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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안부 ‘삶기술학교’ 기획표, ‘괜찮아마을’ 기획 내용·형식 거의 동일
民 “정부 사업에 기획안 도용당해” VS. 官 “사용에 법적 문제 없다”
민관협력 사업 늘어나는데… 아이디어의 재산권 보장하는 법 없어
계약서 개선 시급… 재산권·업무 범위·대가, 구체적으로 명시해야
지식재산 관련 사회적 논의 이뤄져야… “관련 규범 개정 검토 필요”
전남 목포에서 ‘괜찮아마을’을 운영하는 문화기획사 ‘공장공장’은 지난 8월 3일 충남 천안 소재의 문화기획사 ‘자이엔트’로부터 메일을 받았다. 행정안전부와 함께 진행하는 ‘삶기술학교’의 워크숍에 참석해 괜찮아마을 사례를 공유해달라는 내용이었다. 공장공장 측은 “메일에 첨부된 삶기술학교 설명 자료 안에 낯익은 표가 들어 있었다”며 “지난해 행안부의 ‘공간활성화 프로젝트’ 용역 사업을 진행하며 만든 괜찮아마을 기획 표 내용과 형식이 매우 비슷했다”고 했다.
괜찮아마을은 청년들이 전남 목포의 구도심에 6주간 머물며 재충전하는 시간을 갖는 프로젝트다. 공장공장은 지난해 행안부의 용역사업 ‘공간활성화 프로젝트’의 수행자로 선정돼 행안부로부터 사업비 6억6000만원을 지원받아 6월부터 12월까지 괜찮아마을 1·2기를 진행했다. 문제가 된 표는 공장공장이 행안부에 제출한 착수 보고서에 포함됐던 것이다. 공장공장 측은 “2017년부터 괜찮아마을을 준비했고, 행안부 계약 전에 프로젝트 진행 공간 임차, 괜찮아마을 법인 설립, 상표권 등록까지 마친 상태였다”면서 “괜찮아마을 기획에는 행안부의 예산을 한 푼도 쓰지 않았다”고 했다.
정부 용역사업에서 발생한 지식재산권을 둘러싸고 민관이 갈등을 빚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다. 민간이 아이디어를 내고 정부가 자금을 대는 형태의 ‘민관협력 사업’이 늘고 있지만, 민간이 아이디어의 재산권을 보장받을 법과 제도가 마련돼있지 않은 게 문제다.
“지식재산권 보장받으려면 계약서부터 손봐야”
공장공장은 지난 8월 12일 괜찮아마을 공식 홈페이지에 “괜찮아마을 기획 도용에 대해 행정안전부와 삶기술학교의 공식적인 설명과 사과를 요청한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이 글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확산되면서 삶기술학교 운영사인 자이엔트에도 비난이 쏟아졌다. 자이엔트 측은 “행안부의 ‘청년들이 살고 싶은 마을 만들기 프로젝트’ 수행 업체로 선정돼 착수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행안부가 공개한 전년도 사업 자료를 참조했던 것”이라며 “공장공장·자이엔트·행안부가 모인 자리에서 공장공장 측에 출처 없이 표를 사용한 점에 대해 사과했는데도 ‘삶기술학교가 괜찮아마을 기획을 도용했다’고 여론이 형성돼 억울하다”고 했다. 두 프로젝트를 모두 담당했던 행안부 관계자는 “행안부와 삶기술학교가 괜찮아마을 기획을 도용했다는 것은 공장공장의 일방적인 주장”이라며 “법적으로 행안부가 그 표를 사용하는 데 문제가 없다”고 했다.
정부 용역사업을 진행해온 민간 조직들은 ‘법적으로 정부가 민간 용역사업 수행자의 지식재산권을 침해해도 문제가 없는 점이 바로 문제’라며 분개하고 있다. 김시열 한국지식재산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정부 용역사업에서 발생한 지식재산권 귀속에 대한 논의는 2000년대 들어서야 시작됐다”며 “사업 규모에 비해 관련 연구나 제도 등은 미흡한 실정”이라고 했다.
현장에서 꼽는 가장 시급한 개선 사항은 ‘계약서’다. 도시·공간·문화 기획자 네트워크인 ‘작은도시기획자들’이 지난달 21일 마련한 토론회에서도 ‘지식재산권 관련 조항이 구체적으로 명시된 표준계약서가 필요하다’는 의견에 힘이 실렸다. 김희선 프로젝트39 대표는 “정부 용역사업 표준계약서에서 지식재산권에 관한 내용은 한두 줄로 뭉뚱그려지는 게 대부분”이라며 “표준계약서에 해당 내용을 보충하거나 아예 지식재산권 관련 조항을 별도로 다룬 문서를 계약의 별첨 서류로 정하는 등 대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박성경 소정당협동조합 공동대표는 “한국디자인진흥원에서는 디자인 표준계약서를 만들어 배포하고 있다”며 “디자인 업무의 범위와 대가 기준, 재산권 관련 조항이 명시돼있어 적절한 참고 자료가 될 것 같다”고 했다. 작은도시기획자들은 기획자의 지식재산권을 보장하는 용역사업 계약 양식을 작성해 정부에 제안할 계획이다.
‘지식재산권’에 대한 사회적 논의 활발해져야
현재로서는 계약을 맺기 전 계약 당사자들이 지식재산권에 관한 계약 조건을 충분히 논의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이경호 사회적경제법센터 더함 대표변호사는 “기획재정부 행정예규 ‘용역계약일반조건’의 제35조2항에 ‘해당 계약에 따른 계약목적물에 대한 지식재산권은 발주기관과 계약상대자가 공동으로 소유한다’고 나와 있지만 법적 강제력은 없다”며 “실제 사업 계약서에 ‘용역사업에서 발생한 지식재산에 대한 권리는 발주처가 갖는다’는 내용이 있다면 그 내용이 법적 효력을 갖게 된다”고 했다. 따라서 계약을 체결할 때 양측이 해당 내용을 점검하고 이견을 조율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이 변호사는 “이미 체결된 계약서는 고치기 어렵기 때문에 체결 전에 내용을 꼼꼼히 검토하고 필요할 경우 발주처에 수정을 요청해야 한다”고 했다.
지역재생 사업 기획, 청년 공간 조성 사업 기획 등 ‘아이디어’ 자체는 현행법상 저작권 등록이 불가능한 점도 민간 조직들에는 큰 숙제다. 기획 아이디어의 재산권을 둘러싸고 정부와 갈등이 일었을 때 창작자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김희선 대표는 “기획 아이디어를 표, 도식 등 유형의 저작물로 만들어 한국저작권위원회의 저작권 등록부에 등재하는 방법을 고려하고 있다”며 “비록 기획 내용 자체가 아니라 이를 표현한 형식에 대한 저작권이 인정되는 것이긴 해도 최소한 내가 언제 이 아이디어를 고안했다는 증빙 자료로는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정부 용역사업에서 발생한 지식재산권을 민관이 어떻게 나눠 가질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이경호 변호사는 “정부 발주사업에는 용역 외에 민간 위탁, 보조금 지급 등 여러 유형이 있는데 유형별 특성에 따라 재산권 귀속 문제를 따져봐야 한다”면서 “보다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했다. 김시열 부연구위원은 “정부 용역사업에 적용되는 ‘국유재산법’ ‘공유재산 및 물품 관리법’ 등은 정부 자원이 투입된 재산에 대한 정부의 소유를 강조하기 때문에 창작자 권리를 우선시하는 저작권법, 사업에서 발생한 재산권에 대해 민관의 공동 소유를 원칙으로 삼는 용역계약일반조건과도 맞지 않는다”며 “지식재산권 특성을 고려한 관련 법 체계 개편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했다.
[한승희 더나은미래 기자 heeha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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