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 시한부 삶을 살던 사육곰 22마리가 15일(현지 시각) 미국에서 새 삶을 시작했다. 강원 동해시의 농장에서 생(生)의 절반을 철창에 갇혀 산 사육곰들이다. 이들은 인천국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9600km를 날아가 미국 콜로라도의 야생동물 생추어리에 새 보금자리를 얻었다. 이동 시간만 꼬박 50시간 걸렸다. 생추어리(sanctuary)는 공장식 사육농장에서 구조한 동물이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조성된 공간이다.
이번 사육곰 이주 프로젝트는 국내에서 구조한 사육곰을 해외 안식처로 보낸 최초 사례다. 국내외 민관(民官) 기관 9곳이 공조한 결과다. 국내에서는 동물자유연대(이하 동자연)와 함께 곰보금자리프로젝트, 환경부, 원주지방환경청, 국립공원공단, 국립생태원, 충북대학교 수의과대학, 농림축산검역본부가 힘을 보탰다. 미국에서는 야생동물생추어리(TWAS·The Wild Animal Sanctuary)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국내 첫 사육곰 美 이주 프로젝트
이번 구조활동에 투입된 금액은 10억원에 달한다. 주로 사육곰을 농장주로부터 매입하고, 대형맹수용 이동장인 크레이트(crate)와 무진동 이동 차량, 항공편, 식량 마련 등에 쓰였다. 재정은 동자연과 TWAS의 기부금, 일반 시민의 후원금으로 충당했다. TWAS는 미국 야생동물보호단체로 콜로라도주 덴버 인근에 약 4253ha 규모의 생추어리를 보유하고 있다. 동자연은 지난 2018년 서울어린이대공원 내 폐쇄된 콘크리트 방에 갇혀 있던 사자 3마리를 구조해 미국 생추어리로 이주시킨 것을 계기로 이번 구조도 TWAS와 함께 진행했다.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된 건 2020년 8월이다. 당시 동자연은 TWAS와 강원 동해시 농장의 사육곰을 미국으로 이주하는 구체적인 계획 수립에 돌입했다. 모두 22마리였다. 정진아 동자연 사회변화팀장은 “국내에는 사육곰 보호소가 없고 해외로 보내야 하는 상황이라 비용과 인력이 필요했다”면서도 “열악한 환경에서 죽어가는 사육곰들을 그저 두고 볼 수만은 없어 큰 결정을 하게 됐다”고 했다.
구조 대상을 동해시 사육곰으로 정한 건 농장의 열악한 환경 탓이다. 두평 남짓한 뜬장 구조에 먹이 투입구 외에는 문도 없었다. 뜬장은 바닥까지 철조망을 엮어 배설물이 그 사이로 떨어지게 한 설치물이다. 80~100kg에 달하는 곰이 철창 위에서 몸을 지탱하려다 보니 곰들의 발바닥은 갈라졌다. 사육곰들은 사료·과일 대신 음식물 쓰레기를 먹었다. 철저히 산업동물로 길러진 존재였다.
동자연은 농장주로부터 사육곰 22마리를 매입하고 약정서를 체결했다. TWAS는 미국 검역본부에 사육곰 반입 신청 허가서를 냈다. 하지만 미국 내 코로나19 확산으로 검역 체계가 마비되면서 반입 승인은 지난해 10월에야 났다. 그 사이 15개월이 흘렀다. 이후 동자연은 원주지방환경청에 사육곰의 해외 이주 허가를 승인받아 본격적으로 구조 활동에 나설 수 있었다.
구조가 늦어지며 모금에 참여한 후원자들은 불안을 표하기도 했다. 정진아 팀장은 “많은 분이 지지를 해주셨지만, 구조 기간이 예상보다 너무 길어지다 보니까 곰들이 실제로 미국에 갈 수 있는지 염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번에 구조된 사육곰들은 토종이 아닌 외래종이기 때문에 해외 이송이 가능했다. 토종 반달가슴곰은 천연기념물로 국내에서 보호해야 한다. 다만 사육 반달가슴곰의 경우 1980년대 웅담 채취를 위해 일본·대만 등에서 수입한 외래종이기 때문에 ‘멸종위기종 수출 허가’를 받을 시 해외로 이송할 수 있다.
民官 공조의 힘
국내 곰 사육은 1981년 정부에서 농가 소득증대 차원으로 곰 수입을 권장하면서 시작됐다. 하지만 불과 4년 만인 1985년 국내 곰 보호 여론에 따라 사육곰 수입을 전면 금지했다. 이후 곰들은 약 40년간 방치됐다. 정진아 팀장은 “그간 사육곰 보호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던 정부가 지난해 12월 민관 협의체에서 곰 사육 종식 합의를 이끌어내는 등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며 “특히 이번 사육곰 이주 프로젝트에서도 정부 산하 기관들이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고 했다.
사육곰 이주 프로젝트에는 민간기관 4곳과 공공기관 5곳이 각자 역할을 맡아 수행했다. 비영리단체 곰보금자리프로젝트는 지난해 10월부터 사육곰들의 주기적인 건강검진을 위해 건강 관련 자문을 맡았다. 지난 14일 구조 당일에는 40~50명의 현장 인력이 투입됐다. 국립공원공단과 국립생태원은 마취와 각성 등 곰들의 건강 관련 작업을 전담했다. 곰의 혀에 산소포화도 측정기를 달고 혈액, 분비물 검사 등의 검진 작업이다. 충북대학교 수의과대학은 사육곰들을 안전하게 마취할 수 있도록 인력을 파견했다.
검진을 마친 곰은 TWAS가 제공한 크레이트로 옮겨졌다. 수의사들은 곰들의 마취가 깨어나는 것을 확인하고 각성제를 맞혔다. 15일 이른 새벽에는 22개의 크레이트를 실은 무진동 차량 4대가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약 5시간을 이동한 끝에 공항에 도착한 크레이트는 농림축산검역본부의 도움으로 두 대의 화물항공기로 옮겨졌다. 사육곰들은 태평양을 건너 15일 오후 3시(이하 현지 시각) 미국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이후 차량을 통해 육로로 약 20시간가량 이동한 끝에 16일 오전 10시30분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 인근에 있는 새로운 보금자리에 도착했다. 사육곰들이 미국에서 새 출발을 하는 데 걸린 시간은 2020년 7월부터 2022년 3월까지 약 20개월이다.
사육곰들은 현지에서 최소 일주일에서 최대 2개월 정도의 적응 기간을 갖는다. 조희경 동물자유연대 대표는 “사육곰들은 다양한 채소·과일을 먹고 계류장을 어슬렁거리며 새 보금자리에 적응하고 있다”며 “이번에 미국으로 이주한 사육곰들은 2008~2013년 개체들로서 반달가슴곰의 평균 수명인 25년에 비춰보았을 때 대략 10년 이상 자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정진아 팀장은 “22마리 사육곰을 구조해 미국 생추어리로 보내는 구조 활동은 국내에서 처음 이뤄진 일인 만큼 관련 법이나 규정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상황”이라며 “환경부와 환경청, 검역본부의 공조 없이는 불가능한 작업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아직 국내에는 300마리 이상의 사육곰이 남아 있다”고 했다.
김수연 더나은미래 기자 yeon@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