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을 만들어내는 작물’, ‘가장 환경 파괴적인 과일’.
바나나에 붙은 오명(汚名)이다. 2014년 한 해 동안 150여 개국이 1억500만톤의 바나나를 생산했다. ‘바나나: 세계를 바꾼 과일의 운명’ 저자인 댄 쾨펠은 “4억명 이상이 바나나를 주식으로 삼고 있다”고 말했고, 유엔식량농업기구(FAO)는 바나나를 세계에서 8번째로 중요한 작물이며, 개발도상국에게는 4번째로 중요한 작물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세계인의 식량, 가장 대중적인 과일 바나나가 왜 이런 오명을 안게 됐을까. 세계 최대의 공정무역 바나나 수출 기업인 아그로페어(Agrofair)의 한스 윌리엄(Hans-Willem) 대표는 “다국적 대기업 독점으로 인한 생산비 축소가 원인”이라고 답했다. 그는 “생산비가 기형적으로 축소되어 바나나를 통해 발생되는 수익의 아주 일부분만이 소작농이나 노동자들에게 돌아간다”면서 “거대 기업은 바나나 가격을 낮게 유지하는 것이 우선이므로 환경 파괴나 노동자 인권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동시에 그는 “공정무역이 바나나와 같이 *플랜테이션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제3세계의 빈곤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 12일, 한스 윌리엄 대표는 세계공정무역의 날을 기념해 아이쿱 생협이 주최한 ‘공정무역과 조합원의 만남’에서 강연자로 나섰다. 강연이 끝난 뒤 그를 서울시청 안 공정무역 카페 ‘지구마을’에서 만났다. 한스 윌리엄 대표는 2006년 아그로페어 대표로 취임하여 현재까지 대표직을 맡고 있다.
◇매년 600만개 공정무역 바나나 전 세계로 수출
아그로페어는 1996년 네덜란드에서 설립된 생산자 협동조합이다. 처음 서너 명의 생산자들로 시작했던 아그로페어는 현재 세계 최대 공정무역 바나나 수출 기업으로 우뚝 섰다. 세계 최초로 공정무역 바나나를 유럽 시장에 수출했으며 특히 20년간 스위스 공정무역 바나나의 대부분을 공급했다. 한 해 평균 바나나 150송이가 들어있는 박스 600만 개를 프랑스,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한국 등에 수출하고 있다. 페루, 에콰도르, 파나마 등 6개국의 3000여 명의 생산자(개인농장, 대형농장 포함)들이 아그로페어와 함께 일하고 있다.
-세계 최초로 공정무역 바나나를 유럽에 수출했다. 왜 많은 과일들 중 ‘바나나’를 주요 수출 품목으로 선택했는가.
“아그로페어는 바나나 외에도 파인애플, 망고, 코코넛 등 제3세계 열대 과일들을 세계 각지로 판매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바나나는 우리 회사의 주요 수출 품목인데, 바나나에 담긴 상징성 때문이다. 우선 바나나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소비되는 농작물 중 하나이면서 동시에 세계에서 가장 값싼 과일이다. 대부분의 바나나는 수입시장의 80%를 독점하는 돌(Dole), 치키타(Chiquita), 델몬트(Del Monte), 파이프스(Fyffes), 노보아(Noboa) 등 5개 거대 회사에 의해 유통된다. 이들은 바나나를 많이 팔기 위해 생산 비용을 기형적으로 줄이고 있다. 이 때문에 수익의 아주 일부분만이 바나나 소작농이나 임금 농부들에게 돌아간다. 기본적인 생활비마저 보장되지 않는 바나나 소작농, 노동자가 처한 빈곤의 악순환은 이미 국제사회의 심각한 문제다. 그러나 거대 기업은 바나나 가격을 낮게 유지하는 것이 우선이므로 환경 파괴나 노동자 인권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바나나 공정무역 시장을 확대함으로써 제3세계의 플랜테이션 노동 환경을 개선해 보겠다는 취지로 들린다.
“그렇다. 아그로페어의 미션은 단순한 이윤 창출이 아닌 ‘지속가능한 시장’, ‘지속 가능한 노동’ 그리고 ‘지속가능한 환경’이다. 보다 큰 사회공헌 효과를 내기 위해 가장 큰 과일 시장인 바나나를 선택했다. 또한 공정무역 바나나 생산은 환경 보호에 큰 도움이 된다. 대부분의 일반 기업들과 플랜테이션 농장들은 바나나 품질 유지를 위해 대량의 살충제와 살균제를 사용한다. 한 예로 중앙아메리카에 있는 대부분의 바나나 농장에서는 1㏊(헥타르=1만㎡)당 70㎏ 분량의 살충제를 쓴다고 한다. 산업화된 다른 농작물의 대량 생산 시스템과 비교하면 10배나 많은 양으로, 이러한 화학적 살충제는 노동자와 지역주민의 건강은 물론 자연 환경에도 치명적이다. 반면 공정무역 바나나는 대부분 유기농 방식으로 재배된다. 국제공정무역 인증기구(이하 FLO)가 허용한 최소한의 화학 비료와 살충제만을 사용하고 포장 용기 등을 재활용하는 등 친환경적이다. 우리는 공정무역 바나나를 생산함으로써 여러 사회공헌 활동을 하게 되는 셈이다.”
-현재 제3세계의 플랜테이션 바나나 농장의 노동 환경은 어떤가.
“종사자들의 노동시간은 12~14시간으로 길고, 추가 업무를 해도 정당한 급여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또 노동자들은 갑작스럽게 해고당하거나 몇 개월에 불과한 단기 계약기간으로 인한 고용불안도 커진 상태다. 계약직 노동자인 이들은 사회 보험을 들 수 없기 때문에 일하다 다치거나 건강이 나빠져도 농장과 정부로부터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한다. 일반 농장에서는 어마어마한 화학물질을 뿌리는데 이것이 노동자의 호흡기와 피부에 노출되면 매우 치명적이다. 또 바나나를 가공하는 과정에서 절단 기계 등 많은 위험에 노출돼 있다. 이렇듯 저렴한 바나나에는 농장 노동자와 소작농의 고통이 있으며, 이런 현실은 계속 심각해지고 있다.”
-그럼 공정무역 농장은 기존 농장과 얼마나 다른가.
“공정무역 제품 생산 농장 또는 조합은 일반 플랜테이션 농장과 큰 차이가 있다. 우선 FLO 인증을 받은 공정무역 생산자들은 농산물의 최저가격 이상을 보장 받는다. 직업 사고를 피하기 위해 안전장치를 준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소작농에게는 이익을 동등하게 배분해야 하며, 생산모임에 속한 모든 인원이 의사결정에서 의견을 제시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아그로페어는 작은 생산자 협동조합들이 전체지분의 35%를 가지고 있으며, 나머지 주식의 반은 NGO나 윤리적인 투자자가 소유하고 있다. 무엇보다 공정무역 농장은 바나나 18.14㎏당 1달러의 공정무역 기금을 받아 지역민의 생활과 노동조건 개선에 사용한다. 공정무역이 노동자의 삶은 물론 지역 사회도 발전시키는 셈이다.”
-대표적인 변화 사례를 들어달라.
“우리 생산자 조합 중 하나인 페루의 앱보사(Abbosa)는 2003년 설립된 페루의 가장 큰 바나나생산자 협동조합이다. 페루 전체 바나나 수출량의 20%를 담당하고 있다. 앱보사의 성장은 눈부시다. 먼저 과거엔 농장 노동자 대부분이 비정규직으로 계약돼 의료보험 혜택은 물론 기본적인 안전장치 없이 일해왔다. 이제는 이들 모두 정식 조합원 자격을 얻었고 건강보험에 가입해 협동조합이 보험료를 50%를 감당하고 있다. 조합원의 가족들에게도 의료 혜택이 제공된다. 더불어 조합원들은 업무와 안전, 건강, 환경 등 다양한 교육을 받을 수 있으며, 지역 학교에 과학 실험실, 컴퓨터실 등을 설립해 줌으로써 조합원 개인과 지역 사회 발전도 꾀했다.”
◇“바나나 수입시장의 80%를 돌, 델몬트 등 메이저 5개사가 유통, 생산비용 기형적”
아그로페어가 주로 활동하고 있는 유럽은 비교적 한국보다 공정무역 개념이 일찍 대중화됐다. 시장, 마트, 백화점 어느 곳을 가도 쉽게 공정무역 제품을 찾아볼 수 있다. 일반 제품에 비해 다소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지만, 소비자는 물론 공급자(마켓)도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한 투자라고 여기며 기회의 문을 열어 주고 있는 것. 이에 한스 윌리엄 대표는 “아그로페어의 눈부신 성장은 유럽의 공정무역 시장의 확대와 궤를 같이 한다”고 정리했다.
-유럽의 공정무역 시장이 이렇게 대중화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정부와 시장 그리고 시민 사회의 균형 있는 개입 덕분이다. 유럽의회는 2006년 7월 6일 ‘공정무역과 발전’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는 공정무역에 대한 유럽 정책의 틀을 구성하는 첫 단계가 되었다. 이후 프랑스를 비롯한 몇몇 국가들이 공정무역법을 만들어서 사회연대경제법안에 공정무역을 넣었다. 이와 달리 영국은 풀뿌리 운동으로 공정무역을 실현했다. 전체 1872개의 공정무역마을 중 619개가 영국에 있는 점은 이를 잘 말해준다. 런던시의 17개 구는 2007년부터 공정무역 구역으로 인정받았다. 참고로 영국은 유럽에서 가장 큰 공정무역 시장을 가지고 있다.”
-산업혁명의 발상지이며, 자본주의 종주국인 영국에서 공정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현상이 역설적이다. 공정무역 풀뿌리 운동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영국 국민 70%가 공정무역 마크를 알고 있으며, 4명 가운데 1명이 정기적으로 공정무역 제품을 구매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영국 최대의 소비자협동조합 코업이나 테스코, 막스 앤 스팬서와 같은 슈퍼마켓에서 어디에서나 손쉽게 공정무역 제품을 구입할 수 있다. 이는 공정무역 풀뿌리 사회운동 덕분이다. 1992년 영국의 제3세계 지원 단체들인 옥스팜, 트레이드크라프트, 크리스천 에이드 등에 의해 설립된 공정무역 재단(www.fairtrade.org.uk)의 역할이 크다. 이 재단에서는 공정무역 마크를 관리하고 거리 행진, 패션쇼, 생산자 초청 간담회, 공정무역 제품 시식회 등 공정무역을 증진시키기 위한 여러 행사를 기획하고 캠페인을 벌였다.”
-이제 유럽 곳곳에서도 공정무역 제품을 쉽게 볼 수 있나.
“물론이다. 유럽(동유럽 제외)은 일반 마트에서도 공정무역 제품을 쉽게 볼 수 있다. 일반 마트에서 파는 바나나 3개 중 1개가 공정무역 바나나이다. 특히 스위스 마켓에서는 전체 판매 바나나 중 절반 이상이 공정무역 바나나다. 또 영국의 세인트베리 슈퍼마켓, 스위스의 대형마트인 쿱(coop)에서는 공정무역 바나나만을 판매하고 있다. 공정무역 제품에 대한 인식도 매우 긍정적이다. 이런 긍정적인 시각이 생긴 데는 시장(market) 역할이 컸다. 유럽 유통업체들은 가격 경쟁력이 낮은 공정무역 제품을 소비자들이 구매하고 싶도록 의도적으로 물건 가격을 싸게 책정한다. 물론 생산자에게 단가를 낮추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시장 스스로 마진을 적게 가져가는 것이다. 그래서 유럽의 공정무역 제품 가격은 일반제품보다 약간 비싸거나 거의 동일하다.”
-이윤 창출이 최대 목표인 기업들에겐 낯선 풍경이다. 사회민주주의적 성격이 강한 유럽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 아닐까.
“그런 경향도 있다. 철저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이 사회공헌 차원으로 스스로 마진을 낮추는 일은 쉽지 않다. 유럽 특히 사민주의적 성격이 강한 북유럽 국가들은 정부가 시장에 개입할 뿐 아니라 시민들 의식 자체가 상당히 ‘공동체적’이다. 여기서 공동체적이라는 것은 사회 전체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일부 개인의 이익은 희생해도 좋다는 사회적 합의를 말하는 것이다. 이런 시각을 가지고 있는 시장의 CEO들이 스스로 마진을 낮추고 공정무역 제품들을 적극적으로 들여왔다. 대대적인 홍보를 통해 소비자에게 물건을 소개했다.”
-그럼 시민 의식부터 바뀌어야 하지 않나.
“그렇다. 시장의 개입, 정부의 정책만큼이나 중요한 게 시민들의 의식이다. 공정무역 보호법이 아무리 많이 생기고 공정무역 제품이 많이 들어와도 소비자가 외면하면 소용이 없다. 나의 이익이 최우선이고 타인의 고통은 외면하는 사람이 ‘제3세계의 노동자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고 있는지’, ‘다국적 대기업의 횡포에 이들이 어떻게 희생당하고 있는지’, ‘환경은 얼마나 훼손되고 있는지’ 등을 생각할까. 이런 사람은 노동자들이 핍박받더라도, 토양이 오염되더라도 싸고 맛있는 과일을 먹는 게 최우선일 것이다. 정부 정책과 시장의 개입 그리고 시민 의식이 발 맞춰야 비로소 공정무역 시장이 확대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