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나은미래 x 아름다운재단 공동기획]
보이지 않는 아이들, 사라지지 않는 권리<1> 미등록 이주아동은 누구인가
모든 아동은 차별 없이 보호받아야 합니다. 출신과 국적에 관계없이 교육을 받고, 의료서비스를 누리며, 안전한 환경에서 성장할 권리가 있습니다. 이것이 ‘UN아동권리협약(UNCRC)’이 보장하는 아동의 보편적 권리입니다. 한국은 1991년 이 협약을 비준하며, 아동의 권리를 보호할 국제적 책임을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는 이 권리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법과 제도의 사각지대에서 살아가는 ‘미등록 이주아동’이 그들입니다. 더나은미래와 아름다운재단은 ‘보이지 않는 아이들, 사라지지 않는 권리’ 탐사 보도 시리즈를 통해 이들의 현실을 조명합니다. 단순한 동정을 넘어, 구조적 문제를 짚고 실질적인 해결책을 모색합니다. /편집자 주 |
한국에서 태어나고, 한국어를 쓰고, 한국에서 성장했지만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아이들이 있다. 출생신고도, 주민등록번호도 없다. 병원에 가는 것도, 학교에 다니는 것도 쉽지 않다. 이들은 법과 제도의 사각지대에서 ‘유령’처럼 살아간다. 출생과 동시에 국적도, 신분도 없이 살아가야 하는 이 아이들은 어떤 과정을 거쳐 ‘미등록 이주아동’이 되는 것일까.
◇ ‘존재하지 않는 아이’가 되는 3가지 유형
가장 흔한 경우는 출생 등록이 누락되는 것이다. 한국 법은 체류 자격이 없는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동의 출생 등록을 허용하지 않는다. 미등록 이주아동이 법적 신분을 얻으려면 부모의 본국으로 돌아가 출생 등록을 마친 후, 행정 및 법적 절차를 거쳐 국적을 회복한 뒤 다시 한국에 입국해 외국인 등록을 해야 한다. 하지만 이 과정은 DNA 검사, 체류 기록 조사, 법원 판결 등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하며, 시간과 비용이 막대하게 소요된다.
더 큰 문제는 부모가 체류 자격을 상실한 상태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본국에서도 출생 등록을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부모가 난민 신청을 한 경우 본국 대사관을 이용할 수 없고, 여권이 만료되면 대사관 방문조차 불가능해진다. 법무법인 덕수의 조영관 변호사는 “본국 정부의 박해를 피해 난민 신청을 한 사람들은 자국 대사관을 방문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경우가 많다”며 “출생 등록이 불가능해지는 구조적 문제가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라이베리아 출신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A씨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그의 부모는 박해를 피해 한국에 이주해 난민 신청을 했다. 몇 년 뒤 한국에서 A씨를 낳았지만, 박해의 위험 때문에 본국 정부를 상대할 수 없었고, 한국에서도 출생 등록이 불가능했다. 심지어 한국에는 라이베리아 대사관이 없어, 출생 등록을 위해서는 일본에 있는 대사관까지 가야 했다. 난민 신분으로 해외 이동이 쉽지 않아 결국 A씨의 부모는 출생 신고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부모를 따라 합법적으로 한국에 입국했지만, 체류 자격을 유지하지 못해 미등록 이주아동이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란 출신 B씨는 2010년 사업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 한국에 왔다. 처음에는 비자를 연장하며 합법적으로 체류했지만, 2016년 난민 신청이 거절되면서 가족 전체가 미등록 상태가 됐다. 난민 신청이 한 번 거부되면 합법적인 체류 자격을 얻을 길은 사실상 막혀버린다.
부모가 브로커를 통해 한국에 입국했다가 사기를 당해 체류권을 잃는 경우도 있다. 몽골 출신 C씨는 러시아에서 유학하고 몽골의 한 제약회사에서 일하다 한국으로 왔다. 브로커를 통해 비자를 발급받았지만, 그것은 허위였다. 정식 체류 자격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지만, 결국 25년 동안 미등록 상태로 살아야 했다. 이 과정에서 그 자녀도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아이’가 됐다.
◇ 통계조차 잡히지 않는 ‘보이지 않는 아이들’
법무부는 2024년 11월 기준 미등록 이주아동이 6296명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출입국 기록에 기반한 숫자일 뿐이다. 이주민 단체들은 실제 미등록 이주아동이 최대 2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한다.
숫자가 명확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한국 정부의 공식 통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아이들’이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행정안전부와 법무부의 외국인 관련 통계는 ‘출생 등록이 된 외국인’만을 대상으로 한다. 출생 자체가 등록되지 않은 미등록 이주아동은 그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는다.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아이들에게 국가의 보호망은 없다. 출생 등록이 되지 않았으니 주민등록번호도 없고, 건강보험 가입도 불가능하다. 유치원이나 학교에 다니는 것조차 쉽지 않다. 유엔아동권리협약이 보장하는 기본 권리인 ▲생존권 ▲발달권 ▲보호권 ▲참여권 모두 미등록 이주아동들에게는 그저 남의 이야기일 뿐이다.
미등록 이주아동들은 의료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건강보험 가입이 불가능해 병원비 부담이 크고,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교육도 예외가 아니다.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에 따라 외국인 아동의 입학·전학이 가능하지만, 미등록 아동은 외국인 등록 서류가 없어 입학을 거부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잦은 이사로 거주지가 일정하지 않아 취학 통지서를 받지 못하는 사례도 많다.
2018년 국내 체류 아동 실태조사에 따르면, 미등록 이주아동이 학교에 가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외국인이기 때문(66.7%)’이었다. 한국어 구사 및 학습 능력 부족(38.1%), 출생 등록 및 외국인 등록증 미비(19.4%)도 주요 이유로 꼽혔다. 학교생활 중 괴롭힘 경험률도 46.1%에 달했다.
조영관 변호사는 “출생 기록이 없는 미등록 이주아동들은 수학여행이나 체험 학습을 가는 것도 어렵다”며 “여행자 보험 가입이 필수적인 활동에서조차 배제되면서 위축감을 느끼고, 심할 경우 학교 폭력의 대상이 되어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만들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미등록 이주아동들은 한국에서 태어나고, 한국어를 모국어처럼 사용하며, 한국 사회에서 성장했다. 하지만 법적 지위가 없는 이들은 여전히 ‘유령’ 취급을 받는다.
“부모님의 본국인 몽골에 가긴 두렵습니다. 몽골 말을 모르니까요. 친구도 없고, 문화도 몰라요. 저는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20년을 넘게 살았는데, 언제쯤 ‘한국 사람’일 수 있을까요?” (책 ‘있지만 없는 아이들’ 中)
조유현 더나은미래 기자
※ 법무부는 2021년부터 미등록 이주아동에게 체류 자격을 부여하는 구제 대책을 시행해왔지만, 이 조치는 2025년 3월 31일부로 종료될 예정입니다. 다음 기사에서는 지난 20년의 미등록 이주아동 정책의 변천사를 짚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