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6일(화)

[Cover Story] ‘사회적기업가’ 김태원

악기 만드는 사회적기업 ‘폴제페토’ 운영… 기타리스트 김태원
“노래 만들면 마음도 순수해져… 재능 기부는 나 자신 위한 것”

사회적기업 취지 듣자마자 결정
수익금은 강원도 아이들 위한 공연·악기 지원 등에 사용…
음원·자서전 수익 기부도 활발
아직 대중에겐 생소… 연예인 사회적기업가 많아지길

내 또다른 꿈은…
아들처럼 발달장애 겪는 사람들 평생 기댈 수 있는 학교 짓는 것

대한민국 3대 기타리스트 중 한 사람, ‘희야’ ‘비와 당신의 이야기’ ‘네버 엔딩 스토리(Never Ending Story)’ 등 수많은 명곡을 낳은 록밴드 ‘부활’의 리더, 긴 생머리를 휘날리며 웃음을 선사하는 ‘국민 할매’. 대중이 기억하는 김태원(51)의 모습이다. 하지만 그는 10여곡의 노래를 선물한 재능 기부자이자 발달장애 아이들을 위한 평생학교를 세우고 싶은 자선가, 동양인에게 꼭 맞게 제작된 악기를 아이들에게 선물하는 사회적기업 ‘폴제페토’의 대표이기도 하다. 지난 1월 여의도의 한 카페에서 김태원을 만나 우리가 미처 몰랐던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이들에게 기회 주고파… 사회적기업 ‘폴제페토’ 설립

“중독은 정말 슬픈 병이에요. 미래가 뻔히 보이는 자기파괴죠. 저는 중독의 고통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팠어요. 연주를 알려주면서 그들의 눈을 깊게 들여다봤습니다. 음악이 그들을 치유할 수 있도록 말이에요.” 김태원은 2012년 카지노 도박중독자들을 위한 재활밴드의 멘토로도 활동했었다. / 부활엔터테인먼트 제공
“중독은 정말 슬픈 병이에요. 미래가 뻔히 보이는 자기파괴죠. 저는 중독의 고통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팠어요. 연주를 알려주면서 그들의 눈을 깊게 들여다봤습니다. 음악이 그들을 치유할 수 있도록 말이에요.” 김태원은 2012년 카지노 도박중독자들을 위한 재활밴드의 멘토로도 활동했었다. / 부활엔터테인먼트 제공

“‘꿈의 기타’를 만들고 싶었어요. 작은 공방을 세워서 2년쯤 운영했는데, 주변에서 ‘차라리 사회적기업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하더군요. 수익의 일정 부분을 사회에 환원하는 기업이라기에 나는 수익의 1%도 필요 없으니까 좋다고 했죠.”

 

2011년 김태원은 ‘폴제페토’라는 사회적기업을 만들었다. 자신의 세례명인 ‘폴’과 피노키오를 만든 할아버지인 ‘제페토’를 합친 이름이다. 제페토의 마음으로 동양인 체형에 맞는 기타를 제작한다는 뜻에서 그렇게 지었다. 고령으로 현업에서 은퇴한 현악기 장인 2명과 관악기 수리를 담당하는 장애인 근로자 1명을 포함해 총 5명이 근무하고 있는 예비 사회적기업으로 올해 9월 사회적기업 전환이 목표다.

친인척 한 명 살지 않는 강원도에 폴제페토를 세운 이유는 아이들 때문이다. 김태원이 처음 기타를 만난 것은 중학교 1학년 때. 학교 폭력과 왕따에 시달렸던 소년은 친형의 기타를 연주하면서 잠들어 있던 천재성을 발휘했다. 그때 만약 손을 뻗어 닿는 곳에 기타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김태원은 “힘들었던 어린 시절, 기타는 삶의 유일한 낙이었다”면서 “오늘의 나 자신을 만든 ‘우연한 기회’가 모든 아이에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개인적으로 힘든 일이 있을 때 설악산을 자주 찾았어요. ‘사랑할수록’ ‘네버 엔딩 스토리’ 모두 그곳에서 작곡한 노래들이죠. 강원도를 여러 차례 방문하면서 유난히 아이들에게 눈이 많이 갔습니다. 그 어떤 천재도 시작은 ‘찰나’가 빚어낸 우연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강원도에는 그런 우연한 기회조차 갖지 못한 친구가 너무 많더라고요. 학생 수가 점점 줄어 폐교되는 곳도 많고요. 제게 찾아온 기타처럼, 강원도 아이들에게도 우연을 만나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폴제페토를 운영하면서 생긴 수익금은 그의 뜻대로 지역 아이들을 위해 쓰이고 있다. 초등학교 오케스트라와 밴드를 위한 악기 무상 수리는 물론, 음악을 접할 기회가 흔치 않은 이들을 위해 작은 콘서트와 창작 공연도 펼쳤다. 위스타트 삼척마을에는 1000만원어치 악기를 기증하기도 했다. ‘작은학교 희망 만들기’에도 뛰어들었다. 작은학교 희망 만들기는 통폐합 위기에 놓인 학교를 되살리기 위한 프로젝트로, 김씨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평창 안미초등학교 아이들과 ‘안미뜰 밴드’를 조직했다. 평생 기타 한 번 잡아본 적 없던 아이들에게 연주를 가르치면서 그는 “음악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느꼈다”고 했다.

“처음 만났을 때 아이들이 저를 못 미더워하더라고요. ‘저 아저씨 유명한 아저씬데, 여긴 왜 왔지’ 그 표정 있잖아요. 특히 베이스 치는 친구는 집에 가고 싶은데 선생님이 못 가게 하니까 얼굴에 짜증이 이만큼 쓰여 있더라고요(웃음). 그런데 1년간 부딪치며 연습을 하다 보니 아이들이 바뀌더군요. 어느 날 베이스 친구가 연주하는 걸 봤는데 노래에 완전히 빠져 있는 표정이었어요. 합주를 해서 소리가 맞아떨어지는 그 희열을 느낀 것 같았죠. 이 친구들과 함께 부활 30주년 기념 콘서트 무대에도 섰습니다.”

폴제페토가 생산하는 기타는 동양인 기타리스트가 좀 더 쉽게 악기를 연주할 수 있도록 돕는다. 수익금으로는 지역 아이들이 음악과 만날 기회를 제공한다. 사업을 통해 사회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사회적기업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모델인 셈이다. 그는 폴제페토의 이야기를 전하며 “더 많은 연예인이 사회적기업가가 되길 바란다”는 소망을 남겼다.

“물론 기부도 좋은 일이지만 돈 자체는 수명이 있는 물질이니까 (사회문제를 해결하려면) 인식을 바꾸고 지속 가능한 방법을 만드는 게 중요한 것 같거든요. 아직 대중에게 사회적기업이라는 개념이 익숙하지 않다 보니 연예인이든 유명인이든 저명한 분들이 솔선수범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억지로 되진 않겠지만 기왕 사업을 한다면 사회적기업도 의미 있으니까요(웃음).”

◇돌려주기 위해 부활한 남자

사회적기업가가 되기까지 그의 활동 이면에는 항상 나눔이 있었다. 어렴풋하게 나눔의 첫 기억을 더듬던 그는 ‘확실하지 않다’면서 1988년의 이야기를 꺼냈다. 데뷔곡 ‘희야’가 큰 성공을 거둔 뒤, 보컬이었던 이승철이 팀을 떠나면서 부활의 이름으로 그 어떤 활동도 할 수 없었던 시기다. ‘절망감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던 그는 정신을 차린 후 가장 먼저 동네의 양육시설을 찾았다. 김태원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그곳에서 통기타를 치며 아이들을 위한 노래를 불렀고, 크리스마스이브가 되면 과자를 한 아름 사 들고 산타클로스 행세를 하기도 했다. 알려지진 않았지만 그렇게 남모르는 선행을 즐겨 해왔다. 자서전 ‘우연에서 기적으로’에는 보육원 위문공연을 가려고 동료와 다툰 이야기가 기록돼 있을 정도다.

그가 본격적으로 나눔에 뛰어든 시기는 ‘국민 할매’라는 별명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때와 일치한다. 상처가 많았던 어린 시절, 밴드 활동을 하며 겪었던 배신과 좌절, 약물중독과 수감 생활까지. 인생의 수많은 굴곡을 넘나들면서 “사랑을 받았다면 반드시 돌려줘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된 것이다.

“지금처럼 누군가가 나를 필요로 하는 삶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시절이 있었어요. 원래 가진 것이 없었던 사람인데 지금 이렇게 ‘거저 받은 생’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사실 나눔이라는 것도 제가 가진 것 중 남는 것을 쪼갠다는 교만 같아서요. 저는 ‘돌려줌’이라는 표현을 더 좋아합니다.” 

김태원이 강원도의 한 초등학교 아이들과 함께 기타를 연주하고 있다. 폴제페토의 수익금은 강원도 아이들이 음악을 접할 기회를 만드는 데 쓰인다. / 폴제페토 제공
김태원이 강원도의 한 초등학교 아이들과 함께 기타를 연주하고 있다. 폴제페토의 수익금은 강원도 아이들이 음악을 접할 기회를 만드는 데 쓰인다. / 폴제페토 제공

2011년 작곡한 ‘누구나 사랑을 한다’의 수익금은 아이티 대지진 구호 활동에 쓰였다. KBS2 예능 프로그램 ‘남자의 자격’에서 시니어합창단을 위해 작곡한 노래 ‘사랑이라는 이름을 더하여’의 음원 수익 역시 전액 기부했다. 이 곡은 ‘천사배달부’ 고(故) 김우수씨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철가방 우수씨’의 OST로 쓰이기도 했다. 소설가 이외수씨와 공동 작업한 ‘청춘을 위하여’ 수익금은 청소년 지원 단체에, 가수 김종서와 함께한 ‘별 이야기’ 수익금은 환경단체에 기부 중이다. 이 밖에도 법무부와 함께한 학교 폭력 예방 캠페인송, 아나운서 합창단이 부른 언어 문화 개선 주제곡 등 재능 기부한 노래가 너무 많아서 일일이 기억하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다. 그가 재능 기부에 이토록 열정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저 자신을 위한 거예요. 나이가 들수록 순수하기가 어려운데, 이런 노래를 만들면 저 자신이 조금이라도 더 순수해진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사실 모든 노래는 순수함이 없으면 가치가 없어요. 듣는 사람이 바로 알고 좋아하질 않죠. 그게 바로 음악의 ‘이상한 룰(Rule)’이에요. 저는 음률로 위로를 줄 수 있는 직업을 갖고 있으니 죽을 때까지 이런 일을 계속하며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죠.”

자신의 순수함을 위해 노래를 짓는다는 그의 나눔 바이러스는 주변에도 전파됐다. 제자 백청강과 함께 한 ‘행복한 콘서트’는 지적장애인의 직업 교육 및 일자리 창출을 위한 지원 기금으로 쓰였고, ‘절친’ 박완규와 함께했던 콘서트 ‘날개’의 수익금은 퇴소자들의 사회 정착 기금 마련에 보태졌다. 2014년에는 탈북·위기 청소년을 위한 복지시설 ‘돈보스코의 집’ 증축을 위한 자선 콘서트를 열어 1억원을 기부하기도 했다. 당시 돈보스코의 집은 법이 바뀌면서 아이들이 지낼 공간을 증축하지 않으면 꼼짝없이 인원을 감축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공사비가 없어 발만 구르고 있던 시설의 사정을 아내 이현주씨의 소개로 알게 된 김씨는 두 번의 콘서트를 마련해 수익금을 쾌척했다.

음악 이외에도 나눌 것이 많다는 듯 2012년에는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를 통해 장기 기증 서약을 하기도 했다. 당시 부활 멤버 전원이 그와 함께 사후 장기 기증 서약에 동참했다.

“육신은 소울(Soul)을 담는 그릇이잖아요. ‘죽는 그 순간 바로 나를 해체해도 좋다’ 싶었죠. 기증자가 많이 부족하다던데 알려진 사람이 나서야 사람들도 동참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있었고요. 멤버들에게도 살짝 권유했더니 모두 흔쾌히 찬성하더라고요. 그때 제가 이런 말을 했어요. ‘얘들아 우리가 부활이라는 이름을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영광스럽지 않니?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는 뜻 아니겠느냐. 안 아플 거야. 걱정하지 마라(웃음)!'”

나눔 활동을 하면서 만나는 아름다운 사람들 역시 그에게는 큰 기쁨이다. 배우 손현주도 그 중 한 사람이다. 5년 전 한 방송사 합창대회에서 손씨가 이끄는 장애인 청소년 합창단 ‘에반젤리’를 만나게 된 것. 에반젤리는 아쉽게 본선에 진출하지 못했지만, 손현주가 남긴 감동은 그의 머리에서 쉽게 잊히지 않았다.

“합창대회가 끝나고 손현주씨가 계속 생각나더라고요. 전에 알지도 못했던 사이인데 무작정 전화를 걸었어요. 내가 기부할 곳을 몰라서 그런데 어디다 기부를 했으면 좋겠느냐고요(웃음). 그 뒤로 손현주씨랑 절친한 사이가 됐습니다. 연말이면 에반젤리 공연에 초청받아서 놀러 가기도 하고요. 이렇게 좋은 일을 하면서 만나는 인연들이 얼마나 멋지고 놀라운지 모릅니다. 저는 동화 ‘백설공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일곱 난쟁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나락으로 떨어진 공주님을 지켜주는 꿈같은 사람들이잖아요. 세상에 그런 일곱 난쟁이가 많다는 걸 요즘 자주 깨달아요.”

강원도 평창 안미초등학교 안미뜰밴드 어린이들과 김태원(사진 뒷줄 맨 왼쪽). 김태원은 안미뜰밴드에 ‘학교’라는 곡을 선물했다. / 폴제페토 제공
강원도 평창 안미초등학교 안미뜰밴드 어린이들과 김태원(사진 뒷줄 맨 왼쪽). 김태원은 안미뜰밴드에 ‘학교’라는 곡을 선물했다. / 폴제페토 제공

◇발달장애인 평생 기댈 수 있는 학교 설립이 꿈

그의 꿈은 발달장애인들이 평생 기댈 수 있는 학교를 설립하는 것이다. 그가 장애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은 2000년, 자폐성 발달장애 2급인 아들 김우현(16)군이 태어나면서부터다.

“아들을 만나면서 저의 모든 운명이 바뀌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저는 참 잔인한 사람이었어요. 전에도 소외된 장애인들이 많았을 텐데, 사람이 무지해서 아이가 태어난 후에야 주변으로 눈을 돌렸다는 게 너무 미안합니다. 이제야 철이 든 것 같아요.”

그는 2011년 토크쇼에 출연해 아들의 장애를 처음 세상에 밝혔다. 지난해에는 아들과 함께 리얼리티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했다. 그는 이 방송을 통해 모바일 게임에 빠진 아들을 설득해 배드민턴을 치기도 하고, 함께 지하철을 이용하기도 하면서 발달장애를 가진 아이와 부모의 일상을 그대로 공개했다. 자신과 아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전하는 것이 함께하는 세상을 만드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길 바라기 때문이다.

“카페나 식당에서 발달장애 아이가 시끄러운 소리를 낸다면 어떨까요? 사람들이 얼굴을 찡그리겠죠? 누군가는 나무라기도 할 거예요. 그래서 자폐를 가진 아이들, 그 가족들은 모두 수면 아래에 숨어 있습니다. 그들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어요. ‘연예인 누구 아들도 저렇다던데’ 하는 정도만 돼도 발달장애인 가족이 밖에서 조금 더 편하게 식사를 할 수 있을지 모르니까요.”

그에게 우현군은 미처 다 풀지 못하고 떠나야 할 숙제와도 같다. 자신과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2011년 발간한 자서전의 인세도 천주의성요한수도회에 전액 기부했다. 중증 발달장애인을 위한 장기 요양시설 ‘H2빌’ 건립을 위해서다. 세상 모든 발달장애인 아이들 둔 부모도 같은 심정임을 알기에 그의 꿈은 아들을 만나고 지금까지 한결같다.

“점점 좋아지긴 하겠지만 제 아들은 지금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현이와 같은 아이들이 세상에 많이 있어요. 그 아이들을 아주 온전하고 편안하게 키워줄 수 있는 평생학교를 짓고 싶습니다. 발달장애인 가족 분들의 사연을 들을 때마다 너무 가슴 아픈 게 ‘내 아이보다 하루만 더 살고 싶다’는 말씀을 하시거든요. 그 마음을 알기에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꼭 그런 학교를 만들고 싶어요.”

긴 인터뷰를 마치며 마지막으로 그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지 물었다. 김씨는 미소를 지으며 두 손을 모았다. 마치 기도를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때로는 실망스러운 짓도 했지만 부활을 사랑해주신 여러분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그분들을 배반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살아있는 동안 아름다운 음악을 쓰기 위해 제 목숨을 바쳐 노력하겠습니다. 80년대, 90년대, 2000년대를 지나오며 여러분이 만들었던 추억 그 어딘가에 부활의 노래가 함께했다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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