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탈탄소·중국 공급망 의존 낮추겠다” 법안 공개

4일 ‘산업 가속화 법안(IAA)’ 제안…EU 생산 비율·저탄소 소재 기준 담아
저탄소 철강 공급 부족·공급망 재편 부담 등 산업계 우려

유럽연합(EU)이 지난 4일(현지시간) 역내 제조업의 탈탄소 전환을 촉진하고 공급망 자립도를 높이기 위한 ‘산업 가속화 법안(Industrial Accelerator Act·IAA)’을 제안했다. 탈탄소 정책과 산업 경쟁력 강화를 동시에 추진하려는 시도다. 다만 저탄소 철강 등 핵심 저탄소 소재의 공급이 제한적인 상황이어서 정책 목표와 산업 현실 사이의 간극이 드러난다는 지적도 나온다.

스테판 세주르네 유럽집행위원회 수석 부집행위원장이 4일(현지시간) 벨기에 브뤼셀에서 EU가 중국 공급망 의존을 줄이고 탈탄소 전환을 추진하기 위해 제안한 ‘산업 가속화 법안(IAA)’을 설명하고 있다. /European Commission

◇ 철강·알루미늄 저탄소 기준…전기차 부품 EU 생산 70%

EU 집행위원회가 발표한 이번 법안은 공공조달과 공공 지원 과정에서 친환경 기준과 ‘유럽산(Made in EU)’ 비율을 일정 수준 이상 충족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회원국 정부가 공공조달을 통해 철강을 구매할 경우 전체 물량의 최소 25%를 ‘저탄소 철강(low-carbon steel)’으로 채워야 한다.

알루미늄은 공공조달 물량의 25%를 EU에서 생산되고 저탄소 기준을 충족하는 제품으로 조달하도록 했다. 전기차의 경우 공공조달 또는 공공 지원을 받을 때 배터리를 제외한 부품 원가의 70%를 EU 역내에서 생산해야 한다.

또 특정 산업에서 글로벌 생산의 40% 이상을 차지하는 국가의 기업이 1억 유로(한화 약 1700억 원) 이상 투자할 경우, 외국인 지분을 49%로 제한한다. 직원의 절반 이상을 EU 근로자로 채용하도록 하는 조건도 포함됐다. EU는 이러한 정책을 통해 2035년까지 역내 제조업 비중을 현재 14%에서 20%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 “저탄소 철강, 상용화 더디고 기준도 모호하다”

문제는 탈탄소 정책을 뒷받침할 저탄소 소재 공급망이 아직 충분히 구축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자동차 산업은 2035년 탄소 감축 목표를 맞추기 위해 철강 수요의 일부를 저탄소 철강으로 전환해야 한다. 수소환원제철 방식의 철강 생산은 막대한 투자 비용과 그린 수소 공급 부족으로 상용화 속도가 더딘 상황이다.

현재 계획된 글로벌 저탄소 철강 생산 능력은 2050년까지 약 2800만 톤 수준으로 예상되지만, 실제로 건설이 진행 중인 프로젝트는 이 중 약 3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생산이 본격화하더라도 기존 철강보다 30%가량 비쌀 것으로 전망된다.

EU의 ‘산업 가속화 법안’은 공공조달 철강의 일정 비율을 저탄소 철강으로 전환하도록 하고 있지만, 업계에서는 공급 부족과 비용 부담 등 현실적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Unsplash

유럽 내 여러 저탄소 철강 프로젝트도 비용 문제로 지연되거나 재검토되고 있다. 스웨덴 상용차 업체 스카니아(Scania)의 크리스티안 레빈 대표는 “저탄소 철강에 대한 수요는 존재하지만 아직 상업적으로 충분히 구매할 수 있는 물량이 없는 상황”이라고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철강 산업에서는 ‘저탄소 철강’에 대한 통일된 정의가 아직 명확히 확립되지 않았다. 기업마다 서로 다른 기준과 용어를 사용하면서 시장의 기준이 불명확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이에 일부 저탄소 철강 생산 기업들은 제품의 환경 성과를 객관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탄소 배출량 라벨링(emissions label)’ 제도 도입을 요구해 왔다.

그러나 EU는 기업의 행정 부담 증가 가능성을 이유로 최종 초안에서 해당 제도를 제외했다. 대신 EU는 별도의 ‘제품 지속가능성 기준’ 관련 법안을 통해 저탄소 소재 수요를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유럽철강협회(Eurofer) 등 업계에서는 명확한 분류 기준이 지연될 경우 투자 불확실성이 커질 수 있다고 보고 있다.

◇ EU 산업 보호 목표지만 공급망 리스크 부담

EU는 이번 법안을 통해 탈탄소 전환과 동시에 중국 중심으로 형성된 글로벌 친환경 산업 공급망 의존도를 낮추려는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전기차 역내 생산 요건 역시 글로벌 공급망 구조와 맞물린 과제로 꼽힌다.

EU의 ‘산업 가속화 법안’은 역내 생산 요건 강화로 공급망 재편 부담을 키워 전기차 전환 속도를 오히려 늦출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Unsplash

EU는 역내 산업 보호를 강화하면서도 일부 국가에 대해서는 ‘신뢰 파트너(trusted partners)’ 지위를 부여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영국·캐나다·미국 등 세계무역기구(WTO) 정부조달협정(GPA) 참여국이 주요 대상이다.

다만 자동차 업계에서는 수십 년간 글로벌로 얽혀 있는 공급망을 단기간에 유럽 중심으로 재편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글로벌 투자은행 제프리스(Jefferies)는 값싼 해외 부품 대신 상대적으로 비싼 유럽산 부품 사용을 요구할 경우 생산 비용이 상승하고 경쟁력이 약화될 수 있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EU의 탄소 감축 목표 달성에도 부담이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완성차 업계도 촘촘히 얽힌 기존 공급망의 단절을 우려하고 있다. 짐 바움빅 포드(Ford) 유럽법인 사장은 IAA 논의가 한창이던 2월 초 로이터에 핵심 부품 공급처인 영국과 튀르키예 등을 언급하며 “이들을 배제하면 오히려 EU 역내 생산 역량 자체가 약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힐데가르트 뮐러 독일 자동차산업협회(VDA) 회장은 “이는 우리 산업이 또다시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외부 상황에 의존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비판했다. VDA는 또한 보호무역주의로 인식될 수 있는 역내 생산 규정이 다른 무역국의 반발을 초래할 위험도 있다고 경고했다.

한편 이번 법안은 앞으로 유럽의회와 회원국 간 협상을 거쳐 최종 확정될 예정으로, 세부 내용은 향후 수정될 가능성이 있다.

채예빈 더나은미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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