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활동가는 세상에서 가장 어렵다는 육아와 그 다음으로 어렵다는 사회변화를 동시에 이루어가는 위대한 존재다.”
최근 글로벌 기업들의 가장 큰 변화라면 성공한 여성들이 더 이상 가정 이야기를 감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동안 개인적인 얘기를 회사에서 하는 사람들은 프로페셔널하지 않다고 여기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으나, 그녀들은 공적인 자리에서 사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 또한 프로페셔널의 삶이라는 메시지를 직원들과 사회에 던지고 있다.
페이스북의 최고운영책임자(COO) 셰릴 샌드버그는 엄마로서의 삶을 병행하는 것이 힘들다는 애기를 여러 인터뷰에서 거리낌 없이 하기도 한다. 2010년 테드(TED) 강연에서는 강연장에 오기 전 세 살 된 딸을 유치원에 데려다 주고 오는데 “엄마, 가지마. 비행기 타지 마”라고 말하는 아이를 보며 굉장히 힘든 순간이었고 죄책감이 들었다고 말했다. 샌드버그는 오후 5시면 무조건 퇴근해서 두 아이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셰릴 샌드버그 페이스북 COO의 테드 강연 영상
여성들이 일터에서 사생활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개인의 삶이 직장에서의 삶만큼 중요하다는 인식의 변화를 의미한다. 기업들은 성공적인 삶을 위해 더 이상 일 또는 삶 사이의 선택(Work-Life Choice)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삶이 일을 방해하지 않도록 세탁서비스, 자녀 입학상담지원, 애완견 동반 출퇴근 등 다양하고 세심한 복지제도를 통해 직원들을 만족시키려고 경쟁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여성들의 교육수준이 높아지면서 경제활동참가 수준도 증가하고 과거와 달리 결혼 후에도 일을 포기하지 않는 여성들이 늘고 있다. 2015년 고용노동부 발표에 따르면 대기업·공공기관 여성고용비율이 37.4%로 나타났다. 지난 20년간 일가정양립 지원 정책들도 많이 도입되어 여성들이 일하기에 좋은 환경도 조성되고 있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하게 되면 경력이 단절되는 현상은 여전이 문제로 남아 있다. 15세 미만 어린 자녀를 둔 여성들의 고용비율이 80% 이상인 덴마크, 스웨덴 등 유럽 국가들과 비교할 때, 최연소아동이 영아인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이 30%에 그쳐 현저히 낮다.
사회적 인식도 제도도 좋아지는 것 같은데 아이를 키우며 일하는 여성들은 여전히 힘들다. 한쪽에서는 일과 삶 두 마리 토끼를 야무지게 잡아내 당차게 살아가는 슈퍼우먼들을 보여준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워킹맘이 셰릴 샌드버그(페이스북 COO)나 마리사 메이어(야후 CEO)는 아니다. 당당한 그녀들 앞에서 자괴감만 들뿐이다. 다른 한쪽에서는 일과 삶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고 하니까 힘든 거다, 너무 잘하려는 강박관념을 버려라는 등 위로의 메시지를 던진다. 조금도 위로가 안 된다. 그다지 잘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든 하루하루 버티고 있는 거다.
많은 워킹맘들이 그렇게 버티고 버티다 지치게 되면 바쁜 생활 속에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있다는 죄책감과 “벌면 얼마나 번다고…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라고 생각한다. 결국 일을 포기하게 되고 경력단절 여성이 된다. 전부는 아니지만 경력단절 여성의 대부분이 임신, 출산, 육아 및 자녀양육 문제로 일을 그만둔다. “친정엄마만 있었더라면…” 많은 워킹맘들의 꿈이다.
“그래 나도 괜찮은줄 알았는데, 안 괜찮았나 봐.
나 힘들었어 내가 무리하고 있다는 것도 모를 만큼 아팠어.
근데 더는 못 버틸 것 같았어.”
– JTBC 드라마 <이번 주 아내가 바람을 핍니다> 7화 송지효(수연 역)대사 중
진짜 잘 사는 나라는 GDP가 높은 곳이 아니라 국민들이 일과 삶의 균형을 이루며 행복감을 느끼는 나라이다. 덴마크는 ‘무상 보육 서비스’를 모든 국민들에게 제공한다. 아이가 생긴 부모는 출생 혹은 입양 후 1년의 유급휴가를 가질 수 있다. 보육 서비스에서 단연 세계 최고다. 국민들이 일과 삶의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돕는 스칸디나비아의 작은 국가에는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국민들이 살고 있다. 핀란드도 이에 뒤지지 않는다. 핀란드 정부는 보육시설을 지원하고, 어린아이를 둔 가정이 보육 시설을 이용하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법적으로 보장하고 있다.
“당당하게 사용하세요, 엄마 그리고 우리 가족을 위한 휴가
임신부라면 두 시간 일찍 퇴근하세요, 근로시간 단축제
90일간의 출산 전후휴가를 활용하세요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을 늘리고 싶다면? 육아휴직
아빠도 당당하게 요구하세요, 아빠의 달”
우리나라도 고용노동부에서 다양한 임신・출산 휴가제도, 육아휴직 제도를 내놓고 있다. 하지만 워킹맘들에게 이러한 제도들은 내가 살고 있는 초록별의 애기가 아니라 머나먼 우주 어느 곳엔가 존재할 유토피아의 애기처럼 들린다. 백 가지, 천 가지 제도가 있으면 뭐하겠는가, 써먹지를 못하는데. 상사들의 눈치, 동료들에 대한 미안함, 휴가 후 자리가 없어질 것에 대한 불안감 그리고 경제적 부담감까지 우리 사회는 워킹맘들이 일을 그만두도록 하는데 우호적이다.
더욱이 제도를 쓰고 싶어도 쓰지 못하는 워킹맘들이 더 많다. 고용보험법 상,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신청하여 급여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고용보험에 가입하여 피보험기간이 180일 이상인 임금 근로자들이다. 고용보험 미가입자(학생, 실업자, 자영업자 등)와 고용보험 사각지대(비정규직 등)에 놓여있는 사람들은 원천적으로 이 제도에서 배제되고 있다.
590년 전 세종대왕은 혁신적인 출산휴가제도를 시행한 바 있다. 세종대왕은 여자 노비의 출산 후 휴가기간을 7일에서 100일로 늘리도록 했다. 7일은 산모가 몸을 추스르기에 너무 짧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또한, 세종대왕은 출산이 가까워 일했다가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아이를 낳는 경우가 있어 출산 전 1개월 동안 일을 면제해주는 휴가제도를 도입하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산모가 출산 후 돌봐줄 사람이 없어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생하자 남편에게도 출산 후 만 30일 동안 일을 쉬도록 출산휴가를 주었다. 현대인들은 조선시대 노비만도 못한 삶을 살고 있다.
여성의 인력구성비율이 높고 성평등을 강조하는 비영리조직은 워킹맘이 일과 삶의 균형을 이루기에 좋은 곳일까. ‘워킹맘 생존육아’의 저자 박란희 더나은미래 편집장이 보고 온 미국의 NGO는 국내의 모습과는 사뭇 달라보인다.
(…) 사회도 도와야 하고, 직장도 도와야 하고, 부모들 자신도 삶의 우선순위를 조금 조정해야 합니다. 아이는 절대 혼자서 걷지 못합니다. 2년 전, ‘머시콥’이라는 미국 NGO를 취재하러 갔는데 금요일 오후 5시가 되자 우리 일행과 대화를 나누던 남녀 직원들이 모조리 일어났습니다. Q&A 시간이 조금 남았음에도, 칼 같았습니다. 그들이 말이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지금 우리 아이들이 우리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어요”
– 박란희 더나은미래 편집장 (워킹맘 생존육아 스토리펀딩 中 2015.10.01. 링크를 클릭하면 해당 글로 이동합니다)
국내 비영리조직들 중에도 즐겁게 일할 수 있는 훌륭한 일터 조성을 위해 노력하는 곳들이 있다. 서울시 자원봉사센터의 경우 ‘일하기 좋은 직장(Great Work Place: GWP)’을 만들기 위해 센터 임직원이 평등하고 자기주도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조직의 비전과 개인의 행복 및 사회의 건강한 변화를 창발적으로 성취하는 일터 조성을 중요한 가치로 삼고 있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며 우리 직원들이 행복했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다행히 이전보다 직원들이 조금 더 행복해보입니다. 지난 몇 년간 행복한 직원이 행복한 세상을 만든다는 신념으로 일하기 좋은 직장 만들기(GWP Great Work Place)를 위해 꾸준히 노력하였고 그 결과가 조금씩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박윤애 前서울시 자원봉사센터장 (V세상블로그. 2016.01.28.)
국내 비영리조직들 중 규모가 큰 조직, 정부지원을 받는 중간지원조직 등을 제외하고 대부분 10인 미만의 조직들은 일가정양립을 위한 제도적, 조직적 차원의 노력들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다고 보면 된다. 조직의 여건상 활동가가 쉬면 조직이 멈춘다. 대체인력을 투입할 수 있는 여력도 없고 그만큼의 전문성을 보유한 인력을 찾기도 어렵다. 배려하고 싶어도 배려할 수 없는 구조다. 또한, 개인적으로 활동을 멈추면 경제적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최악의 커플은 부부활동가라는 농담처럼 부부가 모두 활동가인 경우 둘이 벌어도 4인 가족 최저생계비에 미치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결혼 후 가정의 생계를 위해 한쪽이 직업을 바꾸는 경우가 많다.
무엇보다 가장 큰 요인은 ‘눈치’다. 눈치는 한국사회 일가정양립의 최대 적으로 비영리조직이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다. 타인과의 관계에 많은 신경을 쓰는 우리의 문화는 눈치가 일상화되어 있다. 눈치는 다른 사람의 기분을 빨리 파악하고 대인 관계를 유지시키기 위한 수단이자, 나아가 대한민국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능력이다. 선한 의지로 모인 사람들 속에서도 정도가 덜할 뿐이지 눈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많은 여성활동가들 역시 조직 내 눈치 속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 한 여성활동가는 눈치 보여서 출산휴가도 겨우 쓰고 있고, 육아휴직은 어림도 없다고 한다. 다른 여성활동가는 육아휴직을 신청하면서 복귀 후 자리가 없을 수도 있다는 기관장의 애기를 들었고, 실제 돌아오니 정말 자리가 없었다고 토로한다. 어떤 여성활동가는 아이를 맡길 곳도 가까이 사는 친정엄마도 없어서 일을 그만두었다고 말한다. 정규직 활동가의 경우에도 제도가 있더라도 리더의 선심이나 인간적 배려 차원에서 제도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모 비영리단체의 사무총장은 “솔직히 관리자의 입장에서 신입 활동가를 선발할 때 여성보다 남성을 선호하게 된다”고 말한다. 재정과 인력이 부족한 비영리단체에서 여성활동가의 임신, 출산, 육아의 공백을 감당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비영리단체에서 굉장히 흥미로운 현상 중 하나는 활동가의 대부분이 여성인데 단체장은 남성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똑같이 활동을 시작하더라도 여성활동가들은 중간에 임신, 출산, 육아로 인한 휴직을 갖게 되어 경력개발에 차질이 생기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또한, 여성들 스스로 언제 닥칠지 모르는 임신과 출산으로 막중한 부담과 책임을 짊어져야 할 리더 자리를 꺼리기도 한다.
현실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일과 가정의 조화를 이루며 자신의 길을 오롯이 걸어가는 여성활동가들도 있다. 비영리단체의 수장으로서 조직도 가정도 알차게 꾸려가고 있는 멋진 그녀들이지만, 많은 워킹맘들처럼 좌충우돌 부딪치며 자신만의 해법을 찾아가고 있다.
“네 살 딸의 어린이집 동요 발표회에 허겁지겁 갔다가 다시 허겁지겁 회사로 향하는 길, 버스 안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햇빛이 유독 눈부시다. 발표 후 엄마를 만나자마자 온 힘껏 나를 끌어안아 준 그 힘차고 순수한 포옹의 느낌을 오래 아주 오래 기억하고 싶구나.
– 이혜영 아쇼카한국 대표 (페이스북, 2016.11.28)
“대부분의 워킹맘들이 가족과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지 않나. 나도 마찬가지였다. 실무자 때부터 워낙 주말 행사나 출장이 많았다. 그런데 미안한 마음을 갖는 게 일에도, 가족에게도 도움이 안 되더라. 나부터 내 일에 애정을 가졌고, 틈나는 대로 가족들에게 내 일을 이해시키려 노력했다. 시민참여 행사 땐 가족들을 꼭 부르고, 출장 땐 어떤 업무인지를 공유했다. 아이들이 엄마가 하는 일을 이해하니 오히려 내가 어려운 일을 맡아 주저할 때 적극적으로 지지해주더라. 그게 21년을 지속한 힘이다.”
– 양진옥 굿네이버스 회장 (더나은미래 인터뷰, 2016.8.16. 링크를 클릭하면 해당 기사로 이동합니다)
워킹맘들에게 일과 가정은 힘이자 짐이고 짐이자 힘이다. 조직과 사회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의 짐을 덜어 주고 힘을 더해 주는 것이다. 정부, 기업, 비영리조직 등 어느 섹터나 인구절벽에 부딪힌 인류에게 여성인력은 중요한 인적자원이다. 산적한 사회문제들을 해결하고 사회혁신을 이끌어 가는데 여성활동가들은 중요한 파트너임에 틀림없다. 여성활동가들이 지속가능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정서적으로 지원해주는 것은 인류사회의 과제이다. “함께 돌보고 함께 일하는 삶”이 되도록 여성활동가들에게 친정엄마가 되어주자.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열망 넘치는 조직과 사람들을 지원하는 것”이 삶의 미션이다. CSR, CSV, 섹터 간 파트너십, 민관협력(거버넌스), 리더십, 전략경영, 성과평가, 소셜임팩트, 일가정양립 등의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영리와 비영리를 넘나들며 강의, 교육, 컨설팅, 연구 등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