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 년 전 회사 동료가 비건 선언을 했다. 그때는 같이 갈 식당이 없었다. 식당에 가면 그는 밥과 야채 반찬만 먹어야 했다. 이제는 비건이 유행이다. 비건 식당뿐 아니라 비건 빵집, 비건 아이스크림 가게도 등장했다. 일반 식당도 비건 메뉴를 내놓고 있다. 우유와 버터가 없는 빵과 아이스크림. 그런데 맛도 좋다. 몇 년 전 국가인권위원회에 어느 군인이 진정을 제기했다. 군 식당에서 비건을 고려하지 않아 차별받고 있다는 취지였다. 흥미로운 이 사건은 국방부가 비건 메뉴를 개발하겠다고 답해 종결됐다. 우리나라 채식 인구는 약 250만명으로 전체의 3~4%로 추산된다. 관련 사업은 크게 성장하고 있다.
한 사람이 일주일에 한 번 채식을 하면 1년에 15그루의 나무를 심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그만큼 축산업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은 크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는 전 세계 모든 사람이 채식을 하면 2050년까지 매년 약 80억t의 온실가스 배출을 줄일 수 있다고 추정했다.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무려 22%다. 소비가 환경을 바꿀 수 있음을 보여준다. 난 비건이 될 자신은 없다. 그래도 일주일에 하루는 고기를 먹지 않는 ‘간헐적 비건’이 될 용의는 있다.
소비자는 기업의 가장 중요한 이해관계자다. 소비자가 없으면 기업은 존립할 수 없다. 기업의 이익은 모두 소비자에게서 나온다. 그럼 소비자가 기업을 바꾸고, 나아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나쁜 기업에 혼쭐을 내고 착한 기업에 돈쭐을 내서 기업을 바꿀 수 있을까? ‘개념있는 소비’를 통해 환경을 살리고 기업이 인권을 존중할 수 있도록 추동할 수 있을까?
소비는 투표와 같다. 해외에서는 ‘투표로서의 소비’(consumption as voting)를 연구한 논문도 있다. 파타고니아는 공급망의 생활임금을 확보하기 위해 소비자들에게 ‘투표하라’고 외친다. 공급망의 생활임금을 보장하는 기업의 물건을 사라는 것이다. 정치행위인 투표와 같이 소비행위도 기업과 세상에 큰 영향을 미친다. 투표가 세상을 항상 좋게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그로 인해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국민주권이 실현되듯이 기업도 소비자의 의사를, 소비자의 흐름을 외면할 수 없다. 모든 기업이 환경을 중시하고 ESG를 하려는 외양을 취하는 것도 결국 소비자 때문이다.
‘지속가능한 소비’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소비를 통해 지속가능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단순히 욕구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환경, 인권, 안전, 공정 등 가치가 고려된다는 점에서 ‘가치 소비’라고도 한다. UN 지속가능발전목표(SDGs) 중 12번째 목표에도 ‘책임있는 소비’가 있다. 그러나 지속가능한 소비는 저절로 활성화되지 않는다. 소비자에게 충분하고 객관적인 정보가 제공돼야 한다. 소비자의 권리가 보장돼야 한다. 기업 활동에 소비자의 목소리를 반영할 수 있는 매커니즘이 구축돼야 한다.
EU는 2020년 말 ‘새로운 소비자 의제’(New Consumer Agenda)를 발표했다. 녹색 전환과 순환경제를 위해서 소비자가 핵심이라는 것이다. 소비자를 움직여 기후 및 환경 목표를 달성하겠다는 것이다. 소비자가 지속가능한 제품을 사용하면 관련 산업이 발전되고 사회의 지속가능성 목표는 달성될 수 있다.
지속가능 소비가 가능하도록 기업에게 관련 정보공개를 하도록 한다. 모든 기업이 친환경을 이야기하지만 정보를 신뢰할 수 없다. 거짓된 환경성 주장도 넘쳐 난다. 이른바 그린워싱(green washing)이 난무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EU는 소비자법제인 ‘소비자권리지침’과 ‘불공정상관행지침’ 개정안을 발표했다. 이러한 장치가 마련되면 기후 및 환경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소비자 행동에 필요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고 본다.
특히 순환경제 전환에서 소비자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생산-사용-폐기의 선형경제가 아니라 사용된 제품을 재사용·재활용하여 순환하도록 하는 경제를 순환경제라고 한다. 제품을 오래 사용할 권리를 부여하고, 이를 통해 비용을 절감할 수 있게 하면 순환경제의 수요는 커진다. 순환경제 추동의 핵심에 ‘수리할 권리’(Right to Repair)가 있다. 그 동안 우리는 물건을 사고, 빨리 교체하고 그리곤 버렸다. 옷을 수선해 입거나 전자제품을 수리해 사용한 경우는 적었다. 그런 시스템도 마련되지 않았다. 기업은 부품이 없다거나 수리하는데 돈이 많이 든다면서 새로 구매할 것을 권유했다. 처음부터 오래 쓸 물건을 만들기 보다는 빨리 교체하는 것을 유인했다.
EU는 2023년 3월 ‘상품 수리를 촉진하는 지침’을 제안했다. 판매자는 교체보다 비용이 많이 드는 경우를 제외하고 수리의무가 주어진다. 심지어 보증기간 이후에도 소비자가 수리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한다. 수리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설명자료 제공, 온라인 수리 플랫폼도 구축된다. 나아가 EU는 ‘지속가능한 제품 에코디자인 규정’을 만들었다. 제품 설계단계에서 내구성(durability)과 재활용 가능성(reusability)을 고려해야 한다. 향후 유럽에서는 이러한 요건을 준수한 제품만이 시장에 나오거나 서비스로 제공될 수 있다.
모든 기업이 ESG 경영을 이야기한다. ESG경영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소비자 중심 경영’이다. 경영활동 전반에 소비자를 중심에 두고, 소비자의 권익을 높이는 경영을 말한다. 우리나라의 소비자기본법에도 규정돼 있다. 그런데 소비자의 의견을 듣거나 소비자와 적극적으로 소통하며 소비자를 중심에 두는 경영이 과연 이루어지고 있을까?
‘진실과 정의를 팔아라.’ 미국의 아이스크림 회사인 밴엔제리스의 미션이다. 이 회사는 사회적 가치와 공정무역을 중시하는 대표적 기업이다. 벤앤제리스가 지불하는 공정무역 프리미엄은 전 세계 공정무역 거래의 약 1.5%를 차지한다. 이를 통해 매년 약 20만명의 농부들이 정당한 대가를 받고 있다. 벤앤제리스는 미국 1위의 아이스크림 회사가 됐다. 갓뚜기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오뚜기는 착한 기업이라는 이미지로 성장했다. 소비자가 기업을 바꾸고, 소비로 세상을 바꾸는 일이 가능하는 사례가 아닐까?
임성택 법무법인 지평 대표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