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만으론 시스템 못 바꾼다” 관계·정책 활용해 문제의 구조 파고드는 ‘폴리캐피털’

2026 아시아 임팩트 나이츠<5>
하와이 식량 문제·일본 기관투자…‘돈 밖의 자본’ 활용법

“우리는 금융자본을 보도록 훈련받았습니다. 그래서 금융자본을 세고, 자금을 넣고, 측정하죠. 하지만 관계적 자본, 문화적 자본, 정치적 자본, 사회적 자본, 지적 자본, 인적 자본, 물질적 자본은 모든 시스템 안에서 항상 움직이고 있습니다.”

리사 클라이스너(Lisa Kleissner) KL 펠리시타스 재단(KL Felicitas Foundation) 공동창립자는 18일 일본 고베에서 열린 ‘2026 아시아 임팩트 나이츠’에서 이같이 말했다. 그는 금융자본뿐 아니라 관계·문화·지식·정책 등 다양한 형태의 자본을 함께 움직이는 ‘폴리캐피털(poly-capital)’의 필요성을 짚었다. 폴리캐피털이 주목받는 배경에는 ​개별 기업이나 사업에 돈을 투입하는 것만으로는 사회문제를 반복적으로 만들어내는 구조 자체를 바꾸기 어렵다는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

(왼쪽부터) 지난 18일 일본 고베에서 열린 ‘2026 아시아 임팩트 나이츠’에서 후미 스게노 일본 SIIF 글로벌 총괄, 앨리슨 포트 TWIST 매니징 디렉터, 리사 클라이스너 KL 펠리시타스 재단 공동창립자, 마사히로 가토 미쓰비시UFJ신탁은행 펠로우가 폴리캐피털과 시스템 변화 투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채예빈 기자

앨리슨 포트(Alison Fort) TWIST 매니징 디렉터는 이날 “고베 전체의 이동을 바꾸려면 도로와 대중교통뿐 아니라 사람들이 도시를 찾는 이유인 교육·일·여가 등 서로 연결된 시스템까지 함께 봐야 한다”며 “개별 문제에 대한 단일한 해법에서 벗어나, 문제를 반복해서 만들어내는 관계와 구조 자체를 바꾸는 것이 ‘시스템 변화 투자’”라고 설명했다. 폴리캐피털은 이러한 시스템 변화를 위한 주요 접근 중 하나다.

시스템 변화를 도모하는 국제 커뮤니티 TWIST는 세계 각지의 실제 사례를 모아 이러한 접근법을 구체화하고 있다. 현재 전 세계 129명의 실천가가 참여해 63개 사례를 축적했다. TWIST는 이를 분석해 폴리캐피털 활용, 근본 원인에 대한 접근, 투자자의 사고방식 전환 등을 공통 특징으로 정리했다. 사례는 플랫폼에 공개하고, 비슷한 문제를 다루는 실천가들은 ​별도의 모임을 만들거나 학계와 협업해 실천 방식을 발전시키고 있다.

◇ 폴리캐피털, 하와이 식량 문제를 파고들다

클라이스너 공동창립자는 폴리캐피털 접근을 지역 식품 시스템에 적용한 하와이 사례를 소개했다. 하와이는 식품의 약 85~90%를 외부에 의존해, 허리케인이나 코로나19 같은 위기로 물류가 흔들리면 식품 공급에 차질이 생기기 쉽다. 그는 “소를 키우고도 상당수가 미국 본토로 보내져 가공·소비되는 구조여서 단백질 공급망 역시 취약하다”며 “현지에서 누구를 만나든 식량안보가 확보된 하와이, 재정적으로 안정적인 농업, 지역 주민이 신선하고 건강한 음식에 접근할 수 있기를 원했다”고 말했다.

문제는 단순한 자금 부족이 아니라 자본이 어디에 배치돼 있느냐였다. 클라이스너와 하와이 인베스트먼트 레디(Hawai‘i Investment Ready·HIR)는 2019~2020년 정부와 필란트로피, 기업, 비영리조직 등을 대상으로 하와이 식품 시스템을 조사했다. ​생산 단계에는 자금이 몰렸지만 가공과 유통에는 투자가 거의 이뤄지지 않아 병목이 발생하고 있었다. 판로가 막히자 농민들도 생산을 늘리기 어려웠다.

이 문제가 극명하게 드러난 곳이 하와이섬 노스코나의 소 가공업체 I‘O Processing이었다. 당시 연 매출은 기존 약 300만 달러(약 42억 원)에서 50만 달러(약 7억 원) 수준으로 줄었고, 연간 처리 물량도 약 2500마리에서 500마리 미만으로 감소했다.

하지만 해법은 I‘O에 자금을 더 투입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클라이스너는 I‘O를 둘러싼 기관과 투자자, 목장주 등의 관계망을 다시 그려 누가 어떤 자원과 영향력을 갖고 있는지 살폈다. 이 과정에서 주목한 곳이 카메하메하 스쿨(Kamehameha Schools)이었다. 약 150억 달러(약 21조 원) 규모의 신탁이자 하와이 최대 민간 토지 소유자로, 약 8000에이커의 방목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식량안보 역시 이 기관이 관심을 두고 있는 주요 과제였다.

클라이스너 공동창립자는 카메하메하 스쿨과 함께 HIR을 설립한 뒤 14년간 협업하며 관계를 쌓아왔다. 이 ‘관계적 자본’을 활용해 단순히 I‘O에 투자하는 것을 넘어 방목지 정책 자체를 바꾸는 방안을 제안했다. 일정 비율의 소를 하와이에 남겨 현지에서 가공하고 지역 주민에게 공급하는 구조까지 함께 만들자는 것이다. 그는 “폴리캐피털 차원의 변화를 할 의사가 없다면 그 돈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카메하메하 스쿨은 하와이 최대 민간 토지 소유자로, 대규모 농지와 방목지를 보유하고 있다. KL 펠리시타스 재단은 이 토지와 정책 영향력을 활용해 지역 식량 시스템을 바꾸는 방안을 제안했다. /카메하메하 스쿨

이후 카메하메하 스쿨은 논의에 참여해 가축 규모 확대를 위한 투자 방안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기존 투자자들도 I‘O 재가동을 위한 재투자 의사를 밝혔고, 미지급금도 줄고 있다. 토지와 방목지 운영에 대한 영향력, 투자자의 금융자본, 목장주의 가축 공급, 14년간 축적한 관계적 자본이 동시에 움직인 결과다. 클라이스너 공동창립자는 “폴리캐피털은 금융분석에 덧붙이는 부가 요소가 아니라, 눈앞에 있지만 우리가 보지 못했던 시스템의 나머지 부분”이라고 강조했다.

◇ 돈만 넣는 투자를 넘어 시장의 구조까지 보다

폴리캐피털은 지역 문제를 넘어 기관투자로도 확장된다. 일본 미쓰비시UFJ신탁은행은 상장주식 투자에서 자금뿐 아니라 기업에 미치는 영향과 이해관계자를 모으는 힘까지 활용한다. 마사히로 가토(Masahiro Kato) 미쓰비시UFJ신탁은행 펠로우는 “30~50개 기업을 통해 임팩트를 극대화하려 했지만, 기관투자자로서 충분하지 않다고 느꼈다”며 시스템 변화 투자를 검토하게 된 배경을 밝혔다.

첫 적용 대상은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 문제였다. 처음에는 기업의 인적자본과 노동시장 문제에서 출발했지만, 분석은 경력 형성과 교육, 가족과 지역사회의 문화까지 이어졌다. 기업과 투자자뿐 아니라 정책입안자와 전문가 등도 한자리에 모았다. 올해 세 차례 다중 이해관계자 회의를 열어 각자가 마주한 장벽을 공유하고, 조직을 넘어 공통으로 나타나는 과제를 찾았다. 가토 펠로우는 “시스템 지도가 처음보다 계속 커지고 확장됐다”고 설명했다. 현재는 이를 토대로 구체적인 행동 방안을 검토하는 단계다.

직접 투자하지 않은 기업으로도 범위를 넓혔다. 미쓰비시UFJ신탁은행은 액티브 임팩트 펀드보다 규모가 큰 패시브 운용자산을 활용해 이들 기업과도 대화를 시작했다. 그는 시스템 분석을 통해 새로운 제품과 영역을 발굴하고 이를 투자 아이디어로 연결하려 한다고 이야기했다. 이 같은 접근을 “파이를 키우는 것(grow the pie)”이라고 표현하며 “시스템 변화를 통해 더 높은 수익과 더 큰 기여를 추구하고 싶다”고 말했다.

고베=채예빈 더나은미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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