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혁신가’ 키우는 대학들]
대학의 사회혁신 교육은 그간 석박사들의 영역이었다. 지난 2010년 성균관대에 개설된 ‘사회적기업가 아카데미’를 시작으로 ‘사회적경제 MBA 과정’ 등이 잇따라 개설됐다. 햇수로 10년. 당시 500개 남짓했던 국내 사회적기업 수는 어느덧 2200개를 넘어서고, 사회문제 해결에 뛰어든 이른바 ‘사회혁신가’도 우후죽순 등장했다. 그럼에도 대학의 사회혁신 교육은 ‘고급 코스’에서 좀처럼 내려오지 않았다.
변화의 신호탄은 지난해에 터졌다. 연세대는 교과목에 사회혁신 과제를 접목했고, 한양대는 아예 사회혁신 전공까지 개설했다. 캠퍼스의 주류인 학부생들은 즉각 반응했다. 이들은 지역복지회관 문을 두드려 할머니들의 인생을 ‘영상자서전’으로 남기고, 접이식 난방 텐트를 개발해 어려운 이웃에게 전달했다. 네팔의 작은 마을에 가서 배설물을 비료로 전환할 수 있는 위생 화장실을 만들었고, 비료로 재배한 유기농 작물의 판로 전략까지 개척했다. 대학이 사회혁신가 양성의 요람이 될 수 있을까? 학생들은 이미 응답했다.
실패도 교육의 일부…사회혁신 아이디어에 평가보단 독려
연세대 고등교육혁신원은 지난해 출범 이후 다양한 사회혁신 교육을 시도하고 있다. 전공과 무관하게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아이디어만 있다면 재학생, 휴학생, 대학원생, 타대생을 가리지 않고 받아들인다. 사회혁신 과정은 크게 학점을 인정하는 ‘교과(curricular)’와 활동 중심의 ‘비교과(co-curricular)’로 나뉜다.
교과 과정은 ‘사회혁신역량 교과목’으로 개설된 수업을 들으면서 이뤄진다. 사회혁신역량 교과목은 기존 전공 수업에 사회혁신 과정을 접목한 수업을 말한다. 이를테면 건축공학과 ‘건축설계’라는 수업에 장애인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건축물 설계를 과제로 넣고, 음악대학 전공필수인 ‘화성학’에서는 청소년과 대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음악 콘텐츠를 만들어보는 식이다. 올 1학기에 진행된 문화인류학과 전공인 ‘문화기술지’에서는 수강생들이 낙원상가 건물 안의 사각지대와 지하 공간을 주제로 한 사회혁신랩을 직접 운영하면서 공간 사용자 중심의 도시 개발과 재생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다. 학점과 연계된 사회혁신 과정을 수강한 학생은 지금까지 총 5684명에 이른다.
비교과 과정인 ‘워크스테이션’은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내놓고 발전시키는 프로그램이다. 고등교육혁신원은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학생들의 실험적 아이템에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이미 시장에 나와 있거나 실현 가능성이 떨어져 보이더라도 막지 않는다. 선정된 주제를 바꿔도 된다. 실패도 교육의 일부라는 생각에서다. 연세대 학생 3명이 뭉친 ‘어시스트’팀은 워크스테이션 활동을 통해 남태평양의 작은 섬나라 니우에의 인구 감소 문제를 해결하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니우에는 한때 5000명이 넘던 인구가 1400명으로 급감한 소멸 위기 국가다. 지난해 여름, 학생들은 관광 활성화 아이템을 마련해 지역 주민을 만나고 담당 공무원을 설득하고, 급기야 니우에 총리를 만나 컨설팅 업무협약(MOU)까지 체결했다. 지난 1일 어시스트팀은 5주 일정으로 다시 출국했다. 이번에는 폐교를 활용한 관광 숙박 프로그램 ‘니우에 스테이’를 실현해 볼 계획이다. 이왕섭 연세대 고등교육혁신원 팀장은 “지난해 여름에 처음 학생들이 찾아왔을 때만 해도 황당한 얘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부딪쳐 보면서 한 나라에 정책 제안까지 했다는 게 놀랍다”며 “아이디어의 성공 여부를 섣불리 판단해버렸다면 절대 나올 수 없는 결과”라고 말했다.
특히 올해는 여러 분야에서 사회혁신 활동이 전개되고 있다. ‘아트브릿지’팀은 지방자치단체와 중소벤처기업부의 도움을 받아 인디밴드 전용 공연장을 신촌 현대백화점 주변 지하 공간에 만드는 중이다. ‘솔레베’팀은 미혼모 자립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마련하기 위해 온라인 모금 캠페인을 벌여 200만원 이상을 모았다. 고등교육혁신원에 따르면, 지금까지 워크스테이션에 참여한 인원은 185팀 1027명에 이른다.
사회혁신 교육 도입 세 학기 만에 교과·비교과 과정을 연계한 사례도 나오기 시작했다. 지난해 교과 과정에서 출발한 중고 의류 거래 플랫폼 ‘브이룩’은 올해 비교과 과정인 워크스테이션을 통해 사업을 발전시켰고, 최근 중소벤처기업부의 ‘2019 예비창업패키지’ 소셜벤처 분야로 선정돼 4200만원의 지원금을 따내는 성과를 얻었다.
사회혁신 전공 개설해 ‘체인지메이커’ 집중 육성하기도
한양대는 학부 과정에 ‘사회혁신융합전공’을 개설해 지난해부터 운영하고 있다. 관련 전공을 학부 전공으로 만든 건 국내 최초다. 학생들은 전공 36학점을 이수하면 복수전공으로 사회혁신학사 학위를 받게 된다. 교육과정은 크게 ▲사회혁신 기초이론 ▲사회혁신 캡스톤디자인(문제 해결 실습) ▲체인지메이커 액션러닝(학기제 현장 실습) 등으로 구성된다. 방법론을 먼저 배우고 설루션을 지역사회 혹은 사회적경제조직에서 직접 실현할 수 있는 구조다. 이후 전문가 피드백으로 역량을 한 단계 올리게 된다.
사회혁신 캡스톤디자인은 실무에서 직면하는 문제를 체험하는 프로젝트 수업이다. 주로 사회혁신 분야의 컨설팅이나 디지털 마케팅 수업으로 이뤄지는데, 사회적기업이나 소셜벤처를 클라이언트로 모집하고 의뢰받은 내용을 수행하는 식이다. 신현상 한양대 경영대학 교수는 “비영리 소셜벤처 ‘점프’로부터 페이스북 페이지 좋아요 수를 500개에서 1700개로 늘려달라는 요청이 있었는데, 수강생들이 디지털 콘텐츠 제작·홍보를 통해 1800개로 목표를 초과 달성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체인지메이커 액션러닝은 국내를 넘어 세계 무대로 사회혁신 아이디어를 확장할 수 있도록 돕는다. 한 학기 동안 현장 실습을 하면서 최대 15학점까지 인정받을 수 있다. 이 과정을 통해 지난해 2학기에는 인다솜(사학과 졸업) 학생이 아시아개발은행(ADB)으로 실습을 다녀왔고, 올 1학기에는 김민지(관광학과 3) 등 학생 5명이 필리핀 미혼모와 함께 현지에서 운영 중인 소셜벤처 ‘카이나 식당’ 운영을 맡기도 했다.
현재 한양대 사회혁신융합전공 신청자는 약 80명이다. 전공 개설 첫해인 지난해에는 학기마다 20명 정도 유입됐는데, 올해는 1학기에만 40명이 들어왔다. 신현상 교수는 “학생들은 수업을 선택하고 평가하는 데 있어서 무척 냉정한 편인데, 전년 대비 전공자 수가 늘었다는 점은 고무적”이라며 “학기를 거듭할수록 사회혁신 분야 교육에 대한 학생들의 수요가 확인되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글로벌 청년 교육 연수 제도인 ‘아시아태평양 청년교류 프로그램’(APYE)을 통한 유학생의 참여도 눈에 띈다. 지난해 여름방학에 허지윤 학생과 파키스탄 유학생 5명은 APYE로 필리핀 케손 지역에 태양광 가로등을 설치하는 ‘루나(LUNA)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태양광 패널에 배터리를 달아 밤에도 불을 밝히게 했고, 빛을 더 멀리 보내기 위해 전등에는 페트병을 씌웠다. 신 교수는 “사회봉사도 좋지만 매일 할 수 없기 때문에 사회문제의 근본 원인을 찾아내는 일이 더 중요하다”며 “학생들이 비즈니스 모델이나 기술 기반의 전문성을 갖춘 설루션으로 임팩트를 만들어 낼 수 있도록 낮은 레벨부터 프로페셔널 과정까지 모두 교육한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사회혁신 교육과 학부생의 접점을 넓히려는 노력은 이화여대, 서울대 등 여러 대학에서 목격된다. 올해 이화여대와 전주대는 고용노동부와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이 주관하는 ‘사회적경제 리더과정’을 학부생을 대상으로 개설했다. 이화여대는 국내 최초로 사회적경제협동과정(석·박사 과정)을 신설한 바 있지만 학부생 대상의 수업을 연 건 이번이 처음이다. 서울대도 올해 사회과학대 산하에 사회혁신교육 연구센터를 설립했다. 사회문제 해결과 관련된 13개 강좌를 정식으로 개설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지역 사회에 직접 영향을 줄 수 있는 연구 수행을 통해 지방자치단체 차원의 제도 개선을 꾀한다는 계획이다.
[문일요 더나은미래 기자 ily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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