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경제의 핵심은 대기업이 아닌 중소기업, 즉 미텔슈탄트(Mittelstand)다. 미텔슈탄트는 직원이 500명을 넘지 않고 매출은 5000만 유로(약 670억원) 미만인 기업으로, 독일 전체 기업의 99%를 차지한다. 독일의 경영학자 헤르만 지몬은 ‘연 매출 40억 달러 미만으로 대중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고 수출을 위주로 하며 세계 시장에서 1~3위 또는 소속 대륙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글로벌 강소기업’을 히든챔피언이라고 정의했는데, 2017년 기준 독일의 미텔슈탄트 1300여개가 히든챔피언이었다. 전 세계 히든챔피언 2700여개(2017년 기준) 중 절반 가까이가 미텔슈탄트인 셈이다.
대다수의 미텔슈탄트들은 가족소유 경영을 한다. 이들 기업의 특징은 첫째, 기업인이 직원에 대해 큰 책임의식을 가지고 가족처럼 대한다는 점이다. 둘째, 가족 경영이라는 특성 덕분인지 다음 세대를 생각하는 지속가능하고 장기적인 경영 방식을 가지고 있다. 셋째, 기업이 속한 도시나 지역, 환경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느낀다는 점이다. 이런 이유로 히든챔피언들은 사회공헌 활동이나 재단 설립을 통해 세상에 기여하고 있으며, 재단을 통해 가문의 헤리티지(유산)를 이어가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디지털 시대, 필기구를 통해 지속적인 성장을 하고 있는 ‘파버카스텔’은 독일의 대표적인 히든챔피언이다. 설립자인 안톤 볼프강 폰 파버카스텔 백작은 “사업가로서 절대로 미래 세대의 비용을 사용해 이익을 창출하지 않겠다”는 말을 남길 정도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인식이 확고했다. 파버카스텔은 연간 20억 자루의 연필을 제작하고 있는데, 이를 위해서는 약 15만톤의 목재가 필요하다. 목재의 조달로 황폐해지는 지구에 대한 책임을 느낀 파버카스텔은 브라질 사바나 황무지에 여의도의 30배가 넘는 1만 헥타르 규모의 소나무숲을 조성하였다. 삼림을 복원하고 생물종 다양성을 보존하는 등의 활동 이외에도 ‘인간중심 경영’에도 앞장서고 있다. 1884년 독일 최초의 기업 부설 유치원을 만들었고, 2000년도에는 인종 차별과 아동 노동을 금지하는 등의 내용이 담긴 사회헌장을 제정하기도 하였다.
바이오 이유식 분야 유럽 1위 기업인 ‘힙(Hipp)’사는 독일 남부의 조용한 소도시에 위치하고 있다. 1899년 설립되어 현재는 창업자의 4대 후손이 경영하고 있는 히든챔피언이다. 이 기업은 1990년대 중반부터 사회책임경영과 윤리경영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며 기업시민의 일원으로서 지역발전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특히 ‘개인이 행복해야 조직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창업자의 경영철학을 바탕으로 종업원들의 건강과 여가 등에 필요한 다양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또 자체적으로 평생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해 직원들의 성장 기회를 제공한다. 그 결과 직원 이직률은 0.5%로 매우 낮고 평균 재직기간은 30년에 이른다. 대를 이어 근무하는 직원들도 적지 않다.
광학렌즈, 광전자 공학 분야에서 세계 시장을 리드하는 히든챔피언 ‘칼 자이츠(Carl Zeiss)’는 1846년에 설립된 가족기업이다. 현재는 주식회사로 전환하였지만 여전히 가족기업의 문화를 유지하고 있다. 칼 자이츠는 소유와 경영을 분리한 독립적인 재단이 경영을 통제하는 지배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칼 자이츠재단이 회사 주식의 100%를 보유하고 주주로서의 권리를 행사한다. 재단에는 법조계, 학계 등 덕망 있는 인사들이 이사로 참여하고 있는데, 재단의 이러한 중립적 지배구조는 사회의 다양한 요구와 미래지향성을 수용함으로써 기업경영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또 맹인을 위한 사회공헌 프로그램을 전 세계적으로 운영하는 등 매출액의 1%를 사회공헌 활동에 투자하고 있다.
독일 히든챔피언의 성공 요인은 틈새시장에서 최고가 되기 위한 노력, 적극적인 글로벌 시장 개척, 산학연 협력을 통한 외부자원의 적극적인 활용 등 경영전략적 측면도 있지만 설립 초기 가족경영의 특성이 좋은 기업문화로 작용한 점도 크다. 요약하자면 ▲종업원을 한가족으로 생각하여 성장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이들과 성과를 공유하는 사람중심의 경영 ▲오너가 책임감을 가지고 중장기적 관점에서 기업경쟁력을 높이는 책임 경영 ▲역량있는 후계자의 육성 등이 주요 성공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국내에서도 일자리 창출과 사회 전반의 양극화 현상 완화를 위한 방안으로 중소·중견기업 육성의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전 세계 히든챔피언 2700여개 중 한국 기업은 23개에 불과하다. 우리와 인접한 일본은 220개의 히든챔피언을 보유하고 있다. 히든챔피언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R&D 지원 등 기술경쟁력을 강화하는 노력도 필요하지만, 독일 가족경영의 성공사례에서 볼 수 있는 사람중심의 경영, 사회에 대한 자율적인 책임 등 사회공헌 활동을 고도의 경영전략으로 활용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이런 노력을 통해 우리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하는 수많은 ‘K-히든챔피언’이 탄생하기를 기대한다.
최재호 현대차정몽구재단 사무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