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난청 인구 2050년 700만 명 예상… 공공시설엔 히어링 루프 설치 20곳 남짓
해외는 법으로 보장하지만 한국은 제도·인식 모두 걸음마 수준
“이제까지 내 권리를 포기하고 살아왔구나 싶었어요.”
지난달 2일, 서울 중구에 위치한 서울시립미술관. 인공와우를 착용한 난청인들이 오케스트라 공연을 들으며 중간중간 탄성을 터뜨렸다. “처음으로 음악다운 음악을 들은 기분입니다.” “앞으로는 음악회에 겁내지 않고 갈 수 있겠네요.” 이날 이들이 체험한 것은 보청기·인공와우 사용자를 위한 청취보조시스템 ‘히어링 루프(Hearing Loop)’였다.
히어링 루프는 마이크로 들어온 소리를 전기 신호로 바꿔 공연장 바닥이나 벽에 설치된 코일을 통해 자기장으로 송출하는 장치다. 보청기·인공와우에 내장된 ‘텔레코일(T-coil)’ 기능을 켜면 이 자기장을 직접 수신해, 주변 소음 없이 또렷한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별도 장비가 필요 없고 위생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해외 공공시설에서 널리 쓰인다.
이날 현장에서 진행된 만족도 조사도 효과를 보여줬다. 인공와우 사용자 32명이 텔레코일 모드를 켜고 공연과 강연을 들은 결과, 청취 만족도는 10점 만점 기준 5.84점에서 8.60점으로 2.76점 향상됐다. 참가자 21명은 “말소리가 또렷해졌다”고 했고, 16명은 “주변 소음이 줄었다”고 답했다. 한 참가자는 눈시울을 붉히며 “수술 후 처음으로 제대로 된 음악을 들었다”고 말했다.

이 행사는 아산나눔재단이 지원하는 사회혁신 리더 양성 프로그램 ‘아산 프론티어 아카데미’ 14기 와우와우 프로젝트팀이 청각장애인 소통권 비영리 단체 히어사이클, 인공와우 기업, 히어링 루프 기업과 함께 마련한 현장이다. 단순한 체험 이벤트가 아니라, 청취보조시스템이 왜 필요한지 우리 사회에 문제를 제기하고 공론장을 열기 위한 자리였다.
◇ 2050년 난청 인구 700만 시대
국내 난청 인구는 빠르게 늘고 있다. 대한이과학회에 따르면 국내 난청 인구는 2026년 300만 명, 2050년 7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청각장애는 국내 장애 유형 중 2위이자 매년 가장 빠르게 늘고 있는 유형이다. 보건복지부 ‘2023년 장애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청각장애인의 94.7%가 음성언어를 사용하지만, 수어를 사용하는 비율은 3%에 불과하다. 청취보조시스템의 필요성이 커지는 이유다
난청은 더 이상 청각장애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은 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빠른 속도로 고령화가 진행돼 이미 초고령사회에 들어섰다. 난청은 나이 들수록 급증한다. 국내 조사에서 60세 이상 절반 넘는 고령층이 난청을 겪지만 보청기 사용률은 매우 낮았고, 65세 이후 유병률이 가파르게 증가하는 경향이 확인됐다.
옥스퍼드대 연구(2020)에 따르면 청력 손실은 노인의 우울증 위험을 일반인보다 1.5~2배 높인다. 난청이 단순한 청각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고립과 건강 악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전 세계 미치료 난청 비용을 연간 약 9800억 달러(한화 약 1352조원)로 추정한다.
◇ 해외는 법제화, 한국은 20곳 남짓
영국은 ‘평등법(2010)’, 미국은 ‘장애인법(ADA)’, 호주는 ‘장애인차별금지법’으로 공공장소에 청취보조시스템 설치를 의무화했다. 뉴욕 현대미술관(MoMA), 영국 내셔널 갤러리, 프랑스 샤를 드골 공항, 뉴욕 지하철 정보 부스 등 세계 주요 문화·교통시설에서 히어링 루프를 쉽게 볼 수 있다.
반면 사단법인 히어사이클 조사 결과, 한국은 성동구 버스정류장 스마트쉼터 47곳을 단일 건으로 계산했을 때 전국 설치 시설이 20곳 남짓에 불과하다. 문제는 현장 조사한 5곳은 모두 작동이 불완전하거나 유지보수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청각장애인 104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도 절반 이상이 “들어본 적 없다”고 했고, 실제 사용 경험이 있다는 응답은 3%에 불과했다.
프로젝트팀은 확산이 더딘 이유로 협소한 시장 규모와 가격 문제를 꼽는다. 설치 업체가 제한적이고 수요도 적어 비용 대비 효율성을 높이기 어렵다는 것이다. 용어 혼란도 과제다. 일부 지자체는 조례에 ‘텔레코일존’이라는 표현을 쓰지만, 국제 표준은 ‘히어링 루프(Hearing Loop)’다.
와우와우 팀은 오는 9월 영국을 방문해 설치 의무화 법규와 원천 기술 기업, 난청인 커뮤니티 사례를 배우고, 10월에는 난청인과 가족, 일반인을 초청해 최종 행사를 연다. 설치 가이드북과 체크리스트, 가격 가이드도 제작할 예정이다.
프로젝트에 참여 중인 히어사이클의 우승호 대표는 “히어링 루프 체험 행사에서 확인된 명확한 효과를 바탕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청취보조시스템의 체계적 확산과 법제화가 이뤄져 난청인이 당당하게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경하 더나은미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