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국제보건 리더가 될 것인가. 글로벌 보건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재정적 부담이 커지는 가운데, 한국이 보건 ODA(공적개발원조) 확대를 놓고 중요한 갈림길에 섰다. 글로벌펀드가 2027~2029년 동안 180억 달러(약 26조 원) 규모의 8차 지원금 약정을 추진하는 상황에서, 한국이 단순 기여국을 넘어 국제 보건 협력의 주도국으로 자리할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린다.
정부와 기업, 외교 관계자들은 지난 6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이번 ‘2025 한·글로벌펀드 고위급 라운드테이블’에서 한국의 전략적 방향을 두고 치열한 논의를 벌였다.

글로벌펀드는 HIV, 결핵, 말라리아 퇴치를 위한 세계 최대의 국제보건 조달 기구로, 매년 20억 달러(한화 약 2조 6900억 원) 규모의 의약품과 기자재를 개발도상국에 제공한다. 한국 정부는 2023~2025년 동안 1억 달러(한화 약 1450억 원)를 글로벌펀드에 기여하기로 약속한 상태이며, 이번 회의에서는 향후 기여 확대 여부가 논의됐다.
박종한 외교부 개발협력국장은 “보건 ODA 확대는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리더십을 발휘할 기회”라며 “정부의 재정 기여뿐만 아니라 한국 기업과의 협력 확대가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그는 “한국이 글로벌 보건 ODA를 확대하려면 국민적 공감대와 정치적 의지가 선행돼야 한다”며 대중 인식 개선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현재 한국은 글로벌펀드의 의료 제품 공급국 중 3위이며, 신속 진단키트 부문에서는 최대 공급국이다. 이효근 SD바이오센서 부회장은 “미국 국제보건지원 예산 삭감이 저소득국가에 의료제품을 공급하는 기업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며 “한국 기업이 글로벌 보건시장 내 경쟁력을 유지하려면 국제 보건기구와의 협력 및 지속적인 지원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권기환 외교부 글로벌다자외교조정관은 “2020년부터 4년간 한국 기업이 글로벌펀드를 통해 전 세계에 공급한 필수의료기기와 의약품의 규모가 5억 달러(한화 약 7200억 원)에 달한다”고 설명했다.
◇ 유럽 주요국의 ODA 정책…한국의 선택은?
유럽 주요국들은 각국의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국제보건 지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들은 다자기구를 통한 협력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룩셈부르크는 2009년부터 국민총소득(GNI)의 1%를 공적개발원조(ODA)로 배정하겠다는 약속을 지금까지 지키고 있으며, 이 예산은 국제 기후 금융과 자국 내 난민 수용 비용을 제외한 순수 해외 원조 예산으로 운영되고 있다.
영국은 지난달 국방비 증액과 함께 공적개발원조(ODA) 예산을 GNI(국민총소득) 대비 0.5%에서 0.3%로 축소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개러스 위어 주한 영국 부대사는 “영국은 여전히 2027년까지 연간 90억 파운드(약 17조 7700억 원)를 ODA에 투입하며, 세계 7대 ODA 공여국의 위치를 유지할 것”이라며 “재정 상황이 허락하는 대로 ODA 예산을 다시 GNI의 0.7% 수준으로 확대하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
자크 플리스 주한 룩셈부르크 대사는 “룩셈부르크는 유엔과 유럽연합(EU) 등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설립된 주요 다자기구의 창립 회원국으로서, 국제 협력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다”며 “정부 역시 개발 협력의 필요성을 국민에게 적극 설명하며 공공재정 투입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영국은 지난달 국방비 증액과 함께 공적개발원조(ODA) 예산을 GNI(국민총소득) 대비 0.5%에서 0.3%로 축소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개러스 위어 주한 영국 부대사는 “영국은 여전히 2027년까지 연간 90억 파운드(한화 약 17조 7700억 원)를 ODA에 투입하며, 세계 7대 ODA 공여국의 위치를 유지할 것”이라며 “재정 상황이 허락하는 대로 ODA 예산을 다시 GNI의 0.7% 수준으로 확대하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
이재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보건 협력은 글로벌 ODA에서 한국의 위상을 높일 전략적 기회”라며 “초당적으로 국제보건 협력 재원을 마련하는 데 힘쓰겠다”고 말했다.
◇ 한국의 국제보건 전략, 다자기구 협력 확대할까
글로벌펀드의 지원을 받은 국가들은 HIV, 결핵, 말라리아 퇴치뿐만 아니라 의료 시스템 개선에서도 성과를 거두고 있다. 케냐에서는 1400만 명의 국민이 보건 서비스 혜택을 받고 있으며, 르완다에서는 HIV 감염자의 98% 이상이 항바이러스 치료를 받고 있다. 특히 르완다는 글로벌펀드와의 협력을 통해 국민 96% 이상이 지역사회 기반 건강보험에 가입했으며, 의료 장비 확충과 의료 인력 교육에도 투자할 수 있었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글로벌펀드는 제8차 지원금 약정을 통해 180억 달러(약 26조 원) 추가 조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는 지난 약정 대비 4배 증가한 금액으로, HIV, 결핵, 말라리아 사망률을 2023년 대비 64% 낮추는 것이 목표다. 피터 샌즈 글로벌펀드 사무총장은 “3대 질병 퇴치에 투자된 1달러당 건강 개선 효과와 경제적 수익이 19달러에 달한다”고 밝혔다.
한국이 글로벌펀드와의 협력을 확대할 경우, 단순 기부를 넘어 보건ODA 정책의 방향성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피터 샌즈 사무총장은 “아프리카 질병 퇴치의 핵심은 외부 지원이 아니라 각국이 자체적으로 보건 프로그램을 구축하는 것”이라며 “하지만 단기간에 이를 달성할 수 없기 때문에 글로벌 협력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결국 한국이 글로벌 보건 ODA를 확대할 것인지, 이를 통해 기업과 경제적 이익을 연계할 것인지, 나아가 국제적 리더십을 구축할 것인지가 이번 라운드테이블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으로 남았다. 올해 연말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영국이 주관할 글로벌펀드 8차 지원금 약정 회의에서 한국이 어떤 입장을 취할지 주목된다.
채예빈 더나은미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