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경하의 우문현답] 기업재단, 돈만 잘 쓰면 되는 곳 아닌가요?

“기업재단은 그냥 돈만 잘 쓰면 되는 곳 아닌가요? 세상에서 제일 쉬운 게 남의 돈 쓰는 일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종종 듣는 질문입니다. 멀리서 보면 그럴듯해 보입니다. 기부금을 정해진 기준에 맞춰 집행하고, 공시와 보고만 하면 역할을 다 한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장을 조금만 가까이에서 보시면 이 질문을 쉽게 꺼내기 어려우실 겁니다. 어디에, 언제, 어떤 방식으로 자원을 흘려보낼지 결정하는 일은 단순한 일이 아닙니다. 한 번의 선택이 어떤 지역의 복지 체계를 바꾸기도 하고, 반대로 몇 년간 쌓아 온 현장의 신뢰를 한순간에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돈 쓰는 것은 쉬울지 모르지만, 돈을 ‘잘’ 쓰는 일은 가장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물론 모든 기업재단이 그런 무게를 감당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잘하는 곳도 있고, 여전히 형식적인 집행에 머무는 곳도 있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잘 쓰인 돈이 한 사회의 흐름을 바꾸는 지렛대가 될 수 있고, 잘못 쓰인 돈이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문제를 더 고착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만, 기업재단을 여전히 ‘감시와 감독의 대상’ 정도로만 상정하는 순간, 재단은 적극적인 사회문제 해결의 주체로 들어오지 못합니다. 요즘 제 머릿속 질문은 조금 다릅니다. “지금 이 시대에, 재단이라는 조직은 어디까지 할 수 있는 존재일까.” 기부를 ‘얼마나’ 하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가진 자원과 구조를 가지고 ‘어디까지’ 상상해볼 수 있는지, 그 상상의 끝을 한 번쯤 밀어붙여 보고 싶다는 마음입니다. 상상력이 없다면 위기 앞에서 늘

[ESG 월드뷰] UNGC 25년, ‘기술과 정의의 시대’를 향한 새로운 도전

2000년 여름, 뉴욕 유엔 본부. 전통적으로 국가 정상들만 오르던 단상 위에 이날은 IBM, BP, 노키아 등 다국적 기업 CEO들이 섰다. 1년 전 다보스포럼에서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이 던졌던 화두, “사람의 얼굴을 한 세계화(Human Face of Globalization)”에 기업들이 직접 응답한 자리였다. 당시는 세계화가 거센 속도로 확장되던 시기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는 환경 파괴, 인권 침해, 부패 문제가 계속 불거졌다. 유엔은 더 이상 정부만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시장을 움직이는 실질적인 힘은 금융과 투자자였고, 유엔은 책임 있는 시장 생태계를 만들기 위해 기업과의 협력을 선택했다. 그렇게 탄생한 유엔글로벌콤팩트(UNGC)는 지난 25년 동안 ‘ESG’라는 키워드를 앞세워 ‘지속가능하고 회복력 있는 시장’이라는 새로운 표준을 세계에 확산시켜 왔다. 기업의 책임은 시장의 규범이 됐고, 지속가능성은 경쟁력의 핵심이 됐다. 지금, ESG는 또 한 번의 전환점을 맞고 있다. 기후 대응 강화와 함께 인공지능과 디지털 기술이라는 새로운 과제가 등장한 것이다. ESG는 이제 환경과 인권을 넘어 ‘기술과 정의’의 문제로 확장되고 있다. 원칙에서 실천으로, 선언에서 시스템으로. ESG는 다시 한번, 시대의 화두를 묻고 함께 답을 찾아가야 할 때다. ◇ ESG, 국제기구와 기업이 함께 만든 새로운 시장 질서 UNGC가 출범한 2000년 당시만 해도 “기업이 인권·환경·반부패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제안은 실험적이었다. UNGC는 10대 원칙을 제시하고 기업을 국제 규범의 파트너로 초대했다. 기업들은 매년 ‘이행 보고서(Communication on Progress)’를 제출하며 원칙 준수 현황을 공개했다. 이 자발적 보고 체계는 훗날

[임팩트의 좌표] K-푸드 호황에도 지역 기업은 못 뜨는 이유

‘K-푸드’의 세계적 인기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만큼 분명합니다. 미국 대형마트의 선반 한 줄을 한국 식품이 차지하고, 동남아에서는 한국식 양념과 발효식품이 일상 소비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거대한 흐름이 실제 농식품 기업, 특히 지역 기업들의 성장으로 이어지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분위기는 달라집니다. 농림축산식품부 자료에 따르면 2023년 농식품 수출액은 96억 달러로 최근 5년간 연평균 7%대 성장을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관세청 통계는 다른 현실을 보여줍니다. 전국 5만여 개 식품 제조업체 중 지속적으로 수출을 이어가는 기업은 2%대에 불과합니다. 즉, 세계의 수요는 분명 존재하지만 그 수요를 지역 기업이 실제 성장으로 전환하지 못하는 구조적 단절이 존재합니다. ◇ 지역 산업의 강점과 글로벌 연결의 부재 한국의 농식품 기업들은 대부분 지역에서 시작되어 지역에서 사업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지역성은 제품의 이야기, 원료의 우수성, 전통 기술 등 뚜렷한 강점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글로벌 시장의 기준과 연결되는 순간 그 강점이 제약으로 전환되기도 합니다. 전남의 전통 장류 기업은 맛과 기술로 해외 구매자의 관심을 끌지만, FDA·EU 기준에 맞춘 설비와 안전성 체계를 갖추기 어렵습니다. 강원의 간편식 기업들은 지역 농산물 기반의 제품력은 높지만, 생산 확장과 해외 규제 대응이 요구하는 자본과 인력이 부족합니다. 제주의 기능성 식품 기업들은 꾸준한 해외 관심에도 불구하고 섬 지역의 물류비용과 계절성 생산 구조라는 구조적 제약을 넘기 어렵습니다. 지원은 존재하지만 대체로 ‘점’으로 흩어져 있어, 해외 시장까지 이어지는 ‘선’과 ‘면’이 비어 있는 성장 경로를 제공하지 못합니다. 이 문제를 구조적으로

김정태 엠와이소셜컴퍼니 대표
[임팩트 현장을 읽다] 성수는 ‘무한게임’ 중, 이제는 ‘정책 IPO’가 필요하다

얼마 전 싱가포르의 혁신 공간 ‘스케이프(SCAPE)’를 방문했을 때였다. 현지 담당자는 양철 지붕 아래 붉은 벽돌 담이 이어지는 공간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 장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내가 답을 찾기도 전에 그는 말했다. “성수동이 모티브예요.” 그 짧은 문장이 오래 남았다. 성수가 서울의 한 구역을 넘어, 아시아 도시 기획자들이 공유하는 하나의 언어이자 이미지가 되었음을 실감한 순간이었다. 투자자로서 지난 10년간 수많은 스타트업의 흥망을 지켜봤다. 살아남은 기업들의 공통점은 단순히 승패를 가르는 ‘유한게임’이 아니라, 게임 자체를 지속시키는 ‘무한게임(Infinite Game)’의 플레이어라는 점이었다. 도시는 더더욱 그렇다. 개발을 끝내고 완공 테이프를 끊는 순간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시민의 필요와 기술의 변화를 흡수하며 끊임없이 진화해야 한다. ‘무한게임’을 하는 도시만이 앞으로 살아남는다. ◇ 성수의 미래, ‘임팩트’에서 길을 찾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도시 행정은 여전히 ‘예측(Prediction)’ 중심에 머물러 있다. 예산 편성과 집행이 과거 데이터를 근거로 움직이는 구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반면 혁신 스타트업은 보유한 자원을 활용해 즉시 시도하고 수정하는 ‘실행(Effectuation)’ 방식으로 불확실성을 기회로 바꾼다. 이 간극을 좁히지 못하면 도시는 금세 정체된다. 서울프라퍼티인사이트가 주최하고 성동구가 후원한 ‘2025 시티포럼 성수’에서도 핵심 질문은 동일했다. “어떻게 성수라는 지역이 꺾이지 않을 것인가?” 나는 그 실마리가 성수 안에 이미 존재한다고 본다. 바로 ‘임팩트’다. 엠와이소셜컴퍼니(MYSC)가 번역 출간한 ‘메이크 스페이스’는 “공간은 조직의 몸짓 언어(body language)”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성수의 몸짓 언어는 무엇인가. 나는 ‘사회문제를 해결하며 성장하는 모델’이라는 창업 생태계의 정체성이 그 해답이라고

신현상 교수
[임팩트 현장을 읽다] 아시아 기업사회공헌, 임팩트 중심으로 재편되다

최근 기업의 전략적 사회공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와 함께 기업사회공헌 담당자들의 고민 역시 깊어지고 있으며, 과감하고 혁신적인 실험을 통해 얻어지는 우수사례 발굴의 필요성 역시 커지고 있다. 20세기 경영·경제학의 지배적 패러다임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자원의 효율적 배분을 바탕으로 한 주주이익 극대화”라는 소위 ‘프리드만(Friedman) 독트린’이었다. 1970년 뉴욕타임즈에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밀턴 프리드만이 기고한 글에 따르면 기업의 사회적 가치 창출 노력은 대리인 문제(Agency Problem)에 해당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전문경영자가 주주의 재산으로 사회공헌 활동을 하는 것은 부적절할 뿐 아니라 자칫 배임 소지가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기업의 사회적 가치 창출이 장기적으로 기업가치를 높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간과한다. 특히 2019년 비즈니스라운드테이블에서 아마존·애플 등 글로벌 대표 기업들이 ‘이해관계자 중시 경영’을 공식 선언한 흐름을 감안하면, 프리드만식 관점은 시대 변화와 맞지 않는다는 비판이 힘을 얻고 있다. 반면 1984년 버지니아대 프리먼(Freeman) 교수는 기업과 사회를 명확히 나누는 이분법을 비판하며, 기업은 반드시 이해관계자를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캐롤의 피라미드(Carrol’s Pyramid)’로 상징되는 전통적 CSR은 기업의 사회적 가치 창출을 ‘의무’의 영역으로 본다. 경제적·법적·윤리적·자선적 의무를 다해야 하며, 특히 자선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이 ‘좋은 기업시민’이 된다는 관점이다. 하지만 이는 자칫 일회성·시혜적 활동에 머물 위험이 있고, 이해관계자 범위가 크게 확장된 오늘날에는 기업이 어떤 기준으로 활동을 결정해야 하는지 모호해진다는 한계가 제기돼 왔다. ◇ 전략적 CSR의 부상…임팩트 지향형 모델로 진화하다 21세기 들어 주목받은 전략적 CSR은 사회공헌 활동이

[김경하의 우문현답] 임팩트 생태계에 ‘이찬혁적 사고’가 필요하다

“스포트라이트는 원래 제일 유명한 사람이 받는 것 아닌가요?” 얼핏 당연해 보이는 이 질문이, 요즘 같은 시대에는 가장 시대착오적인 우문(愚問)에 가깝다고 느껴지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최근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가수 이찬혁 씨가 선보인 무대는, 이 질문 자체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 장면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정면에 세우는 대신, 뮤직비디오 속에서 스쳐 지나가던 인물을 무대 앞으로 불러내 스포트라이트를 온전히 내어주었습니다. 노래와 안무, 카메라 동선과 조명이 모두 그 사람을 중심에 맞춰 재배치되는 순간, 이 무대의 ‘주연’은 조용히 바뀌었습니다. 예술적 완성도를 넘어 “누가 이 자리에 서야 하는가”를 다시 묻게 만든 연출이었습니다. 이 장면을 두고 많은 분들이 “모두가 주인공이라는 감각이 들었다”고 말합니다. 주연과 조연을 나누던 위계 대신, 각자의 서사가 동등한 무게를 갖는다는 인식, 다양성을 배경이 아니라 구성의 중심으로 끌어오는 감각이었습니다. 선언적인 ‘포용’의 구호를 외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무대의 구조 자체를 바꿔 메시지를 전달했다는 점에서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예술이 시대의 감각을 미리 보여주는 거울이라면, 이 무대는 지금 우리가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압축해서 보여준 셈입니다. 이른바 ‘임팩트 생태계’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사회문제 해결을 내세우는 수많은 프로젝트가 존재하지만, 이야기의 중심에 서 있는 이는 여전히 자금을 대는 주체인 경우가 많습니다. 각종 홍보 기사나 영상 속에서 현장의 당사자는 종종 ‘감동적인 사례’를 위해 소환되는 조연으로 소비됩니다. 누가 기획했고, 누가 지원했고, 어느 기업이 참여했는지에 대한 정보는 빼곡한 반면, 정작 그 변화로 삶의 궤도가 바뀐 사람들의 얼굴과 목소리는 흐릿하게

[세상은 여전히 따뜻한 法] ‘나누는 법’이 만드는 힘

‘나누는 法’은 우리 사회의 공익적 가치를 다루는 특별한 영역이다. 법률을 나눈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차원을 넘어, 모두가 법의 권리와 의무를 제대로 이해하고 일상에서 실천하도록 돕는 일이다. 더 넓은 시각과 이타적 관점이 요구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존중과 배려를 기반으로 한 이러한 나눔은 사회 구성원이 함께 성장하는 기반이 되며,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는 강력한 힘을 가진다. 김앤장 법률사무소의 ‘나누는 法’은 1999년 사내 공익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설치한 ‘공익활동위원회’에서 출발했다. 사각지대를 줄이고 소외된 이웃을 돕기 위해 ‘지속성’과 ‘진정성’을 원칙으로 프로그램을 개발했으며, 2007년에는 공익 실현의 가치를 구성원 전체와 공유하기 위해 ‘공익활동연구소’를 설립했다. 이후 2013년 5월에는 공익활동을 보다 체계적으로 지원하고자 ‘김앤장 사회공헌위원회’를 출범시키며 틀을 갖췄다. 사회공헌위원회는 ‘동행과 나눔’의 가치를 중심에 두고 다양한 공익 프로젝트를 운영하고 있다. 찾아가는 법률교육, 공익단체 법률 지원, 사회봉사, 법제도 개선 등 활동 분야도 폭넓다. 특히 법률지식을 직접 나누는 사업을 중점에 두고 다문화가족, 소상공인, 탈북민, 해외 청소년 등 다양한 계층을 대상으로 법률교육 프로그램을 꾸준히 확장해 왔다. 플랫폼 기반 접근의 필요성을 반영해 법률 교구와 맞춤형 콘텐츠도 제작하고 있다. 미래세대를 위한 법교육은 핵심 사업으로 꼽힌다. 2022년부터 국내외 청소년과 함께 문제 해결 중심의 프로그램인 ‘리걸마인드로 더 나은 세상 만들기(리더)’를 운영하고 있으며, 서울시와 협약해 성인 청년을 위한 법교육 프로그램도 시작했다. 젊은 세대가 법률 지식을 바탕으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발판을 넓히겠다는 취지다. 최근에는 유산기부

[사회혁신발언대] 임팩트 스타트업 M&A의 본질을 찾아서

작년 8월부터 1년 동안 교내 투자은행 학회에서 학회장으로 활동하며 국내 상장사 간 인수합병(M&A) 프로젝트를 여러 차례 다뤘다. 분석 대상 기업은 모두 사업보고서와 공시를 통해 방대한 데이터를 공개하고 있었고, 비교기업 분석부터 산업 구조 진단, 인수 주체 선정, 전략적 시너지 도출, 밸류에이션 모델링까지 일련의 과정을 체계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학부생 수준에서 재무적 투자자(FI·Financial Investor) 기반 거래인 ‘인수금융’을 깊이 다루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대부분의 프로젝트는 결국 전략적 인수자(SI·Strategic Investor)를 중심으로 거래 구조를 설계하고, 양사의 전략적 시너지가 어떤 성과를 낼 수 있는지를 종합적으로 분석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시장 확대, 공급망 통합, 기술·R&D 시너지, 고객 기반 확장 등을 통해 인수의 타당성을 정량적 가치로 산출하는 작업이 핵심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생겼다. “전략적 시너지를 정량화해 내는 이 방식이, 정보 공개가 많지 않은 스타트업에서도 가능할까?”이 의문이 나를 임팩트 생태계의 M&A로 이끌었다. 상장사에서는 정보가 제도적으로 보장되지만, 임팩트 조직은 전혀 다른 기반 위에 서 있다. 미션 중심적이고, 성장 궤적이 단선적이지 않으며, 정량화되지 않은 무형자산이 핵심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상장사 협상에서 익혔던 M&A 논리가 이곳에서는 어떻게 작동할 수 있을까. 지난 11일 열린 ‘플래닛 써밋’에서 그 질문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얻었다. 법무법인 미션의 김성훈 대표는 주식회사를 “고도의 신뢰 시스템”이라고 설명했다. 상장사 분석에 익숙한 내게 이 말은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다가왔다. M&A는 결국 ‘누군가에게 회사를 파는 순간’이고, 그때 필요한 것은 숫자 그 자체가 아니라 숫자를

[기자 수첩] 한국 사회에 첫 출근한 ‘이상한 인턴’의 기록

[더나은미래 x 희망친구 기아대책 공동기획]우리는 N년째 항해 중입니다 <7·끝> 10여 년 전 ‘다문화’라는 이름으로 묶였던 청소년들이 이제 청년이 됐다. 나 역시 그중 한 사람이다. 한국살이 10년째, 지난 여름 뜻깊은 제안이 찾아왔다. ‘희망친구 기아대책’에서 이주배경청년 활동가로서 목소리를 낸 경험이 계기가 됐다. 현장의 문제를 직접 취재해보는 일을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었다. 그렇게 나는 ‘더나은미래’의 인턴 기자로 합류했다. 나는 흔히 말하는 ‘이상한 인턴’이었다. 채용 과정에 하나의 변수가 있었다. 바로 ‘비자’였다. 혹시 법이 허용하지 않는 근무 형태일까 불안했다. 불안은 곧 행동으로 이어졌다. 756쪽에 달하는 법무부 ‘비자 매뉴얼’을 직접 뒤졌다. 내 인생의 모든 국면에는 늘 ‘비자’라는 단어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8월 7일, 면접 당일. 지하철에서 자기소개서를 다시 펼쳐 들었다. 좋아하던 시의 한 구절을 빌려 적어둔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가장 낮은 곳으로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겠다.’ 기자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가장 단정하게 표현한 문장이었다. 짧은 이동 시간 동안 뛰는 가슴을 가라앉히려고 클래식 음악을 반복해 들었다. 이번 면접은 당락을 가르는 자리는 아니었지만, 나에게는 그 이상이었다. 면접실 문을 열자, 내 자기소개서가 면접관 손에서 넘겨지고 있었다. 긴장이 바짝 올라왔다. ‘그냥 내 이야기를 하자’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한국에 온 뒤 부딪쳤던 크고 작은 어려움, 낯선 자리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던 순간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그 모든 경험이 지금 이 자리로 이어졌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8월 13일, 첫 출근길. 시청역은 늘 학교로 향할 때 지나치던 곳이었다. 그런데

[공익이 이끄는 데이터 과학] 민주주의는 확률이 아니라 가능성이다

맥아더 펠로십(MacArthur Fellowship)은 과학의 노벨상, 수학의 필즈상, 컴퓨터과학의 튜링상, 언론의 퓰리처상과 함께 가장 권위 있는 상으로 꼽힌다. 익명의 선정위원회가 비밀리에 25명 내외의 수상자를 고르고, 선정된 이들은 5년에 걸쳐 총 80만 달러(약 11억3000만원)의 상금을 조건 없이 자유롭게 사용한다. 기준은 독창성, 창의성, 헌신 그리고 자기 주도 능력. 추상적이면서도 포괄적이기 때문에 매년 누가 선정될지 누구도 예상하기 어렵다. 다만 한 분야를 개척한 이들이 이름을 올리는 경우가 많아 미국에서는 ‘맥아더 천재상(MacArthur Genius Award)’으로 불린다. 이 영예의 전당에 2025년, 한국계 미국인 정치학자 한하리 교수가 이름을 올렸다. 올해 선정된 22명의 맥아더 펠로우 가운데 유일한 정치학자다. 1세대 한인 이민 가정에서 자라 하버드 대학에서 학부를 마치고 스탠퍼드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한 교수는 현재 존스홉킨스대에서 정치학을 가르친다. 동시에 민주주의와 시민사회 연구의 국제적 거점인 SNF 아고라 연구소(SNF Agora Institute)의 초대 소장이다. 이 연구소는 스타브로스 니아르코스재단(SNF)과 존스홉킨스대가 공동으로 1억5000만 달러(약 2130억원)를 출연해 만든 기관이다. 한 교수의 연구 주제는 명확하다. 시민이 정치와 정책 결정 과정에서 어떻게 단순한 관객이 아닌 실질적 참여자가 될 수 있는가. 민주주의(democracy)는 글자 그대로 시민(demos)이 스스로 통치(cracy)에 참여하는 제도다. 정당은 스포츠 팀에 비유될 수 있고 선거는 경기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러나 선거 기반의 민주주의는 결코 경기로 환원되지 않는다. 시민은 이 민주주의 ‘드라마’의 관객이 아니라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한 교수의 연구는 시민 참여, 집단행동, 민주주의 역량을 어떻게 강화할 수 있는지에 관한

[ESG 월드뷰] 아마존 자동화가 던진 질문…정의로운 전환은 준비돼 있나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기업 아마존이 2033년까지 전체 사업의 75%를 자동화하고, 잠재적 신규 고용 인력 60만 명을 인공지능(AI)으로 대체할 계획이라는 내부 문건이 공개됐다. 뉴욕타임스가 지난 10월 21일 보도한 내용이다. 산업 자동화의 거대한 파도가 이미 현실로 다가오고 있는 셈이다. 지금 우리는 두 개의 거대한 전환 기로에 서 있다. 하나는 기후위기에 대응해 화석연료 중심의 산업 구조를 친환경으로 바꾸는 ‘기후 전환’이고, 다른 하나는 디지털 기술·인공지능(AI)을 중심으로 한 산업·업무 구조의 혁신적 변화, 즉 ‘AI 전환’이다. 문제는 이 두 전환이 동시에 맞물리면서, 사회 시스템이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쪽에서는 새로운 일자리가 생기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재교육이나 보호장치 없이 일터에서 밀려난다. 이 변화는 많은 사람들에게 잔인한 결과를 남길 수도 있다. 이런 불균형의 시대에 주목받는 개념이 바로 ‘정의로운 전환(Just Transition)’이다. 산업 변화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되, 그 과정에서 노동자와 지역사회가 공정하게 적응할 수 있도록 지원하자는 원칙이다. 기후·AI 전환의 물결이 거세질수록, ‘속도’보다 ‘사람’을 중심에 둔 전환 설계가 절실해지고 있다. ◇ 속도 경쟁 속에서 놓치고 있는 것 이 불균형은 이미 기업 현장에서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2023년 미 자동차 업계는 강화된 환경 규제 속에서 ‘전기차(EV) 전환’을 추진하며 대규모 인력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그러나 재교육과 임금 보전 등 지원책 부족으로 노동자들의 반발이 거세 졌고, 결국 근로자들의 40일간 총파업으로 이어졌다. 이로 인해 자동차 업체들이 입은 손해만 약 39억 달러(약 5조원)에 달한다는 분석이 나왔다. 산업 전환

[조직문화 pH 6.5] 요즘 애들의 역사는 반복된다

최근 한 시민대학에서 MZ세대에 대한 강의를 했다. 하루 종일 격무에 시달린 뒤 퇴근한 X세대 중간관리자들과 자녀를 이해하고 싶은 4050 어머니들이 주 대상이었다. 보통 ‘Z세대’가 가진 특징이 어떤 성장 환경에서 비롯되었는지 맥락을 충분히 설명하면 ‘아, 그래서 그랬구나’ 하는 공감의 눈빛이 돌아오곤 했는데, 그날은 달랐다. 여기저기서 “우리도 힘들다”는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대표에게 바로 찾아가 컴플레인을 하는 바람에 곤란해진 부장, 업무를 요청하면 “이걸요? 제가요? 왜요?”가 돌아오니 결국 본인이 남아 야근을 한다는 팀장, ‘블라인드 앱’에 이상한 글이 올라오진 않는지 회사 평판 관리에 신경 쓰라는 사장 사이에서 눈치만 본다는 관리자까지. ‘MZ스럽다’도 옛말이고, 이제는 40대를 희화화하는 ‘영포티’라는 밈까지 등장했다. 세상살이도 퍽퍽한데 세대 간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는 듯하다. 한 지점에서 만날 수 없는 평행선처럼, 세대 차이는 왜 이토록 좁혀지지 않는 걸까. ◇ 세대 차이의 이유 우리가 말하는 세대 차이는 결국 ‘시간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서로 다른 세대는 같은 시대를 살지만, 같은 시간을 살고 있지는 않다. 사회학자 카를 만하임은 이를 ‘동시대의 비동시성(the non-simultaneity of the simultaneous)’이라 불렀다. 그는 “모든 사람은 완전한 동시대적 가능성 속에서 나이가 같은 사람들과, 나이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고 있다. 각 개인에게 동일한 시간은 다른 시간이며, 비슷한 나이대의 사람들과 공유하는 자기 자신만의 시대다”라고 말했다. 단적인 예로 세월호와 같은 시대적 사건을 모두가 함께 목격했더라도, 청소년과 어른의 시선과 해석은 같을 수 없다. 청소년은 ‘가만히 있으라’는 말만 따르면 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