실, 주차장 같은 부가 시설에만 해당한다. 정작 주요 관람지인 건물은 갈 수 없다. 심지어 이마저도 제대로 갖춰지지

유지민(거꾸로캠퍼스 재학생)
[Z의 휠체어] 내가 꾸미는 나의 휠체어

아주 어릴 때부터 대학병원 보조기실에 종종 갔다. 휠체어를 타면서 발생할 수 있는 척추 휘어짐과 발 모양의 변형을 막는 보조기를 만들기 위해서다. 의족, 의수 등 다양한 보조기 샘플이 있었는데, 형형색색의 무늬로 꾸며진 보조기가 가장 눈을 사로잡았다. 아동의 경우 자기가 원하는 디자인을 선택할 수 있었고, 나는 분홍꽃이 가득 그려진 디자인을 선택했었다. 이후 여러 번 보조기를 바꾸면서 그 모양새는 단조로워졌다. 휠체어도 여러 번 바꿨지만 꾸민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다. 초등학교 고학년부터는 더 이상 보조기에 무늬가 들어가지 않았고, 하루 24시간 함께 하는 휠체어와 보조기를 스스로 꾸밀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지난 6월부터 8월까지 유튜버 ‘굴러라 구르님’과 팀 개굴이 함께 한 ‘휠체어 위의 우리들’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휠체어를 사용하는 아동 청소년들이 직접 휠체어 스포크가드(휠체어 바퀴살 위에 씌워 손 끼임을 방지하는 얇은 판 형태 부속품), 가드와 어울리는 등받이 디자인을 구상하고 꾸미고, 그 휠체어 모델이 되는 뜻깊은 경험이었다. 나는 평소 좋아하는 하늘색과 체커보드 무늬, 스티커 등을 이용해 나름 ‘힙하게’ 꾸몄다. 두 달간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한동안 잊고 살던 꾸미기의 즐거움을 느꼈다. 직접 꾸미기를 한 뿌듯함은 덤이다. 이번 프로젝트 이후 내게 가장 큰 변화는 휠체어를 단순한 수단으로 여기지 않게 된 것이다. 흔히 휠체어는 장애인의 몸 일부라고 한다. 하지만 나의 경우 휠체어를 험하게 타서 흠집도 나고 고장도 여러 번 났었다. 하지만 휠체어를 꾸미고 난 뒤부터는 애착을 가지게 되어 더 조심해 휠체어를

유지민(거꾸로캠퍼스 재학생)
[Z의 휠체어] 자퇴해도 안녕하게 해 주세요

고등학교를 자퇴한 지도 벌써 반년이 지났다. 그동안 대안학교를 다니며 학업을 이어가고, 차근차근 미래를 위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진로에 대한 고민 없는 10대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온전히 스스로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학교 밖 청소년’이 되니 그 고민이 이전보다 훨씬 늘어났다. 그중 가장 큰 고민은 자기증명에 대한 막막함이다. 자퇴 후 깨달은 학교의 가장 큰 장점은 자신을 보여줄 수 있는 발판을 전부 마련해주는 것이다. 시험이나 수행평가 같이 주어진 일을 해내기만 하면 결과가 남고, 그 결과를 모두가 인정해준다. 그뿐만 아니라 선생님들과 꾸준한 상담을 통해 다양한 진로 및 진학 관련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자퇴 후 내 미래의 A부터 Z는 모두 내 손에 달려있다. 더 이상 미래의 길잡이가 되어줄 사람이 주변에 없다는 걸 떠올릴 때마다 불안감을 느낀다. 이런 경험은 비단 나만 하는 것도, 소수의 일도 아니다. 국가교육통계센터 학업중단 현황에 따르면 2016년 4만7070명이던 학업중단 청소년은 2020년 5만2261명으로 늘었다. 또한 학령인구 감소에 따라 전체 청소년 중 학교 밖 청소년 비율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들에 대한 지원은 실질적으로 잘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학교 밖 청소년을 관리하고 지원하는 주무부처는 교육부가 아닌 여성가족부다. 여성가족부가 기본 계획을 세우면 이 계획을 지자체의 지원 센터가 실천하는 형식인데, 지자체별로 운영 방침이 제각각이다. 이 때문에 학교 밖 청소년들은 큰 혼란을 겪고 있고, 이 혼란은 코로나19로 인한 등교 중지 상황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유지민(거꾸로캠퍼스 재학생)
[Z의 휠체어] 건강하게 살 권리

초등학교에 다닐 때 친구들과 함께 수영장에 간 적이 있다. 옷을 주섬주섬 갈아입는 나에게 한 친구가 물었다. “지민아, 너는 수영 어떻게 해? 휠체어에 앉아서 해?” 나는 상당히 황당했다. 철과 쇠로 만들어진 휠체어가 물에 뜰 수 없다는 건 너무 당연한 상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친구를 이해한다. 초등학생이 ‘운동하는 지체장애인’을 볼 일은 패럴림픽을 빼고 없었을 것이다. 이 일이 있고 5년이 흘렀다. 그 사이 퍼스널트레이닝(PT), 필라테스, 요가, 발레 등은 더욱 대중화됐지만 여전히 지체장애인을 보기 쉽지 않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지체장애인이 운동할 수 있는 장소는 턱없이 부족하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다. 입구가 완만하고, 엘리베이터가 있고, 장애인 화장실과 탈의실이 있는 운동 시설을 찾기는 매우 어렵다. 설령 찾는다고 해도 ‘장애인은 사고 위험이 더 크고, 사고가 일어나면 책임질 수 없다’라며 등록을 거부당하기 일쑤다. 고의가 아닌 이상 장애 유무와 상관없이 내부에서 일어난 사고에 대해선 시설이 책임져야 하지 않는가? 또 장애인이 사고를 일으킬 가능성이 크다는 것은 편견 아닌가? 사람들이 묻는다. “장애인 복지관을 이용하면 되지 않나요?” 2016년 나는 서울의 모 장애인 복지관에서 물리치료를 받기 위해 2년 이상을 기다렸다. 장소와 인력은 극히 한정돼 있는데, 수요자는 너무나 많다. 사설 센터도 상황이 비슷하다. 이렇다 보니 간신히 등록에 성공하면 멀리 이사를 하더라도 장거리 이동을 감수하며 다니던 곳에 다닐 수밖에 없다. 대기를 하는 동안에는 운동할 수 없어 건강이 악화한다. 거대한 딜레마에 빠진 셈이다. 나는 체육

유지민(거꾸로캠퍼스 재학생)
[Z의 휠체어] 내가 왜 옷에 맞춰야 해?

‘여자에게 다이어트란 평생 과제’라는 표현이 있을 만큼 현 사회의 많은 여성이 체중 감량을 위해 노력한다. 나 또한 여러 번의 다이어트를 시도했고,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다이어트 중이다. 적절한 체중 관리는 건강에 도움 되지만, 극단적인 다이어트는 그렇지 않다. 거식증을 동경하는 사람들을 뜻하는 프로아나(pro-anorexia)라는 용어가 생길 만큼 극단적인 다이어트는 사회적으로 큰 문제를 일으킨다. 여성이 저체중 상태에 이르기까지 다이어트를 하는 까닭에는 많은 외부적 요소들이 영향을 끼친다. 그중 내가 가장 문제라고 생각한 건 나날이 작아지는 여성복과 ‘프리사이즈’의 함정이다. 시중의 의류 브랜드에서는 흔히 ‘프리사이즈’라는 명칭으로 상의, 하의, 원피스 등을 단일 사이즈로 판매한다. 이름 그대로 모두가 자유롭게 입을 수 있는 옷이라고 홍보하지만, 대다수는 44~55사이즈에 맞춰져 있다. 또한 프리사이즈를 포함한 여성복 라인은 나날이 짧아지고 작아지는 추세다. 여성들은 자연스럽게 작아지는 옷에 체형을 맞추기 위해 다이어트를 하게 된다. 가끔 옷 쇼핑을 하다 보면 지금 성인 여자의 옷을 보고 있는 건지, 아동 코너의 옷을 보고 있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을 때도 있다. 실제로 소셜미디어에서도 아동복과 여성복을 나란히 두고 사이즈를 비교하는 사진이 종종 올라오기도 한다. 5~6세 여아의 옷과 10~20대 여성 옷의 크기가 같은 것은 분명 문제다. 여성복의 사이즈 축소 현상은 여성들의 의류 선택권을 박탈한다. 특히 작은 옷을 입은 여자 연예인들을 미디어에 일상적으로 노출하는 현 사회는 여성에게 끊임없이 자신의 체형을 검열하게 만든다. 해외에서는 1990년대 후반부터 ‘있는 그대로 아름다운 나의 몸을 사랑한다’라는 신조(信條)의

유지민(거꾸로캠퍼스 재학생)
[Z의 휠체어] 티끌 아껴 지구 지키기

요즘 들어 지구의 수명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날이 가속화되는 지구온난화는 우리로 하여금 지구는 너무나 거대하고 절대적인 존재라 그 누구도 제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상기하게 한다. 오늘은 근래 실천하는 환경 보호를 위한 나의 습관 세 가지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첫 번째 습관은 양치컵 사용이다. 이것은 내가 어릴 때부터 오랫동안 실천 중인 습관 중 하나이다. 코로나 팬데믹 전 학교에서 점심을 먹고 양치를 할 때, 다른 친구들은 손에 물을 담아 입을 헹굴 때 나는 늘 양치컵을 써왔다. 씻고 관리하는 것이 귀찮아도 조금이라도 손에 물을 덜 묻히고 싶어 시작했는데, 어느 날 우연히 이 습관이 물을 상당히 절약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한국에너지공단에 따르면, 양치컵을 사용 시 수도꼭지 물을 틀고 양치를 하는 것보다 무려 1.5L의 물을 아낄 수 있다고 한다. 조금만 신경 쓰면 되는 일인 것에 비해 상당히 많은 물을 절약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두 번째는 음식 포장할 때 다회용기 쓰기이다. 3년간 이어지는 코로나 팬데믹과 최근 무서운 전파력을 보여주는 오미크론으로 인해 외식의 빈도가 줄고 배달이나 포장을 자주 이용한다. 자연스레 플라스틱, 종이 일회용기를 많이 쓰게 되었다. 처음엔 문제의식이 크게 들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환경 파괴에 일조를 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 요즘엔 되도록 식당에 직접 가서 다회용기에 음식을 담아 포장해오고 있다. 또한 배달을 시키더라도 일회용품 받지 않기 버튼을 클릭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유지민(거꾸로캠퍼스 재학생)
[모두의 칼럼] 멈춰버린 엘리베이터

이달 6일, 서울 지하철 4호선 혜화역 2번 출구의 엘리베이터가 봉쇄되는 사건이 있었다. 전날까지만 해도 멀쩡히 작동되던 엘리베이터가 갑작스레 봉쇄된 까닭은 바로 장애인단체의 ‘장애인 이동권 보장 시위’ 때문이었다. 장애인들이 시위를 진행해 역사를 혼란스럽게 만드니 아예 시위가 불가능하도록 장애인들의 필수 이동 수단인 엘리베이터를 막아버린 것이다. 이 사건을 접한 많은 이들이 봉쇄 조치에 대해 화를 내며 이의를 제기했다. 장애인 당사자인 나도 이 사건에 대해 한마디 덧붙이려 한다. 먼저 엘리베이터 봉쇄의 의도가 악질적이며 노골적이라고 생각한다. 혜화역 측에선 지하철을 이용하는 시민의 안전을 지키고 시설물을 보호하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봉쇄했다고 밝혔다. 그들이 말하는 시민의 범주에 이동권 보장을 주장하는 장애인들은 포함되지 않다는 것이 충격을 받았다. 시설물을 보호한다는 표현도 불쾌했다. 장애인들을 공공에 해를 입히려는 의도를 가진 사람들처럼 묘사했기 때문이다. 혜화역은 다른 역들보다 장애인들에게 각별하다. 혜화역 인근에는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노들장애인야학, 서울대학교병원 등이 있다. 특히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은 봉쇄당했던 혜화역 2번 출구 엘리베이터에서 도보 1분 거리에 자리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많은 장애인이 다양한 목적으로 혜화역을 찾는다. 심지어 봉쇄 당일인 12월 6일에는 ‘무장애예술주간’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예술을 즐기기 위해, 공부를 하기 위해, 진료를 받기 위해 혜화역을 찾은 수많은 장애인의 이동권을 강제로 빼앗아버린 그날의 봉쇄 조치를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시위는 주로 유동 인구가 많은 출근 시간대나 주말에 이루어진다. 이에 대해 ‘왜 굳이 제일 바쁜 시간대에 시위하느냐?’ 라고 묻는 사람들도 있다. 지하철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적은 시간대에 시위를 진행하면

유지민(거꾸로캠퍼스 재학생)
[모두의 칼럼] 코로나에서 살아남기

나는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았다가 얼마 전 건강하게 회복했다. 설마 내가 감염될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표현을 이번 계기로 정확히 이해했다.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은 후 흉통과 호흡곤란이 찾아왔다. 이튿날 저녁 대형병원 음압 병동으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일주일간 치료를 받았고 폐렴 소견과 바이러스 전파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확인받고 퇴원했다. 기간은 짧지만 코로나 환자로 지내는 동안 여러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현재 대한민국의 감염병 확진자 대처 시스템이 예상보다 더 혼란 속에 빠져 있다고 느꼈다. 첫 번째는 연락망이 너무나 중구난방이다. 기관 간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하지 않다는 것이다. 처음 확진 판정을 받으면 정말 여러 곳에서 역학조사와 격리장소 마련 등을 위해 연락이 오는데, 그때마다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답해야 했다. 두 번째는 비상상황 시 바로 의료적인 조처를 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양성 결과가 나왔던 두 번째 PCR 검사를 받은 날 새벽에 급성 호흡곤란이 왔었다. 정말 위급했었기 때문에 당장 응급처치를 해야 했다. 하지만 애초 모든 병원의 응급실은 코로나 검사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갈 수 없었다. 1339 등 관련 연락처는 상담원 연결도 힘들뿐더러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상황에 ARS 연결 과정이 너무나 길어 불편하고 혼란스러웠다. 나는 그나마 경증이고, 호흡곤란도 저절로 가라앉아 괜찮았지만, 정말 중증이거나 급성일 경우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못하고 그대로 자택에서 숨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찔했다. 코로나 치료를 받는 모두가 가장 바라는 것은 빠른 쾌유다. 하루라도 빨리

유지민(거꾸로캠퍼스 재학생)
[모두의 칼럼] 비워낸 만큼 채워지는 것들

아주 어렸을 때, 또래 여자 아이들처럼 ‘발레리나’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금세 깨닫고 말았다. 고작 대여섯살 때의 일이니 남들보다 포기와 좌절을 좀 더 일찍 맛본 셈이다. ‘아이돌’이 되는 것도 나의 오랜 꿈이었지만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포기했다.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진학 문제를 고민할 때도 남들보다 선택지가 좁았다. 성적보다는 엘리베이터와 특수학급의 유무를 먼저 봐야 했기 때문에 그게 안 되는 곳은 일찌감치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장애인이기 때문에 포기해야 하는 일들이 많았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반면 장애인이라서 예기치 않게 얻은 기회와 보람도 있다. 지금 쓰는 칼럼도 그 중 하나다. 나의 삶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고, 나의 경험이 나와 같은 상황에 놓인 사람들에게 정보가 된다는 것은 나를 지치지 않게 해 주는 원동력이 된다. 소수성을 띠기 때문에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볼 수 있고, 휠체어를 탔기 때문에 더 낮은 곳까지 면밀하게 관찰할 수 있다. 어릴 적 놀이터에서 뛰어놀지 못해 주야장천 읽었던 책들은 마음의 양식이 됐고, 독학으로 깨우친 컴퓨터는 일상생활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인생에서의 ‘득과 실’은 쉽게 장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당장 큰 손해라고 생각되는 일이 훗날 좋은 결과로 돌아오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지금은 이득이라고 여겨지는 일이 미래의 나에게 큰 피해로 돌아오기도 한다. 내가 처음 소아암을 가지고 세상에 태어났을 때 이걸 긍정적으로 생각한 가족이나 지인들은 없었을

유지민(거꾸로캠퍼스 재학생)
[모두의 칼럼] 내 휠체어 건들지 마라

세상엔 특정 집단에 속해 있기 때문에 드는 비용들이 있다. 여자는 생리대, 남자는 면도기, 학생에겐 교복 등이 여기에 속한다. 장애인에게는 장애 비용이 있다. 장애 비용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 휠체어·보청기 등 보조기구 비용, 병원 외래·입원·약 처방 등의 의료 비용, 마지막으로 생활 비용이 있다. 첫 번째, 보조기구 비용은 누구나 쉽게 예상할 수 있다. 내 경우에도 휠체어, 보조기, 재활 기구 등의 구입비와 유지비가 상당히 많이 든다. 장애의 정도가 심하거나 중첩될 경우 비용은 끝도 없이 늘어난다. 특히 휠체어, 보청기 등 개인에 따라 미세한 조절이 필요한 것들은 주문 제작 형식을 거치기 때문에 부담이 더 늘어난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내 휠체어를 함부로 만지고 장난치는 친구들에게 “이 휠체어 고장 나면 너희 가족 휴대폰을 다 팔아야 한다”고 하면 모두 장난을 멈췄던 기억이 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비용을 물어줘야 한다는 게 핵심은 아니었다. 휠체어는 장애인에게 몸의 한 부분을 구성하는 중요한 물건이니 함부로 만지면 안 되는 것을 납득시키기가 어려웠을 뿐이다. 두 번째, 의료 비용은 셋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하루 날 잡아 대형병원의 여러 과를 돌며 진료를 받으면 최소 3만원. 당일 실시된 처방, 검사에 따라 몇 십만 원이 드는 날도 있다. 진료가 끝나고 가만히 영수증을 볼 때마다 먼 훗날 혼자 아르바이트나 취업해 돈을 벌 때는 이 비용을 어떻게 감당하나 싶은 생각이 자주 든다. 매번 처방받는 약의 비용도 만만치 않다.

유지민(거꾸로캠퍼스 재학생)
[모두의 칼럼] 내겐 너무나 먼 고등학교

내년이면 고등학교 1학년이 된다. 서울은 고교 평준화 지역이기 때문에 내 친구들은 가고 싶은 고등학교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추첨을 기다리고 있다. 장애가 있는 나는 입학이 1년이나 남았는데도 벌써 고등학교 답사를 다니고 학교에 입학 문의를 해야 한다. 근 몇 개월간 주변 고등학교들을 돌아보며 한국 고등학교, 특히 사립 고등학교들이 장애 학생에게 참 불친절하다는 걸 깨달았다. 소위 ‘명문’이라는 고등학교도 경사로나 엘리베이터 같은 시설이 갖춰지지 않은 경우가 많았고 특수 교사가 없는 학교도 있었다. 심지어 장애 학생을 받아본 적이 한 번도 없다며 은근히 부정적인 의사를 내비치는 곳도 있었다. 이런 학교들이 아직도 있다는 사실이 나를 충격에 빠뜨렸다. 내가 다닌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매우 가깝고 엘리베이터도 잘 갖춰져 있다. 덕분에 지난 9년간 친한 친구들과 같은 동네에서 자라고 학교도 함께 다닐 수 있었다. 이런 내게 ‘고등학교를 알아본다’는 행위 자체가 어색했다. 어릴 적,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여러 곳에서 거부당했다고 엄마에게 듣긴 했지만 그때는 워낙 어려서 잘 몰랐기 때문에 장애 학생에게 담을 쌓는 듯한 교육 현실을 이번에 처음 느껴본 셈이다. 엉뚱하게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내가 특출나게 잘하는 것이 없어 다행이다’였다. 몇 달 전 누군가 ‘외고를 가는 게 어떠냐’고 제안한 적이 있었다. ‘그 정도 재능은 없는데…’ 하면서도 가벼운 마음으로 인근 외고를 알아봤는데, 엘리베이터가 전혀 설치돼 있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다른 지역 학생들까지 일부러 찾아와 입학할 정도로 꽤 평판이 좋은 학교였기 때문에 좀 놀랐다. 만약

유지민(거꾸로캠퍼스 재학생)
[모두의 칼럼] 내가 걷지 않기로 결심한 이유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나에게 비장애인들이 덕담 혹은 격려라며 하는 말이 있다. “네가 빨리 걸을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다.” 어릴 땐 그저 감사하다고 대답했지만 점점 커가며 이 말에 대한 반감이 들었다. 지난 몇 년간의 생각과 방황 끝에 나 스스로 결정한, ‘내가 걷지 않기로 결심한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 걸어야 할 필요성을 못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태어나서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다. 소아암으로 인한 선천적 장애인이라 평생을 못 걷는 상태로 살아왔는데, 굳이 걸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많은 비장애인이 오해하는 것이 있는데, 장애인에게 빨리 나았으면 좋겠다는 말은 잘못된 말이다. 장애는 병이 아니다. 이 때문에 ‘낫는다’는 개념이 성립할 수 없다. 나는 걷지 못하는 상태에 놓여 있을 뿐, 감기처럼 치료하고 나아야 하는 불완전한 상태에 있는 사람이 아니다. 잘 걸어 다니던 비장애인이 모종의 이유로 휠체어를 타게 되면 적응하기도 쉽지 않고 험난한 재활과정을 거치며 체력적, 정신적으로 부담이 생긴다. 나는 그 과정을 견디며 걷고 싶은 마음이 없다. 두 번째, 걷지 않고도 잘 살 수 있는 세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고 해도 여전히 장애인을 동정과 도움의 대상으로 여기는 시각이 많다. 정말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 처한 장애인도 있겠지만, 알아서 제 갈 길 가는 장애인에게 괜히 오지랖 부리는 사람들을 종종 만날 수 있는 까닭이다. 여기는 또 다른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비장애인들 상당수가 장애인을

제262호 창간 14주년 특집

지속가능한 공익 생태계와 함께 걸어온 1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