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주말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았다. 한국사를 전공한 내가 이곳을 찾은 횟수는 60~70번을 넘는다. 그런데도 매번 새롭다. 그날은 마침 유홍준 국립중앙박물관장이 박물관 앞 마당에 나와 있었고, 시민들이 줄지어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박물관장을 알아보고 사진을 찍고 싶어 하는 장면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펼쳐지는 것은 처음 봤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연 600만 관람객 시대를 열며 방문객 기준 세계 TOP4 박물관 반열에 올랐다. 인공지능(AI)이 인간의 지식을 능가하고 생성형 AI가 창작까지 하는 시대에, 우리는 왜 지나간 역사에 열광하는가.
◇ 과거, 우리의 오래된 미래
역사를 보면 과거와 현재가 언제나 비가역적인 발전 경로를 밟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과거의 기술과 아이디어가 오늘의 우리에게도 경이로움을 주는 순간이 있다.
‘에밀레종’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성덕대왕신종이 그렇다. 거대한 종을 단 한 번에 주조하며 특정 두께와 음향을 구현한 771년의 기술은 오늘날에도 완전한 복원이 쉽지 않다. 쇳물을 한 번에 부어 굳히는 과정에서 균열을 막고, 공명 구조까지 계산해 낸 기술은 지금의 관점에서도 ‘넘사벽’에 가깝다. 우리는 종종 역사를 불완전한 과거로 보지만, 실은 그 안에도 오늘날의 우리가 배워야 하는 정교한 지혜가 가득하다.
설 연휴, 가족과 함께 공주와 부여를 다녀왔다. 백제 문화권을 여행하며 이 생각은 더 또렷해졌다. 당시 백제인이 지역에 투자한다면 그것은 어떤 모습일까. 상상은 백제를 넘어 고구려와 신라로 확장되었고, 각각 백제벤처스·신라벤처스·고구려벤처스라는 가상의 투자회사로 이어졌다. 이들이 지금까지도 존재한다면, 그 오래된 미래는 오늘날 우리에게 지역투자에 대해 무엇을 말해줄 수 있을까?
◇ 백제벤처스, 섬이 아니라 항구로 보는 관점
만약 당시 백제인이 벤처투자를 한다면 어떤 기준을 세울까. 백제는 바다를 건넜다. 교역했고, 연결했고, 문화를 수출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백제벤처스’는 아마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우리는 지역을 섬이 아니라 항구로 본다.”
지역투자는 종종 열악한 스타트업에 대한 ‘지원’의 언어로 설명된다. 그러나 백제적 상상력은 지원이 아니라 흐름을 본다. 자본이 머무는 곳이 아니라, 외부의 자본과 사람이 유입되고, 순환하고, 확장되는 구조를 제시한다. 로컬의 서사와 매력은 ‘비슷한 것들 사이의 차별화’가 아니라, 그 자체로 독점적 자산이 될 수 있다. 로컬의 정체성이 글로벌 경쟁력으로 전환될 수 있다면, 지역의 생산(local production)은 곧 브랜딩(branding)이 되고, 그 브랜드는 지역의 좁은 시장을 넘어 글로벌로 유통(global distribution)되는 항로를 만든다.
백제벤처스는 로컬의 제품과 서비스가 문화와 서사의 구체적인 접점이 되어, 외부 시장에서 더 큰 주목을 받게 될 미래로 우리를 인도한다. 지역을 ‘내부 소비’의 공간이 아니라 ‘외부 연결’의 거점으로 다시 보게 만든다.
◇ 신라벤처스, 반짝이는 것보다 스스로 빛나는 것을 찾는 관점
신라는 제도와 질서를 만들고, 운영체계를 남긴 국가였다. 오랜 세월에 걸쳐 유지된 행정 체계와 문화 시스템은 단순한 통치 수단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운영 모델이었다. 만약 ‘신라벤처스’가 있다면,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우리는 프로젝트가 아니라 시스템에 투자한다.”
지역에서 반복되는 실패 중 하나는 이벤트성 성공이다. 팝업이 하나 열리고 큰 인기를 얻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 시도에서는 처음의 뜨거운 반응이 재현되지 못한다. 단년도 예산으로 끝나는 파일럿 사업, 복제되지 않는 우수 사례들의 유혹도 크다. 그래서 신라적 지역투자 철학은 묻는다. 첫 성공이 아니라 두 번째 성공이 가능한가. 이 모델은 다른 도시와 지역으로 확장 가능한가. 제도 안에 안착할 수 있는가. 10년 뒤에도 스스로 작동하는가.
여기서 말하는 시스템은 막연한 개념이 아니다. 운영 매뉴얼, 성과 지표, 조달·계약 방식, 데이터 구조 같은 구체적인 자산이다. 그것이 쌓일 때, 성공은 개인의 역량이 아니라 조직과 지역의 자산이 된다. 보조금이 없어도 돌아가고, 담당 공무원이 바뀌어도 유지되는 구조가 가능해진다.
신라벤처스는 케어테크, 에듀테크, 인구테크, 거브테크 같은 영역에서, 지역 스타트업이 ‘감동적인 현상’에 머물지 않고 표준과 데이터로 운영체계를 남기도록 독려한다. 지역투자란 결국 성장 잠재력만이 아니라 운영 가능성에 베팅하는 일이기도 하다.
◇ 고구려벤처스, 낭만이 아니라 생존을 보는 관점
고구려를 떠올리면 질문의 결이 달라진다. 그곳은 늘 경계에 서 있던 나라였다. 혹독한 자연환경, 잦은 충돌 속에서 생존을 고민해야 했다. 인구감소, 산업전환, 기후 리스크 속에서 지역은 어떻게 살아남는가. 지역투자는 무엇을 봐야 하는가. ‘고구려벤처스’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는 지역을 낭만으로 보지 않는다.”
벤처는 혼자 성공하지 못한다. 산업의 바닥이 있어야 한다. 인프라, 인력, 에너지, 물류 같은 기반이 흔들리면 어떤 벤처 모델도 오래 버티기 어렵다. 그래서 고구려적 시선은 ‘이 지역의 산업 체력’을 먼저 본다. 자동화와 에너지 전환, 인프라 혁신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바뀐 일자리 구조 속에서 외국인 근로자 수용과 정착을 포함한 인력 재편이 필요한 이유도 같다.
지역의 많은 담론이 문화와 관광, 브랜딩에 집중할 때, 고구려벤처스는 다른 질문을 던진다. ‘낭만적인 스토리가 아니라, 산업이 성장할 수 있는 냉정한 효율과 인프라가 준비되었는가?’ 고구려벤처스는 소재·부품·장비뿐 아니라 물류·유통·모빌리티, 농어업·해양수산 등 지역 산업의 수명을 연장하고 다음 세대의 일자리를 유지가 아니라 재설계로 이끄는 미래로 우리를 데려간다. 지역의 생존력은 ‘좋은 이야기’가 아니라 ‘작동하는 구조’에서 나온다.
◇ 오래된 미래, 겹겹이 쌓인 자산
지역투자가 ‘넥스트 빅 씽’(Next Big Thing)이라는 말이 번질수록, 우리는 더 신중해져야 한다. AI 시대에 우리가 역사에 끌리는 이유는 어쩌면 미래가 너무 빠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빠른 시대일수록 우리는 더 오래된 기준이 필요하다. 지역에 이미 겹겹이 쌓여 있는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는 오래된 미래를 마주한다.
백제의 관점은 우리에게 흐름을 가르친다. 외부의 사람과 자본이 들어오고, 지역의 제품과 이야기가 밖으로 확장되는 항로를 설계하라고 말한다. 신라의 관점은 구조를 가르친다. 한 번의 성공을 ‘반짝임’으로 소비하지 말고, 표준과 데이터, 제도와 운영체계로 남기라고 말한다. 고구려의 관점은 생존력을 가르친다. 낭만을 넘어 산업의 체력을 키우고, 생산성과 효율, 인프라를 통해 다음 세대의 일자리를 재설계하라고 말한다.
결국 지역투자는 얼마나 많은 지원이 필요한가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역사가 준비해 왔던 질문들을 현재의 관점에서 어떻게 ‘번역’하는지에 달려 있다. 이 오래된 미래를 오늘의 투자 언어로 번역하는 일이 지역투자의 다음 10년을 결정할 것이다.
김정태 엠와이소셜컴퍼니 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