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기업, 좋은 사회 ‘비코퍼레이션(B-Corporation)’
정은성 한국비콥위원장(현대종합금속 사장) 인터뷰
CEO 명패는 없었다. 다른 직원들과 똑같은 크기의 책상만 놓여있었다. 위치는 더 열악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바로 보이는 가장 바깥쪽, 그곳이 ‘대표의 자리’라고 했다. 지난달 28일, 서울 은평구에 위치한 사회적기업 ‘에버영코리아’에서 만난 정은성 한국비콥위원장(현대종합금속 사장, 에버영코리아 대표)은 “대표 자리로 마련돼있던 공간을 회의실로 바꿨다”면서 “대표를 비롯해 에버영코리아의 모든 직원들은 똑같은 크기의 공간에서, 똑같은 책상과 의자를 사용한다”고 말했다.
인터뷰 시작부터 말문이 막혔다. 그의 독특한 이력 때문이다. 김대중 정부 시절 대통령비서실 통치사료비서관, ㈔세로토닌문화 공동대표를 지낸 그는 현재 450명의 시니어를 고용한 사회적기업 ‘에버영코리아’ 대표와 현대종합금속 사장을 맡고 있다. 그리고 최근, 또다른 직함을 하나 더 맡게 됐으니 바로 ′한국비콥위원회 위원장’이다. 영리와 비영리를 넘나들며 기업의 사회적책임과 지속가능한 비즈니스를 고민해온 그가 ′고심 끝에 맡은 역할’이라고 했다. 정은성 위원장은 “국민에게 사랑받는 기업이 오래가는 시대가 왔다”며 이야기를 하나 둘 풀어냈다.
◇ 새로운 기업을 위한 새로운 트렌드···‘비콥(B-Corp)’
최근 글로벌 기업 사이에서 비콥 인증 바람이 불고 있다. 이는 미국의 비영리단체 ‘B랩(B-LAB)’이 사회적책임을 다하는 기업에 수여하는 인증 마크로, 2007년 시작됐다. 현재 50개국에 걸쳐 2000여개 기업이 참여했고, 미국은 30개가 넘는 주에서 비콥을 법제화했다. 미국의 아이스크림 회사 벤앤제리(Ben&Jerry’s), 세계 최대의 온라인 크라우드펀딩 플랫폼 ‘킥스타터(Kickstarter)’, 친환경 의류제품으로 유명한 파타고니아(Patagonia), 국내 최대 카셰어링 기업 쏘카(Socar) 모두 비콥 인증을 받았다. 정은성 위원장은 한국에서도 이러한 비콥 운동이 일어날 수 있도록, 맨 앞에서 ‘깃발’을 들었다.
– 비콥(B-Corp)이란 무엇인가.
“한 마디로 비콥은 기업의 새로운 형태다. 여기서 ‘B’는 사회적 이득(Benefit)을 뜻하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기업의 이익(Profit)을 추구하는 것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세상에서 최고(best in the world)인 기업’에서 ‘세상을 위한 최고(best for the world)의 기업’이 되자는 것이다. 비콥은 기업을 지배구조, 임직원, 고객, 지역사회와의 연계, 환경 등 5가지 분야에 대해 평가하고, 그 결과에 따라 해당 기업을 비코퍼레이션으로 인증하는 시스템이다. 온라인 설문, 전화 인터뷰 등의 단계를 통해 180개 질문에 답하고, 80점(200점 만점) 이상이면 통과다. 비콥 인증을 받는 과정에서 기업은 내부 진단을 통해 기업의 사회적책임을 점검하고, 외부 이해관계자들에게 책임경영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며 소통하게 된다.”
– 전세계적으로 비콥 열풍이 부는 이유는 무엇인가.
“포춘(Fortune)과 포브스(Forbes)에서 비콥을 가장 주목할 만한 비즈니스 트렌드로 꼽았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을 포함한 세계적인 지도자들이 비콥에 대한 공식적인 지지와 지원 의사를 밝혔다. 지난해 5월엔 대만 총통이 비콥을 대만 기업의 표준으로 만들자는 의사를 발표한 바 있다. 브라질의 최대 화장품 회사 ‘내츄라(Natura)’가 대기업 최초로 비콥 지속 가능성 인증을 받은 데 이어, 유니레버 CEO 폴 폴만 회장이 비콥을 공식적으로 지지했다. 비콥은 자발적인 기업의 운동이다. 우리 기업이 사회를 위해 책임있는 역할을 고민하고 노력하고 있다는 일종의 ‘증표’다. 일반적으로 기업이 목표로 하던 주주 중심의 경영, 이윤의 극대화가 현재와 미래의 대중들이 원하는 모습이 아니란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익과 성과를 함께 공유·창출하고, 이해관계자를 포용하는 기업의 패러다임 전환을 원하는 전세계적인 관심과 압박이 비즈니스 트렌드를 바꾸고 있는 것이다.”
그는 삼고초려 끝에 한국비콥위원장직을 수락했다고 했다. 현재 맡고 있는 직함의 무게 때문이었다. 정 위원장이 CEO로 있는 현대종합금속과 사회적기업 에버영코리아의 직원 수는 약 2000명. 두 회사를 운영하기에도 빠듯한 상황에서 정 위원장의 마음을 움직인 건 ‘세상을 위한 최고의 기업이 돼야한다’는 비콥의 철학이었다. 그는 “비콥을 공부하면 할수록, 미래의 비즈니스를 고민하는 기업들에게 더 많이 전파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설명했다.
◇정치, 경영 넘나든 이력···지속가능경영으로 합일점 찾아
– 이력이 화려하다. 김대중 정부 시절 통치사료비서관을 했는데, 계기가 있었나.
“미국에서 공부를 하다가 향수병에 걸렸다. 미국에 간 지 7년 만에 상사병처럼 왔다. 예전부터 학자가 꿈이었는데, 한국에 돌아와보니 교수 임용이 녹록지 않았다. 우연한 기회에 지인을 통해 정책연구위원 자격으로 국회직 공무원이 됐다.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계 복귀하면서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할 때였다. 국회 일뿐만 아니라 당 정책 연구를 맡으면서 김 전 대통령과 인연을 쌓게 됐다. 대통령에 당선되던 1997년 대선 직후 새벽에 부르시곤 ‘나랑 같이 일하세’라고 말씀하시더라.” (정 위원장은 콜롬비아대 대학원에서 국제관계학 석사, 뉴욕시티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하버드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를 마친 정책 전문가다. 통치사료비서관으로 임명되기 전까지 그는 당시 김영상 대통령과 김대중 당총재의 중간 연락책을 맡았다.)
– 통치사료비서관으로 어떤 일을 했나.
“그 시절 ‘기자’라고 이해하면 된다. 대통령 옆에서 5년간 그분의 말씀을 빠짐없이 기록했다. 걸출하고 완벽에 가까운 분이셨다. 녹음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약자로 적고 퇴근 후 다시 풀어서 기록했다. 모든 정보를 절대 발설해선 안되기 때문에, 모든 자료를 디지털화해서 대통령 기록관으로 넘겼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쓴 삐뚤빼뚤한 글씨가 기록관에 남겨져있다고 생각하니 창피하기도 하다(웃음).”
– 다음 행보는 ‘기업’이었다. 비즈니스에 관심이 많았나.
“사업을 해보고 싶었다. 친구들과 함께 영어 어린이교육 프로그램을 만들고, ‘토스에듀케이션’이라는 교육 회사를 설립했다. 당시 150개 학원으로 확대될 정도로 인기였다. 2년 반 정도 경영을 하다가 내려놓고 이시형 박사님과 함께 ㈔세로토닌문화 창업을 기획했다. 세로토닌문화는 현대인의 쉼을 위한 건강힐링캠프를 진행하는 비영리법인이다. 해외로 벤치마킹하러 다니면서 명상 등 사람의 내면을 치유하는 프로그램, 사람들의 내면을 치유하는 명상 프로그램을 고민했다. 현대종합금속은 2003년 사외이사로 인연이 시작됐다. 회장님이 해외 마케팅을 맡아달라고 하셔서, 미국·인도네시아·중국을 시작으로 해외 업무를 총괄하게 됐다. 부사장, 사장을 거쳐 지난해 대표이사 직함을 달았다. 나도 회사에서 월급 받는 전문경영인이다. 그래서 월급쟁이의 애환을 잘 안다(웃음).”
현대종합금속은 매출액 6000억원에 달하는 세계적인 용접 전문 기업이다. 1400명의 직원 중 절반이 해외에서 일한다. 전세계 80여개국에 용접 재료와 장비를 수출하고 있고, 2009년에는 국내 용접업계 최초로 2억 달러 수출 탑을 수상한 바 있다.
– 교육 회사에서 제조업 기업으로, 성격이 전혀 다른 회사를 운영하면서 어려움은 없었나.
“내가 부족해서 오는 스트레스가 컸다. 생산, 원재료, 노동자 등 포괄해야하는 이슈가 너무 많았다. 금속·철강이라고 하면 다들 딱딱하고 무서운 이미지를 떠올리는데, 실제로 용접봉 쇠를 가공해서 입히는 작업은 굉장히 세밀하다. 제품도 수천개에 달한다. 지금도 계속 공부하고 있다. 사장이 되고 나서 가장 처음 한 것이 전직원 일대일 코칭이었다. 개인이 변해야 조직이 변한다는게 나의 철학이기 때문이다. 부장, 과장, 대리, 사원 모두 따로 만나서 개인의 비전과 조직의 비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일대일 코칭’으로 시작했는데 거꾸로 배우는 자리였다.”
지속가능경영에 대한 고민 때문일까. 그는 최근 현대종합금속에서 새로운 비즈니스를 시작했다. 선박의 무게중심을 유지하기 위해 실어야하는 ‘평형수’를 정화하는 사업이다. 최근 국제해사기구(IMO)는 해수 및 생태오염 예방을 위해 평형수를 정화하지 않은 선박을 항구에 정박할 수 없도록 했다. 이에 앞으로 국제항해를 하는 선박은 평형수 처리장치를 의무적으로 장착해야한다. 정 위원장은 “현대중공업에서 평형수 정화 장비를 인수해서 비즈니스를 시작했는데, 현재 사업 규모에 육박할 정도로 성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가치를 담은 비즈니스에 대한 고민, 사회적기업 ‘에버영코리아’ 설립으로
정치와 기업 경영을 이어오던 그는 2013년 돌연 사회적기업을 창업했다. 단순히 돈을 버는 비즈니스가 아니라,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소셜임팩트(Social Impact)’를 고민하던 정 위원장은 “그때부터 내 시간의 3분의1을 할애해, 같은 고민을 하던 지인들과 함께 머리를 맞댔다”고 했다. 매주 화요일에 만나 회의를 하던 끝에 ‘나이 차별 없이 일할 수 있는 회사를 만들자’는데 뜻을 모았다. 시니어 일자리를 고민하던 네이버까지 동참하기에 이르렀다.
– 시니어를 위한 지속가능한 비즈니스 모델을 무엇으로 잡았나.
“그동안 네이버가 지도 거리뷰에서 개인 식별정보(얼굴, 자동차 번호)가 노출되지 않도록 모자이크(블러링) 작업을 중국에 맡겼다더라. 시니어가 할 수 있는 좋은 모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시니어 30분과 지도 블러링을 시작했는데, 너무 즐거워하셨다. 이에 네이버 쇼핑 모니터링(네이버 지식쇼핑에서 마일리지, 네이버 페이 서비스 제공 콘텐츠가 관련 법규와 운영 규칙을 위반하지 않았는지 점검), 네이버 이미지·동영상 등 콘텐츠 모니터링(네이버에서 생성된 콘텐츠가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등에 관한 법률이나 청소년보호법·저작권법 등에 위배되지 않았는지 점검) 등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직원 수가 계속 늘어났다.”
– 창업 4년만에 시니어 450명을 고용했다. 비결이 무엇인가.
“비콥 정신과 맥이 닿아있는 것 같은데, 직원 등 이해관계자 중심의 기업이 되고자 노력한 덕분이 아닐까. 매일 경영지원실 직원들과 같은 예산 안에서도 직원들에게 만족감과 보람을 줄 수 있는 정책이 무엇일까 고민한다. 에버영코리아 직원의 평균 나이가 55세다. 일주일에 2번 꼴로 환갑을 맞이한 분들이 계시다. 손주 탄생, 형제상(喪)을 챙기는 몇 안되는 회사에 속한다. 직원 건강이 기업 경영의 핵심이 됐다. 처음엔 휘트니스센터 이용권을 지원해드렸다가 올해부터 안과검진으로 바꿨다. 모니터를 자주 보는 업무라 눈이 약해지시더라. 그래서 요즘 개인적으로 눈 건강에 대한 연구도 시작했다(웃음).”
에버영코리아에는 매일 한 시간씩 ‘눈 운동’ 시간이 있다. 컴퓨터를 하면서 굳어진 어깨와 피로해진 눈을 풀어주는 체조를 개발해, 한 시간마다 음악을 틀어준다. 스피커를 통해 성우가 직접 녹음한 체조 안내 해설까지 나온다. 지난해부터는 사회공헌도 시작했다. 시니어 대상 스마트폰 교육, 초등학생 대상 코딩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직원 5~6명이 한 반을 맡아 꼼꼼하게 지도하다보니, 학생들의 만족도도 굉장히 높다. 글로벌 사회공헌도 진행한다. 에버영코리아 직원 1명과 대학생 1명을 매칭해 필리핀 아동 및 교사들에게 코딩 교육을 진행하고 있는 것. 올해는 필리핀 5개 지역으로 확대, 총 10명이 함께할 계획이다.
– 기업 경영에 비콥의 가치를 담으면 어떤 점이 좋을까. 비콥에 관심을 가진 기업들에 조언을 부탁드린다.
“비콥 인증을 받으면 국제적인 네트워크가 생긴다. 글로벌 경쟁력은 물론 고객들로부터 신뢰받는 기업이 될 수 있다. 실제로 비콥 인증을 받은 사회적기업들이 글로벌 기업들과의 계약이 성사되는 등 긍정적인 사례가 많다. 비콥 기업들끼리는 정기적으로 만나면서 협력할 수 있는 네트워킹 모임도 개최된다. 향후 기업의 최대 이슈는 ‘투명성’과 ‘지배구조’가 될 것이다. 비콥을 통해 우리 기업을 진단하고, 투명하고 신뢰받는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