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할 여지가 없는 순수한 기쁨의 하나는 일한 뒤의 휴식이다.” – 임마누엘 칸트
연일 30도를 웃도는 폭염 속에 휴가를 떠나지 않고 푹푹 찌는 도심을 꿋꿋이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돈, 건강, 시간 등 무언가 여의치 않은 사정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가 아닌데 떠나지 못한 사람들은 분명 워커홀릭 임에 틀림없다. 워커홀릭이 휴가를 즐기지 못하는 이유는 일이 정말 많거나 아니면 일을 손에서 놓으면 불안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중심이 자신이기 때문에 내가 놀면 조직이 세상이 돌아가지 않을 것 같은 압박감, 다른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는데 혼자 놀면 뒤처지는 사람이 될 것 같은 두려움으로 평생 일만 한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마지막 남은 이유는 놀 줄 모르기 때문이다.
한국사회는 행복과 재미에 대한 강박적 죄의식을 가지고 있다. 60대 이상의 시니어들은 가족들 입에 풀칠하기 바빠서, 386세대는 군사독재 정권에 저항하며 운동하느라, 현재 230대 청장년층은 심각한 경제위기로 인한 실업난으로 스펙 쌓고 일자리 찾느라 저마다의 다양한 이유로 세대 전체가 살면서 제대로 놀아본 적이 없다. 시국이 이러한데, 경제가 어려운데 등 놀지 못할 이유는 수백만 가지도 넘는다.
공익활동가들이 삶을 즐기지 못하는 이유는 일반인들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먼저는, 자유, 민주, 정의, 평화를 수호하는 공익활동가들에게 행복과 재미는 너무 가벼워 보이고 활동의 진지함을 떨어뜨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또한, 성주, 밀양, 강정 그리고 광화문과 시청 앞에서 국가권력에 대항해 투쟁하는 국민들을 두고 개인의 행복과 재미를 추구한다는 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마저 들기도 한다. 더욱이, 대체인력이 없는 3인 이하의 풀뿌리 단체들에서 활동가가 쉬면 단체 전체가 정지된다. 활동가 스스로도 현재 자신이 다루고 있는 사회적 이슈가 진행 중이거나, 수혜자들에게 서비스 제공을 중단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개인의 자유로운 시간을 추구하기란 더욱 어렵다.
사람들은 쉼을 갈망하면서도 쉬지 못한다. 대한민국에서 쉼은 근면과 성실이라는 지배적인 국민 정서에 반하는 것이며, 경쟁이 극심한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뒤쳐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한, 막상 쉼의 시간을 갖는다 해도 어떻게 쉬어야 할지 모른다. 쉼이 또 다른 노동이 되는 경우가 많다. 1주일 휴가를 끝내고 돌아 왔는데 몸과 마음이 전혀 회복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 심지어 휴가 때 밀린 일을 계획하는 사람들도 많다.
쉼과 놀이는 삶의 주요한 영역으로 여가라는 큰 개념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여가란 개인이 가정, 노동 및 기타 사회적 의무로부터 자유로운 상태 하에서 휴식, 기분전환, 자기계발, 사회적 참여를 이루기 위해 활동하게 되는 시간을 의미한다. 즉, 의무에서 벗어나 즐거운 마음으로 휴식하고, 지역사회에 참여하여 봉사하며 창조적 능력을 개발하는 등 개인의 자유의지로 행하는 모든 행위를 나타낸다.
문화관광부가 2014년에 조사한 자료들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평일에 3.6시간의 여가시간을 갖는다고 응답했다. 여가시간은 주로 TV시청(51.4%), 인터넷·사회관계망서비스(11.5%), 게임(4.0%)과 같이 실내에서 하는 소극적인 여가활동을 즐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영화 관람을 제외하고 스포츠 활동은 물론이고 연주회나 전시회 같은 문화행사도 잘 즐기지 않는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한국인들 대부분이 늦게까지 야근을 하고, 출퇴근 시간이 오래 걸려 늦은 저녁 시간대에야 여가시간을 보낼 수 있기 때문에 실외에서의 적극적인 여가활동을 보내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주 5일 근무제 도입이후 여가활동이 활성화되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 한국인들 대다수는 밖에서는 술 마시고, 안에서는 TV보고 자는 게 여가활동의 전부이다. 어느 순간 대한민국 아버지의 초상은 소파에 누워 자거나 리모컨을 돌려 대는 모습이 되어 버렸다.
현대인들은 일(Business)이 아니라 그저 분주(Busyness)할 뿐이다. 스티븐 코비 박사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의 제 7습관은 ‘끊임없이 쇄신하라(Sharpen the Saw)’이다. 쇄신하라는 것은 변화와 혁신을 위해 새로운 무언가를 시도하라는 것이 아니라 나무를 더 잘 베기 위해 잠시 쉬면서 톱날을 갈라는 것이다. 신체적, 영적, 정신적/지적, 사회적/감정적 차원의 자기쇄신을 위해서는 톱날 가는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TV를 보고, SNS를 하는 동안 우리의 뇌는 수많은 정보를 처리하느라 쉬지 못한다. 톱날을 가는 게 아니라 여전히 톱질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잘산다는 것은 일과 여가가 조화를 이루는 삶을 말한다. 여가가 없이 일만 하는 삶도 일이 없이 여가만 있는 삶도 잘 사는 것이 아니다. 여가활동은 남는 시간(spare time)을 때우는 행위가 아니다. 여가시간에 잠을 잘 수도 있고, 친구를 만날 수도 있고, 야외에서 스포츠 활동을 즐길 수도 있으며, 가족들과 여행을 할 수도 있고, 혼자서 조용히 명상이나 산책을 할 수도 있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간에 여가의 궁극적 본질은 자유로움과 평화로움을 마음껏 누리고 그 가운데 자신을 회복하는 것에 있다.
스스로를 돌아보고 회복하는 것은 진정한 휴식을 통해 가능하다. 휴식은 쉴 휴(休)에 숨 쉴 식(息)으로 만들어졌다. 휴(休)는 나무(木)에 기댄 사람(人)으로 이뤄져 있다. 글자 그대로 나무에 기대 쉰다는 의미다. 쉰다는 의미에 굳이 숨을 쉰다는 의미가 더해진 것은 왜일까. 쉰다는 의미에는 몸이 쉰다는 의미와 숨을 쉰다는 의미가 함께 담겨 있다. 제대로 숨을 쉬어야 몸도 쉴 수 있는 것이다. 몸을 쉬면 숨이 여유로워지고 여유롭게 숨을 쉬면 몸이 편안해진다고 한다. 즉, 몸과 맘이 제대로 쉬어야 진짜 쉬는 거다. 쉼에 대한 불안감, 두려움, 죄의식을 벗어 던지고 마음껏 즐거움과 재미와 행복을 누려봐야 한다.
국내에 여가의 개념을 정립하고 여가문화 확산에 기여해온 김정운 교수는 20세기는 부지런하게 뛰는 근면 성실한 사람이 성공했지만 21세기는 잘 노는 사람이 성공한다고 말한다. 지식정보화 사회에서는 인간의 지적 창의력이 사회발전의 근본 동력이 되며,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는 창의력은 재미를 적극적으로 추구할 때 개발된다. 창의력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 아니라 1)정보와 정보들의 관계를 이전과는 다르게 정의하는 능력, 2)정보의 맥락을 바꾸는 능력을 의미한다. 즉, 너무 익숙해서 아무도 깨닫지 못하는 것을 새롭게 느끼게 만들어주는 이들은 근면 성실한 이들이 아니라 바로 ‘노는 놈’이라는 것이다.
최근 젊은 신세대들은 보수보다 출퇴근 시간이 자유롭고 복지혜택이 다양하며 자기계발을 지원하는 직장을 선호한다. 신세대 활동가들도 단체의 성장과 더불어 개인의 성장을 중요시 여긴다. 퇴근 후 저녁이 있는 삶을 살고자 하는 활동가들이 늘어나고 있다. 정확히 퇴근시간을 지키고, 주말에 추가근무 시 평일에 그만큼 휴일을 요구하기도 한다. 여가시간을 이용해 관심분야의 강의를 듣고 공부를 하거나, 외국어를 배우거나, 탱고를 추거나, 주말에 서핑을 하는 등 자기계발과 취미생활을 즐긴다. 일부 단체 활동가들의 경우 안식년이나 안식월 등의 제도를 이용하여 해외연수를 다녀오거나, 배낭여행을 하고, 육아를 하며 가족들과 충분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활동이 삶이고, 삶이 활동이었던 1,2세대 활동가들에게 신세대 활동가들의 이러한 모습들은 일에 대한 소명의식과 헌신의 부족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야근은 기본. 때때로 토요일, 일요일도 없이 단체에 메달려 있다 보면 나의 삶이 없어져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한다.” – 김래영(성남이로운재단)
“활동가들이 바쁜 일상에서 일에 대한 중압감을 낮추고, 자기 삶에 대한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 일과 전혀 상관이 없는 취미활동을 가져 볼 것을 권하고 싶다. 많은 활동가들이 잠잘 시간도 부족한데, 취미는 사치스럽게 느껴진다고 말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하지만 취미 활동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채울 수 없는 일에 대한 만족감을 취미를 통해 느껴보면서 행복의 빈도를 늘려볼 필요가 있다, 취미를 통해 자신의 삶에 대한 만족도와 질을 높이는 것이 활동으로 인한 정신적・육체적 피로를 해결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 임윤정(환경교육센터)
공익활동의 최근 화두는 사회적 가치창출을 위한 내외부의 “변화와 혁신(change & innovation)”이다. 지금까지 한 번도 시도되지 않은 새로운 방식으로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도가 요구된다. 이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힘은 역시 활동가의 창의력이다. 이를 위해서는 조직차원에서 활동가의 건강과 여가를 배려해야 한다. 활동가의 역량을 개인의 문제로만 놔두는 것은 일명 마른행주 쥐어짜기에 불과하다. 활동가들이 좀 놀면서 재미를 추구할 수 있도록 지지해줄 때 창의적인 방식의 소셜 이노베이션도 나올 수 있다.
창의와 혁신이 중요한 구글, 페이스북, 테슬라모터스, 애플, 픽사 등의 해외 기업들은 놀이터 같은 일터를 만들어 꿈의 직장이라 불린다. 국내에서도 마이다스 아이티, 제니퍼 소프트, SK(주) C&C 등이 직원들이 활기차고 즐겁게 일할 수 있는 환경과 복지제도 등을 제공해 직원만족과 조직성과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있다. SK(주) C&C 판교 캠퍼스 곳곳에는 자작나무와 자갈길이 갖춰진 쉼터를 조성해 직원들이 업무 틈틈이 자연의 상쾌함을 느낄 수 있도록 했고, 직원들이 스트레스를 풀 수 있도록 농구 게임, 펌프, 보드게임까지 망라한 오락실도 마련했다고 한다.
물론 비영리단체가 단체 환경을 구글 플렉스처럼 조성할 수는 없다. 재정적인 문제도 문제지만 기부자들과 사회전체가 이를 받아들이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탄력적이고 유연한 비영리단체에서 그들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활동가들이 신명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보려는 시도는 가능할 것이다.
유엔아동권리협약 31조는 ‘아동은 휴식을 충분히 즐기고, 나이에 맞는 놀이와 오락 활동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제 우리사회에 공익활동가권리협약 하나쯤 만들어져도 좋겠다. ‘지속가능하고 건강하며 창의적인 활동을 위해 활동가들은 휴식을 충분히 즐기고, 활동가들의 취향에 맞는 놀이와 오락 활동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 활력 있는 몸과 활력 있는 정신이야 말로 인류 성장의 원동력이고 발전소다.
활동가들의 휴식과 놀이는 개인의 문제가 아닌 인류의 미래가 달린 일이다. 활동가들을 위한 대학원 진학, 해외연수, 펠로우십 지원도 좋지만 이제는 활동가들의 놀이를 위한 사회적 지원이 이루어져도 좋겠다. 활동가들도 좀 놀아야 한다.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열망 넘치는 조직과 사람들을 지원하는 것”이 삶의 미션이다. CSR, CSV, 섹터 간 파트너십, 민관협력(거버넌스), 리더십, 전략경영, 성과평가, 소셜임팩트, 일가정양립 등의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영리와 비영리를 넘나들며 강의, 교육, 컨설팅, 연구 등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