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룰은 불편한 대화로만 바뀐다”

[인터뷰]  알라 무라비트(Alaa Murabit) 박사

의사, 사회운동가, 정책전문가, 그리고 임팩트 투자자. 알라 무라비트 박사의 커리어는 여러 영역을 넘나들었지만, 중심에는 언제나 ‘여성과 아동의 존엄’이 자리해왔다. 그는 진료실에서 환자를 돌보고, 거리에서 목소리를 높이며, 국제기구와 투자 현장에서 정책과 자본을 설계해왔다. 지난달, ‘2025 사회적 가치 페스타’ 참석차 방한한 알라 무라비트(Alaa Murabit) 박사를 <더나은미래>가 만났다.

2012년과 2017년 노벨 평화상 후보 올랐던 알라 무라비트 박사는 지난 8월 ‘2025 사회적 가치 페스타’ 참석차 한국을 찾았다. /김형탁 기자

이른 아침이었지만 무라비트 박사는 환한 얼굴로 대화를 이어갔다. 그는 딸을 비롯한 새로운 세대가 열어갈 미래에 기대를 드러냈다. 그리고 이슬람이라는 문화적 토양 속에서 여성 인권을 어떻게 새롭게 읽어낼 수 있는지, 의사와 투자자라는 서로 다른 이름들을 엮는 철학을 풀어냈다.

◇ 불편한 대화라도 끝까지…이슬람 안에서 여성 권리를 찾다

캐나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무라비트 박사는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부모의 고향인 리비아로 건너갔다. 때는 2005년, 군부 독재 체제의 카다피 정권이 장악하던 시기였다. 2011년 아랍의 봄이 리비아 혁명으로 번졌고, 당시 의대 마지막 학년이었던 그는 ‘리비아 여성의 목소리(Voice of Libyan Women·이하 VLW)’를 설립했다.

“여성들이 인도주의나 교육뿐 아니라 정치와 경제 영역에서도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참여를 보장하는 것이 목표였어요. 여성 고용과 리더십을 위한 최초의 경제정책을 마련했고, 여성 헌장도 제정했습니다.” 그는 2012년에 가정폭력 근절을 위해 2월 네 번째 토요일을 ‘보라색 히잡의 날(Purple Hijab Day)’로 제정했다. 보라색은 가정폭력에 맞선 연대를, 히잡은 여성의 존엄과 정체성을 상징한다.

알라 무라비트 박사는 2011년 ‘리비아 여성의 목소리(VLW)’를 설립했으며 그다음 해 가정폭력을 근절하고 여성 인권을 증진시키기 위한 ‘보라색 히잡의 날’을 제정했다. 첫해에만 1만 7000여 명이 보라색 스카르, 리본, 넥타이 등을 착용하며 가정 폭력 근절을 지지하는 캠페인에 동참했다. /VLW 페이스북 갈무리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건 ‘누르(Noor·빛)’ 캠페인이었다. 이슬람 경전을 근거로 “이슬람은 여성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전하며 성폭력·가정폭력 문제를 드러냈다. 핵심은 종교 지도자들의 참여였다. 그는 “가장 큰 저항 세력이던 종교 지도자들도 꾸란의 구절을 새롭게 해석하자 태도가 달라졌다”며 “사회 규범은 불편한 대화(uncomfortable conversations)를 통해서만 바뀔 수 있다고 믿었기에 멈추지 않았다”고 말했다.

당시 일각에서는 ‘종교 권력을 오히려 강화한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그는 “종교 지도자들은 이미 사회적 권위를 쥐고 있었고, 우리는 그 권위를 잠시 빌려 변화를 만드는 것이라 생각했다”고 밝혔다.

누르 캠페인은 리비아를 넘어 팔레스타인·요르단 등 중동 전역으로 확산됐다. 무라비트 박사는 누르 캠페인의 성공 요인으로 지역 주도성을 꼽았다. 그는 “도시마다 자체 팀을 꾸려 지역 안에서 메시지를 전달했고, 남성 중심으로 해석돼온 경전을 여성 권리의 근거로 다시 읽어냈다”고 짚었다.

◇ 협력적 금융, 여성 건강을 잇다

무라비트는 이후 국제무대에서 영향력을 넓혀갔다. 그는 2012년과 2017년 노벨 평화상 후보 올랐으며 UN SDGs 결의안(70/1) 수립에 참여했고, 2조4000억 달러(한화 약 2245조원) 규모의 국제 자금 동원 과정에 힘을 보탰다. 이어 게이츠재단 정책·옹호 디렉터로서 여성 건강을 위한 다양한 기금을 설계했다. 종교 기반 모자보건 협력기금 ‘For Mama(현재 Every Pregnancy)’를 출범시켜 첫해 1300만 달러(한화 약 181억원)를 모금했고, ‘Beginnings Fund’라는 6억 달러(한화 약 8362억원) 규모의 아프리카 모자보건 기금을 설립했다. 현재도 두 기금의 자문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무라비트 박사는 게이츠재단에서 정책·옹호 디렉터로 근무하며 종교 기반 모자보건 협력기금 ‘For Mama(현재 Every Pregnancy)’와 아프리카 모자보건 기금 ‘Beginnings Fund’를 출범시켰다. /Every Pregnancy 홈페이지 갈무리

무라비트 박사는 오늘날 여성 권리가 다시 위협받고 있다고 진단했다. “권위주의 정부가 부활하고 있고, 여성을 독립적 개인이 아닌 임신 같은 육체적 기여로만 한정하는 시각이 퍼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여성 권리 진전을 위한 가장 시급한 과제로 여성의 건강과 교육을 꼽았다. “청소년기 여아 교육은 빈곤 탈출의 가장 확실한 열쇠이고, 여성의 보건 접근권은 개인을 넘어 가족·지역사회의 건강과 경제와 직결된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여성 건강 R&D 불평등을 지적했다. “임상시험은 기본값이 남성이고, 여성은 평균 25% 더 긴 기간을 건강하지 못하게 살아간다”며 “전체 연구개발 자원 중 여성 건강에 쓰이는 건 4%도 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다만 최근 변화도 언급했다. “게이츠재단이 여성 건강 R&D에 25억 달러 투자를 발표하는 등 긍정적 움직임이 늘고 있다”며 “투자가 여성의 가임기에만 집중되지 않고 생애 전반으로 확대돼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의사의 시선, 문제 진단의 힘

무라비트 박사는 현재 글로벌 투자사 500글로벌에서 ‘협력적 금융(cooperative financing)’과 지역사회 투자 모델을 기후·보건 분야에 적용하고 있다. 각국 정부의 성장 의지와 민간 자본을 연결해 효과적인 정책·투자 해법을 설계하는 것이다. 박사는 의사로서 배운 문제 해결 방식이 이후 정책·투자 영역에서도 연결됐으며 새로운 도전을 시도할 힘이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의학에서는 환자가 팔에 감염이 생겼다면 병력을 살피고 원인을 파악한 뒤 철저히 치료한다”며 “정치·경제·사회 문제도 마찬가지로 조기 진단과 근본 원인 파악이 장기적으로 훨씬 효과적이란걸 깨달았다”고 전했다. 그는 한국 사회가 직면한 저출생, 청년실업 같은 문제도 데이터와 역사를 바탕으로 장기적이고 견고한 해법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알라 무라비트 박사는 <더나은미래>와의 인터뷰에서 사회 규범은 불편한 대화를 통해서만 바꿀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형탁 기자

무라비트 박사가 주목하는 것은 자금의 활용 방식이다. “국가와 기업 모두 자원은 있지만 어디에,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며 “반면 전 세계적으로 보건과 기후 같은 분야에는 시급한 수요가 있다”고 진단했다. 이때 공공과 민간 자금을 연결하면 ‘자원은 충분한데 실행은 멈춰 있는’ 교착 상태를 풀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지방정부와의 협력에 초점을 둔다. “일상의 변화를 가장 잘 다루려면 지역사회와 가까워야 한다”며 “시장, 시의원처럼 지역에 있는 사람들이 이들이 자원을 배분할 때 더 큰 임팩트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인터뷰 말미에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회의실에 들어갔을 때 사회적 지위, 성별, 배경이 다른 사람들이 함께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 ‘아, 이제 뭔가 흥미로운 일이 일어나겠구나’라는 확신이 듭니다. 그것이 바로 시너지입니다.”

채예빈 더나은미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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