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부하면서 소송을 떠올리는 사람은 드물다. 소송까지 내다봤다면 애초에 지갑을 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판결문에는 기부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기부자가 대학을, 장학재단이 세무서를, 종교단체가 정부를 상대로 다툰 사건들이다. 소송은 신뢰가 깨진 자리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거꾸로 읽으면, 기부의 신뢰를 누가 지키고 누가 흔드는지, 그리고 세법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보인다.
기부에 세제 혜택을 더 주자는 말을 꺼내면 늘 같은 질문이 돌아온다. 공익법인을 어떻게 믿느냐, 결국 조세회피에 쓰이는 것 아니냐. 결론부터 말하면 이렇다. 믿는 일은 기부자에게 맡기고, 법과 정부는 꼭 필요한 안전장치만 두자. 의심을 앞세워 문을 닫아 두면 지켜지는 것은 세금이 아니라 의심이고, 잃는 것은 기부다.
◇ 뜻은 적힌 만큼만 지켜진다
2003년 한 향토기업인이 한 지방 국립대에 305억 원을 기부하기로 약정하고 195억 원을 먼저 냈다. 새 캠퍼스 땅값으로 쓰일 것이라 믿었는데, 대학이 상당 부분을 연구비와 건물에 쓰자 나머지 110억 원은 낼 수 없다며 소송을 냈다. 대학이 뒤늦게 유감을 표했지만, 재판의 결론은 달랐다. 약정서에 적힌 용도는 ‘캠퍼스 건설 및 연구지원기금’으로 넓었고, 용도를 적어 두었다고 해서 받는 쪽이 꼭 그대로 해야 할 의무를 지는 기부(법률 용어로 ‘부담부증여’)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이유였다. 2012년 대법원까지 결론은 같았다. 기부자는 마음을 냈고, 법원은 약정서를 읽었다.
기부자의 신뢰를 법이 지켜 주는 범위는 생각보다 좁다. 받는 쪽이 지켜야 할 의무를 분명히 적어 둔 기부라면 이를 어겼을 때 되돌릴 길이 있지만, 마음은 문서가 아니고 깨진 믿음을 돈으로 되찾는 길은 멀다. 그래서 기부자에게 필요한 것은 사후의 소송이 아니라 사전의 선택이다. 어디에 무엇을 어떤 조건으로 줄지 믿고 고를 수 있어야 한다. 그 선택을 돕는 것이 공시이고, 그 선택을 존중하는 것이 세제여야 한다.
◇ 세금이 믿지 못한 기부
같은 2003년, 한 창업자가 자신이 세운 회사 주식 90%, 180억 원어치를 장학재단에 내놓았다. 2008년 세무서는 재단에 140억 원의 증여세를 매겼다. 공익법인이 한 회사의 주식을 당시 기준으로 5% 넘게 받으면 초과분에 세금을 물리는 규정 때문이다. 재단이 세금을 내지 못하자 기부자에게 대신 내라는 고지서가 갔고, 그의 이름은 고액 체납자 명단에 올랐다. 착한 일에도 요령이 필요한 나라라는 말이 나올 만했다. 2017년 대법원이 이를 바로잡았다. 악용을 막기 위한 예외적 장치는 그 폐해를 막는 데 필요한 범위 안에서만 써야 하고, 주식 기부 자체를 세금 회피와 회사 지배의 수단이라고 함부로 낙인찍거나 추정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소송이 시작된 지 여덟 해 만이었고, 기부자는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통제가 목적을 넘어서면 걸러내려던 사람이 아닌 선의의 기부자가 다친다. 물론 세무서가 의심하는 데도 이유는 있다. 재단이 경영권 승계의 우회로로 쓰인 일이 실제로 있었다. 다만 의심은 걸러야 할 곳을 겨누어야지, 문 앞에서 오는 사람을 모두 막아서는 안 된다.
◇ 판결로 열린 문, 시행령으로 닫혔다
세무서와 다툰 사건이 하나 더 있는데, 결말이 다르다. 한 종교단체가 해외에 세운 교회로 보낸 돈에 대해 세무서가 증여세를 매겼다. 공익사업을 하는 단체에 준 재산에는 증여세를 물리지 않는 것이 원칙인데, 해외 단체는 여기에 들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2025년 5월 대법원은 그 사업이 외국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정만으로 공익과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다며 세무서의 상고를 기각했다. 이듬해인 2026년 2월 정부는 시행령을 고쳐 종교 분야의 공익법인을 국내 거주자와 국내 비영리법인이 운영하는 것으로 한정했다. 판결로 열린 문을 시행령이 도로 닫은 셈이다.
해외 단체는 관리·감독이 어렵고 우회 증여의 통로가 될 수 있다는 걱정이 깔려 있을 것이다. 틀린 걱정은 아니다. 그러나 답이 꼭 ‘전부 제외’여야 했을까. 송금 내역을 공시하게 하거나 일정 요건을 갖춘 단체로 한정하는 안전장치로도 걱정은 덜 수 있다. 모으고 내는 것은 자유가 원칙이고 통제는 예외다. 1998년 헌법재판소가 모금을 원칙적으로 금지하던 법을 위헌이라고 했을 때 이미 정해진 순서다.
◇ 믿는 만큼 열고, 준 만큼 지키자
이 순서로 지금 논의되는 것들을 보자. 주식 기부의 한도는 장학재단 사건 뒤 손질돼, 지금은 일반 공익법인 10%, 주주총회에서 표를 행사하지 않는 자선·장학·사회복지 목적 법인 20%, 대기업집단과 얽힌 공익법인 5%다. 국회에 나와 있는 개정안은 표를 전혀 행사하지 않고 매년 재산의 일부를 다른 공익법인에 나누는 조건을 갖추면 30%까지 열어 주자고 한다. 정부는 여전히 대기업의 우회 지배를 어떻게 막을 것인지부터 묻는다. 그러나 재단이 계열사 주식으로 표를 던지는 일은 공정거래법이 이미 제한하고 어기면 처벌한다. 입구에서 지분율로 막을 일이 아니라, 들어온 뒤 표와 지출을 살필 일이다.
가상자산 기부는 2025년에 문이 열렸다. 설립 5년 이상, 외부 회계감사, 내부통제기준 같은 요건을 갖춘 비영리법인만 받을 수 있고, 받으면 바로 팔아 공익사업 전용 계좌에 넣어야 한다. 받자마자 팔아야 하니 공익법인이 시세 그래프를 들여다볼 일은 없다. 자산의 종류가 아니라 받는 쪽의 신뢰와 절차로 푼 것이다. 미술품 기부에서도 값을 부풀릴 수 있다는 걱정은 기부를 막을 이유가 아니라 평가 절차를 갖출 이유이니, 상속세를 미술품으로 낼 때 쓰는 전문 감정과 심의 절차를 빌려 오면 된다. 재능기부는 재난 복구 봉사 같은 예외를 제외하면 세법상 기부로 인정받지 못한다. 대가를 소득으로 받은 적이 없는데 공제까지 해 주면 이중 혜택이라는 반론 때문인데, 세무학 교수의 한 시간을 변호사의 한 시간과 같은 값으로 쳐 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다만 시장 가격이 분명한 전문 재능은 받는 단체가 확인하고 정해진 단가로 값을 매기는 방식을 논의해 볼 때가 됐다.
세제가 먼저 믿음을 보이면 기부가 달라진다. 고향사랑기부제처럼 세제와 답례품으로 길을 내자 없던 기부가 생겼고, 미국에서는 주식과 가상자산을 팔지 않고 그대로 기부하는 방식이 빠르게 확산했다. 새 길을 열 때 걱정이 남으면 시범 기간을 두고 공시와 사후관리를 붙이면서 넓혀 가고, 문제가 생기면 그때 조이면 된다. 순서가 문제다. 지금은 먼저 조여 놓고 믿을 이유를 대라고 한다.
기부자에게 드리고 싶은 말은 하나다. 뜻은 마음이 아니라 약정서에 남기고, 믿을 만한 곳을 고르는 눈을 기르자. 정부에 드리고 싶은 말도 하나다. 공익법인과 기부자를 잠재적 탈세자로 보는 눈부터 거두자. 신뢰는 통제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세법이 할 일은 기부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믿고 기부할 수 있는 판을 깔아 주는 것이다. 소송은 늘 신뢰가 깨진 뒤에 온다. 세법은 그보다 앞에 서 있어야 한다.
박훈 서울시립대학교 세무학과 교수
필자 소개
서울시립대학교 세무학과 교수로, 상속세제와 기부세제 분야를 연구하는 세법학자입니다. 서울대학교 법대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세법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일본 도쿄대학교와 미국 UC 버클리에서 연구 활동을 했습니다. 한국세법학회 회장 등 학계 주요 학회를 이끌며 조세제도 연구와 납세자 권익 보호에 힘써 왔습니다. 국세청 납세자보호관(개방직 국장)과 조세심판원 비상임심판관 등을 지내며 정책 현장에서도 활동했습니다. 이러한 공로로 납세자의 날에 2023년 홍조근정훈장을 수훈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