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안서도, 운영비 규정도 없다…뮬라고 재단, 임팩트만 따진다

10대 기업가 재단이 바꾼 세상의 지도 <4> 뮬라고 재단
현장을 직접 찾고, 간접비가 아닌 ‘실질 변화’로 책임을 묻는 재단
지원 방식부터 평가 기준까지, 자선의 오래된 관성을 뒤집다

기부 현장에서 가장 민감한 숫자 가운데 하나가 ‘운영비 비율’이다. 기부자(펀더·funder)는 간접비를 낮추라고 압박하고, 비영리 단체는 인건비와 조직 운영에 숨통을 틔워 달라고 요구한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둔 ‘뮬라고 재단’은 이 익숙한 줄다리기를 애초에 건너뛰는 길을 택했다. 

“운영비 상한은 없다”, “인건비를 얼마로 가져갈지는 조직이 스스로 정할 일”이라고 못 박고, 제안서와 보고서 대신 재단 사람을 현장에 먼저 보낸다. 직원들이 탐사 기자처럼 지구 곳곳을 돌며 “정말로 세상을 바꾸고 있는 팀”을 찾아내는 데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다. 이 재단이 스스로를 설명할 때 쓰는 말은 간단하다.

“우리는 이윤 대신 임팩트를 수익으로 계산하는 자선 벤처 펀드입니다.”

◇ 의사와 은행가 형제가 만든 ‘사회적 R&D 자본’

뮬라고 재단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기반을 둔 사적 재단(private foundation)이다. 이 재단의 뿌리는 우간다 수도 캄팔라의 ‘뮬라고 병원(Mulago Hospital)’에서 시작된 한 의사의 문제의식이다. 1980년대부터 이 병원에서 근무했던 소아과 의사 라이너 아른홀트(Rainer Arnhold)는 극심한 빈곤과 질병의 현장을 목격하며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솔루션”에 평생을 걸었다. 그가 요절한 뒤, 형이자 투자은행가였던 헨리 아른홀트(Henry Arnhold)가 유산을 토대로 1990년대 초 재단을 세웠다. 의료 현장의 문제의식과 금융·투자업계의 분석력이 한 재단 안에서 만난 셈이다. 

현재 뮬라고 재단의 보유 자산은 약 3억7000만달러(약 5400억원) 안팎, 매년 2000만~2500만달러(약 290억~360억원)를 ‘빈곤’과 ‘기후·보전(Conservation)’ 분야에 집중 지원하는 비교적 ‘날렵한’ 규모의 재단으로 평가된다. 거대 재단처럼 수십억달러를 쓰지는 않지만, 초기에 위험을 감수하며 모델을 설계하고 키워내는 ‘사회적 R&D 자본’ 역할에 초점을 맞춘다.

재단 운영은 의사 출신 케빈 스타(Kevin Starr)가 이끌고 있다. 캘리포니아대 샌프란시스코캠퍼스(UCSF)에서 응급의학·공중보건을 공부한 그는 “우리가 하는 일은, 행동을 바꾸기 위해 모은 돈의 집합체(a bunch of money trying to change behavior)”라고 말한다. 뮬라고는 자선 자본을 ‘좋은 일에 쓰는 돈’이 아니라, “사람들의 행동을 바꿔 실제 결과를 만들어내는 데 투입하는 위험 자본”으로 정의한다. 간접비 비율 같은 전통적 효율성 지표에 매달리기보다, “1달러를 썼을 때 삶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따지는 비용 대비 효과에 집착하는 이유다.

뮬라고가 뒤집은 첫 번째 관성은 ‘지원 신청’ 방식이다. 이 재단은 지금도 공개 공모를 받지 않는다. 홈페이지에 “제안서는 받지 않는다(No Proposals)”고 못 박아 둔다. 지원서를 기다리기보다, 신뢰하는 파트너의 추천과 자체 리서치를 통해 후보 조직을 찾는다. 이렇게 발굴한 창업가 가운데 “빈곤이나 기후 문제에 대한 확장 가능한 해법과, 그것을 끝까지 밀어붙일 실행력을 갖춘 리더”를 골라 1년짜리 펠로우십에 초청한다.

펠로우십은 두 개 트랙으로 나뉜다. 빈곤·보건·교육 등 인간의 기본적 필요를 다루는 ‘라이너 아른홀트 펠로(Rainer Arnhold Fellows)’와, 기후·자연 보전을 다루는 ‘헨리 아른홀트 펠로(Henry Arnhold Fellows)’다. 두 형제의 유산은 이렇게 “가난과 기후 위기를 함께 다루는 자선 실험”으로 구체화됐다. 매년 두 트랙을 합쳐 약 20명이 선발된다.

뮬라고 재단의 펠로우십은 빈곤·보건·교육 등 인간의 기본적 필요를 다루는 ‘라이너 아른홀트 펠로(Rainer Arnhold Fellows)’와, 기후·자연 보전을 다루는 ‘헨리 아른홀트 펠로(Henry Arnhold Fellows)’ 두 가지다. 비영리·영리를 구분하지 않으며 매년 두 트랙을 합쳐 약 20명이 선발된다. /뮬라고 재단 홈페이지

선발된 펠로우에게는 10만 달러의 비지정(unrestricted) 자금이 지급된다. 프로그램 운영비로 쓰든, 인건비로 쓰든, 실험적인 파일럿에 투입하든 전적으로 창업자의 판단에 맡긴다. 뮬라고는 “돈을 어디에 어떻게 쓸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은 현장의 리더”라는 입장을 고수한다. 대신 돈보다 더 강도 높은 요구를 내건다. 펠로우들은 1년 동안 두 차례, 1주일씩 진행되는 ‘디자인 리트릿(Design Retreat)’에 참여해 자신의 사업 모델을 처음부터 다시 뜯어고친다. 이 과정에서 많은 창업가들이 기존 모델을 부분적으로 폐기하거나, 임팩트 목표를 완전히 다시 쓰게 된다.

펠로우십은 겉으로는 ‘교육 과정’일 뿐, 실제로는 1년에 걸친 정밀 실사(due diligence)에 가깝다. 뮬라고는 1년 동안 사람과 모델, 숫자를 들여다본 뒤에야 정식 포트폴리오 편입 여부를 결정한다. 재단 설명에 따르면 펠로우십을 거친 조직의 약 60~70%가 뮬라고의 장기 포트폴리오로 편입된다. 이후에는 5~10년 이상 반복 투자와 전략 자문이 이어진다. 펠로우십이 뮬라고 자금으로 들어가는 사실상 유일한 관문인 셈이다.

◇ 8단어 미션과 반사실적 근거…숫자로 설계하는 변화

뮬라고 철학의 중심에는 ‘설계된 임팩트’라는 개념이 있다. 이 재단이 포트폴리오 조직에 가장 먼저 요구하는 것은 8단어 미션 스테이트먼트(8-word mission statement)다. ‘무엇을, 누구에게, 어떤 결과까지 책임질 것인지’를 8단어 안에 적어보라는 요구다.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든다” 같은 모호한 문장은 허용하지 않는다. “시골 소농의 연간 소득을 2배로 늘린다”, “오지 지역 아동의 말라리아를 예방한다”처럼 대상과 행동, 결과가 분명하게 드러나야 미션으로 인정한다. 그래야만 어떤 변화를 측정할지, 무엇을 두고 성공과 실패를 말할지 기준이 선다.

두 번째 질문은 “어떤 실질적 변화(material change)를 만들었는가”다. 뮬라고는 교육 참여 인원, 캠페인 노출 수 같은 ‘활동 지표’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대신 모성 사망률 감소, 영유아 생존율 개선, 소득 증가, 학습 성취도 향상처럼 삶의 상태가 실제로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보여주는 결과 지표를 요구한다. 이때 핵심 원칙 하나를 반복해서 강조한다. “자신이 무엇을 이뤘는지 측정하지 않는 조직에는 돈을 대지 않는다.”

여기에 한 가지 조건이 더 붙는다. “당신이 하지 않았어도 일어났을 변화”와 “당신 때문에 추가로 일어난 변화”를 구분해 보라는 요구다. 정부 정책 변화나 다른 단체의 개입, 자연적인 경제 성장으로도 일어났을 변화를 빼고, 자신 때문에 추가로 발생한 임팩트를 계산하라는 것이다. 뮬라고는 이를 ‘반사실적 근거(counterfactual)’라고 부르며, 임팩트 측정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포트폴리오 조직 입장에서는 번거롭고 불편한 요구지만, 뮬라고는 “숫자를 믿을 수 있을 때만, 정말로 좋은 모델을 더 크게 키울 수 있다”고 주장한다.

뮬라고는 조직의 덩치를 키우는 선형 성장보다, 여러 행위자가 복제·채택해 문제의 크기에 맞게 확산될 수 있는 ‘지수적 임팩트’를 중시한다. 이 해법이 문제의 크기에 비해 충분히 큰가(Big enough), 다른 곳에서도 따라 하기 단순한가(Simple enough), 최종 비용 지불자가 감당할 만큼 싸게 만들 수 있는가(Cheap enough)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뮬라고 재단

규모를 보는 눈도 일반적인 자선과 다르다. 뮬라고는 조직의 덩치를 키우는 선형 성장보다, 여러 행위자가 복제·채택해 문제의 크기에 맞게 확산될 수 있는 ‘지수적 임팩트(exponential impact)’를 중시한다. 그래서 네 가지를 먼저 묻는다. 이 해법이 문제의 크기에 비해 충분히 큰가(Big enough), 다른 곳에서도 따라 하기 단순한가(Simple enough), 최종 비용 지불자가 감당할 만큼 싸게 만들 수 있는가(Cheap enough). 여기에 더해 “이 모델을 대규모로 실행할 주체가 누구인지(Doer at scale), 그 비용을 오래 지불해 줄 주체가 누구인지(Payer at scale)”까지 함께 상정한다.

◇ 라스트 마일 헬스가 보여준 ‘스케일의 조건’

뮬라고 포트폴리오 가운데 이 철학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라스트 마일 헬스(Last Mile Health)’다. 2007년 라이베리아 동부의 외딴 코노보(Konobo) 지역에서 출발한 이 단체는 “오지에서 사람들의 생명을 구한다”는 한 줄 미션을 내걸고, 정규직 커뮤니티 헬스 워커(Community Health Worker)를 키우는 모델을 만들었다. 기존에는 농촌·오지 마을의 보건 일을 무급 자원봉사자에게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라스트 마일 헬스는 해당 지역 출신 주민을 정식 보건 인력으로 채용하고, 급여와 교육, 감독 체계를 갖춘 국가 커뮤니티 보건 시스템을 설계하는 데 집중했다.

라이베리아에서 시작된 비영리단체 ‘라스트 마일 헬스’는 지역 주민을 정규 보건 인력으로 고용해 교육·감독 체계를 갖춘 커뮤니티 보건 시스템을 구축했고, 2023년 9월 기준 1만3015명의 보건 인력이 현장에서 활동 중이다. /라스트 마일 헬스

이 모델은 지금 라이베리아를 넘어 시에라리온·에티오피아 등으로 확장되고 있다. 각국 정부와 협력해 커뮤니티 보건 인력을 대규모로 양성·지원하면서, 2023년 9월 기준으로 1만3015명의 보건 인력이 이 네트워크 안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들을 통해 기본 보건 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게 된 주민은 1410만명을 넘어섰고, 라이베리아에서는 2016년 이후 커뮤니티 헬스 워커들이 아동에게 제공한 치료 건수만 110만건이 넘는다. 에티오피아에서는 보건 당국이 4만명 이상의 커뮤니티 헬스 워커 교육에 라스트 마일 헬스와 함께 개발한 온라인·오프라인 혼합 교육 방식을 채택해, 교육 효과를 높이면서도 반복 교육 비용을 줄이는 성과를 내고 있다.

뮬라고가 이 조직에 일찍부터 ‘장기 베팅’을 한 이유는 명확하다. 의약품 공급·교육·모니터링 과정이 비교적 단순하고 매뉴얼화돼 있는 데다, 커뮤니티 헬스 워커 1인당 커버하는 인구 수나, 영유아 생존율·말라리아 치료 접근성처럼 결과 지표도 분명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라이베리아 정부 예산 구조 안에서 감당 가능한 수준까지 단위 비용을 낮출 수 있다는 점이 중요했다. 뮬라고와 다른 펀더들의 초기 투자를 기반으로 라스트 마일 헬스 모델이 검증되자, 이후에는 글로벌 펀드·세계은행(World Bank) 등 ‘큰 자금’이 들어와 전국 단위 확장을 뒷받침했다. 뮬라고 입장에서는 “작은 돈으로 판을 설계하고, 큰 돈이 들어올 수 있는 길을 닦은” 셈이다.

케빈 스타가 자주 인용되는 글 제목 하나는 뮬라고의 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기부자들이여, 제발 당신들 일을 제대로 하라!” 그는 이 글에서 “돈을 뿌리고 잊어버리는 게 자선이 아니다”라고 못 박는다. 기부자가 진짜 책임져야 할 대상은 보고서나 이사회가 아니라, 혜택을 받아야 할 사람들, 즉 최종 수혜자라는 것이다. 상업 투자가 재무적 수익에 대해 책임을 지듯, 필란트로피 자본도 임팩트라는 ‘수익’에 대해 같은 수준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간접비 비율을 따지는 관행에 대해서도 그는 ‘오버헤드 미신(overhead myth)’이라고 일갈한다. 중요한 것은 인건비·운영비 비율이 아니라, 1달러당 얼마나 많은 생명을 구하고, 얼마나 큰 소득 증가와 학습 성취를 만들어내는지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뮬라고는 포트폴리오 조직에 비지정 자금과 장기 자금을 과감히 제공하면서도, 그 대가로 매우 구체적인 임팩트 데이터와 학습·수정 계획을 요구한다. “돈을 풀되, 그 돈이 진짜로 삶을 바꾸는지에 대해서는 끝까지 따져 묻겠다”는 태도다.

뮬라고 재단이 반복해서 내세우는 자기소개는 한 줄에 가깝다. “우리 일은,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바꿀 수 있는 좋은 아이디어와 좋은 조직을 찾아 기꺼이 베팅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재단은 제안서 대신 현장을 택했고, 운영비 규정 대신 신뢰를 선택했다. 그리고 측정과 책임의 기준을 남에게만 요구하는 대신, 자신들의 베팅이 옳았는지 스스로 평가하는 쪽을 택했다. 자선 자본이 어디까지, 어떤 방식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지에 대해 뮬라고가 던지는 질문은,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기부자와 재단들에게도 결코 가볍지 않은 숙제로 돌아온다.

김경하 더나은미래 기자

관련 기사

Copyrights ⓒ 더나은미래 & futurechosun.com

전체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