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2002년부터 공정무역 거래를 시작했다. 아름다운 가게에서 공정무역 수공예품을 수입·판매한 것이 시초다. 시민단체에서 출발했지만 지금은 협동조합, 국제 개발단체, 사회적기업, 재단법인 등으로 규모가 확대됐다. 현재 한국공정무역단체 협의회(이하 KFTO)에 가입해 활동하고 있는 단체는 총 14곳이다. 쿠피협동조합이 2013년부터 4년간 연구한 공정무역 현황에 따르면, KFTO 소속 단체들의 매출액 합계는 100억원(2012년)에서 165억원(2016년)으로 4년간 65% 성장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가파른 양적 성장에 비해 질적 성장은 초라한 수준이다. 장승권 한국 성공회대 협동조합 경영학과 교수는 지난해 서울시민 200명을 대상으로 온라인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이 가운데 공정무역이 무엇인지 정확히 설명할 수 있는 응답자는 16%에 불과했다. 또한 공정무역 제품을 일주일에 1회 이상 구매해 본 경험자는 3.9%인 반면에 구매해본 경험이 없는 응답자는 30.6%에 달했다. 공정무역 제품을 구입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로는 ‘어디서 사야 하는지 몰라서’가 74.2%로 나타났고 ‘이런 제품이 있는지 몰라서’라는 답변도 39.7%에 달했다.
윤리적 소비가 피할 수 없는 사회 흐름이 되는 가운데 한국 공정무역 시장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무엇일까.
◇공정무역 패션쇼, 연주회, 시식회 등 축제로 시민교육
-시민 의식을 강조했다. 한국과 같은 환경에서 시민 의식을 어떻게 높일 수 있을까.
“초기 공정무역 활성화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영국의 옥스팜, 네덜란드의 페어 트레이드 오가니사티에 등 NGO였다. 이들은 공정무역이라는 생소한 개념을 사회운동을 통해 공론화했고, 정부와 시장을 설득해 관련 법을 만들고, 공정무역 제품을 가시화했다. 이들은 공정무역에 대한 시민의식을 높이고자 다양한 교육을 제공했다. 학교에서 배우는 딱딱한 수업이 아니다. 패션쇼, 연주회, 시식회 등 공정무역 교육은 축제 형식으로 진행된다. 지역사회의 역할도 중요하다. 중앙정부와 단체가 시민의식 개선을 다 담당할 순 없지 않나. 하지만 지역은 시민과 가까이 있고 그들의 삶에 깊숙이 스며들 수 있어 가능하다.
-지역사회가 시민 의식을 개선시킨 사례가 있나.
“대표적인 성공 케이스가 유럽의 공정무역 마을이다. 독일 456개를 비롯해 전체 공정무역 마을의 90%가 유럽에 있다. 지방정부와 공정무역단체, 학교, 지역상점, 비영리단체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참여해 공정무역에 관한 인식을 높이고, 소비를 확산하는 운동이다. 영국 랭커셔주 가스탕(Garstang)이 첫 도시다. 특히 영국 전역에서 열리는 ‘공정무역 포트 나이트(Fair trade Fortnights·이하 포트 나이트)’는 공정무역 마을의 모범 사례다. 포트 나이트는 영국 사회에 공정무역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매년 3월 초 2주 동안 열리는 행사다. 이 기간 동안 영국 전역의 공정무역 마을, 학교, 교회, 공공기관, 슈퍼마켓 등이 참여해 거리행진, 패션쇼, 연주회, 축구경기, 토론회, 생산자 초청 간담회, 공정무역 제품 시식회 등 약 1 만여 가지의 활동이 펼쳐진다. 이런 행사에 참여한 시민들은 ‘내가 공정무역 제품을 구매하면, 가난한 나라의 생산자들이 기본적인 생활을 하며 자녀를 학교에 보낼 수 있구나’라는 사실을 알고, 공정무역 제품을 구입하게 된다.”
-한국의 공정무역 시장은 날로 커지고 있다. 하지만 그에 비해 공정무역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 수준은 낮다.
“처음부터 양적, 질적 성장을 동시에 도모할 수는 없다. 공정무역 선진국인 미국과 유럽도 같은 문제를 겪었다. 소비자와 시장은 자본주의 시스템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이런 방식을 단시간에 바꾸기는 힘들다. 무엇보다 한국은 공정무역 운동이 시민 주도적이지 않다. 협동조합이나 NGO 등 특정 단체 위주로 공정무역 거래가 이루어진다. 실제 지난해 한국 공정무역 전체 매출액 166억 중 80.8억(약 48.7%)가 아이쿱 생협에서 발생했다고 들었다. 이런 방식으로는 공정무역의 질적 향상은 어렵다. 관련 법도 미비하다. 한국 사회는 그 어느 나라보다 친(親)기업적인 것 같다. 많은 부분이 거대기업 중심으로 돌아간다. 이 기업들이 마진을 포기하고 공정무역 제품을 들이기 쉽지는 않겠지만, 오히려 친(親)기업적인 특징을 잘 이용했으면 좋겠다.”
-친기업적인 특징을 잘 이용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
“기업이 적극 나서도록 시민 사회가 요구하고 정부가 자리를 만들라는 것이다. 한국의 공정무역 시장이 확대되기 위해서는 기업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유럽은 기업이 스스로 공정무역 시장에 문을 열기도 하지만, 시민 사회가 적극 요구하기도 한다. 벨기에 브뤼헤는 2008년 공정무역마을로 이름을 올렸는데, 이후 학교, 급식사업장, 상점, 시민은 물론 기업으로 이루어진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시청과 의회는 이런 사업을 조율하고 지원한다. 정부의 뒷받침과 시민 사회의 끊임없는 요구 덕분이었다. EU는 소비자 조사를 계속 하면서 소비자들의 윤리적 소비 활동을 촉구한다. 생산국의 생산자 단체 및 협동조합의 역량 강화도 재정적으로 돕는다. 유럽의 우수 사례를 공유하고 EU 기업들 사이에도 책임을 촉진시켜 공정무역에 참여하게 한다.”
-좋은 공정무역 거래 기업도 늘어나야 하는 것 같다. 아그로페어의 성장 비결은 무엇인가.
“우리는 좋은 생산자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주로 기존 생산자의 추천을 받아 신규 농장주 또는 협동조합원들을 아그로페어의 생산자로 받아들인다. 지속적인 검증은 필수다. 우리 직원들은 일년에 수십 차례 해외 농장들을 방문해 품질은 물론 노동 환경 검사를 한다. FLO도 1년에 한 번씩 농장을 검증한다. 아그로페어의 공정무역 바나나는 못생겼다. 화학 비료와 살충제를 거의 쓰지 않고 재배했기 때문이다. 품질에는 문제가 없다. 생산자들이 화학물질 없이 훌륭한 품질의 바나나를 생산하기 위해 두세 배 더 노력한 덕분이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농장 인프라를 개선하고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다. 우리는 고품질 유기농 바나나라는 이미지를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더불어 유통 비용을 줄여 일반 바나나에 뒤지지 않은 가격 경쟁력을 갖췄다. 과거에는 회사 자체의 대형 선박을 보유하고 있지 않으면 바나나를 유통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델몬트와 같은 거대 기업의 선박 일부 공간을 빌려 바나나를 수출했는데, 임대 비용은 비쌌고 유통 과정에서 바나나도 많이 상했다. 그러다 선박 전체가 아닌 컨테이너 단위로 바나나를 수출하게 되면서 유통 비용을 크게 절감해, 바나나 소비자 가격을 일반 바나나 수준으로 내릴 수 있었다.”
-우리가 공정무역 시장을 확대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빈곤, 노동 문제를 공정무역 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지 않나.
“당연하다. 하지만 공정무역의 시장 확대가 이 문제들을 세상에 알리고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무조건적인 원조는 가난을 해결할 수 없다. 가난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조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플랜테이션 농장과 다국적기업은 이 구조의 문제를 야기한다. 제3세계 국민들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그 농산물들은 다국적기업을 통해 세계로 수출된다. 이때 다국적기업의 대량생산 시스템은 아무리 일을 열심히 해도 적은 돈만 벌 수 있게 만든다. 또 환경도 파괴하여 지속적인 경제 활동도 방해한다. 공정무역은 다국적기업이 만들어 놓은 빈곤 악순환의 고리를 끊게 하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농부들에게 공정한 대가가 돌아가 자립할 수 있게 하고 나아가 지역 사회를 발전시킨다. 하나의 윤리적 소비가 한 사람을 나아가 한 마을, 한 국가를 발전시키는 셈이다. 공정무역은 지속 가능한 시장, 지속 가능한 노동, 지속 가능한 환경을 조성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