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충만 세이브더칠드런 국내옹호팀장 인터뷰
“1600년대 서양의 대표적인 풍속화가 프터 브뤼헐이 그린 ‘아이들의 놀이’라는 작품이 있어요. 마을 공터에 수십 명의 아이들이 나와서 어른들과 함께 노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에요. 자세히 보면 그 안에 50개도 넘는 아이들의 놀이를 발견할 수 있어요. 굴렁쇠도 굴리고, 담도 넘고, 춤도 추고요. 더 놀라운 건, 몇 백 년 전의 그림이지만 요즘 아이들의 놀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거예요. ‘놀이’라는 게 굉장히 자연스러운 본능이라는 거죠.”
제충만(31·사진) 세이브더칠드런코리아 권리옹호부 국내옹호팀장의 말이다. 햇수로만 3년. 그는 아이들의 놀이터를 되돌려주기 위해 노력해오고 있다. 세이브더칠드런코리아 내 작은 스터디에서 시작된 ‘놀이터를 지켜라’ 프로젝트는 현재 도시 놀이터 개선, 농어촌 놀이터 짓기, 잘 노는 우리 학교 만들기, 정책 개선 등 다양한 분야로 나뉘어 진행 중이다. 지난해 9월 30일, 그는 ‘놀이터 지킴이’로 활동한 586일간의 기록을 모은 ‘놀이터를 지켜라’ 라는 책을 출간했다. 그가 ‘놀이터 지킴이’를 자처하고 나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놀이터, 모든 놀이의 시작
“저를 키운 건 8할이 놀이터에요. 아이들이 항상 놀이터에서만 노는건 아니에요. 그렇지만 저는 놀이터라는 공간이 아이들이 모여 놀이를 시작하는 곳이라고 생각해요. 저만 해도 어렸을 때 친구들과 몰려다니면서 ‘영역’을 넓혀 나갔는데, 그 시작점은 늘 놀이터였어요. 아이들이 ‘자신들의 공간’이라고 느끼고 모여드는 공간인 거죠.”
어린 시절 맞벌이를 하는 부모 밑에서 자랐지만 그는 외로움을 잘 느끼지 않았다. 놀이터에 가면 언제나 동네 형, 누나,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매일같이 골목을 누비고 논두렁을 뛰어 다녔다. 어린 시절, 제씨의 일기는 언제나 ‘참 재미있었다’로 끝났다.
불과 몇 십 년이 흐른 지금 이런 모습은 흔하지 않다. 현대의 어린이들에게는 놀 여유가 없다. 학교 쉬는 시간에는 밀린 학원 숙제를 하는 아이가 다수다. 학교에서 학원으로 이어지는 사이클 틈에 짬짬이 시간이 비더라도 놀만한 공간이 마땅하지 않다. 제씨는 “맘껏 놀지 못하는 아이들의 현실에 대해서 늘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그가 2014년 세이브더칠드런 내에서 ‘UNCR31스터디’를 꾸린 이유다. 스터디의 이름은 아이들의 놀 권리를 규정한 ‘유엔아동권리협약 31조’에서 따왔다.
“놀 공간이 문제가 아니라 ‘놀 시간이 없다’는 게 문제라는 지적도 많았어요. 그런데 노는 시간이 부족한 건 거대한 대한민국 사회 구조와도 맞물려 있고, 당장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어렵잖아요. 이런 상황에서 잘 만들어진 놀이 공간이 많이 만들어지면 그만큼 놀이가 늘어날 것이라고 봤어요. 아이들은 땅 파고 긁으면서 놀기도 하고, 기구를 활용하기도 하고, 지옥 탈출 놀이나 딱지치기 같이 놀이를 만들어가면서 공간만 있으면 신나게 놀아요. 부모님들 입장에서도 안전한 놀이공간이 있으면 더 안심하고 아이들을 보낼 수 있을 테고요.”
9개월 간, 그는 5명의 스터디 원들과 함께 외국의 사례를 찾아보기도 하고 아이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상당수의 아이들은 놀이터를 자신에게 ‘중요한 곳’ 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세이브더칠드런과 서울대 사회복지연구소가 함께 진행한 <한국 아동의 삶의 질에 관한 종합 지수 연구>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저만 하더라도 제가 뛰어다니던 공간들이 모두 제 동네였어요. 그러나 요즘 아이들에게는 ‘놀이터’를 제외하고서는 마땅히 ‘내 구역’이라고 할 만한 공간이 없죠.” 제씨는 스터디를 통해서 아이들의 놀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놀이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다.
2014년 5월, 한국을 방문한 세계적인 놀이터 디자이너 귄터 벨치히(Günter Beltzig) 선생의 이야기가 관심을 행동으로 옮기는 계기가 됐다. 세월호 참사가 벌어진 무렵이었다. 귄터 선생은 일방적 지시에 익숙해진 한국 아이들에 우려를 표했다. 한국에는 ‘얌전히 있어라’, ‘뛰지 말아라’, ‘들어가지 마시오’와 같은 금지 사항이 너무 많다는 것. ‘아이들이 자유로운 환경에서 맘껏 뛰어 놀고, 새로운 놀이에 도하며 자랐다면 세월호 참사가 지금과는 달랐을까?’ 이런 고민은 제씨가 본격적으로 놀이전문가들을 만나 ‘좋은 놀이터’를 기획하도록 이끌었다. 야외 놀이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서울 그린트러스트, 편해문 놀이 활동가 등이 이 때 만난 인연들이다.
◇놀이 공간의 새로운 판을 짜다
지난 1월, 제씨는 그린트러스트의 소개로 서울시 공원협력팀과 연이 닿았다. 서울시 중랑구에 위치한 세화놀이터와 상봉놀이터, 두 놀이터를 수리하기로 됐다. ‘다음 세대의 건강하고 창의적인 성장’을 미션으로 하는 벤처 기부 펀드 ‘C프로그램’, 자 경험 디자인 회사 ‘pxd’, 게임·놀이 기획사 ‘놀공발전소’와 함께 손을 잡았다. ‘아이들에게 놀이를 돌려주기 위해’ NGO와 지자체, 기업이 머리를 맞댄 것. 그는 이 과정에서 “지역 어른들과 아이들을 수리 과정에 참여시키는 걸 강조했다’”고 했다. 아이들의 의견을 반영하기 위해 3개월에 걸친 놀이운영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지역 놀이터 활동가를 양성을 위해서 주민 설명회와 어른들을 대상으로 한 ‘디자인 워크숍도 진행했다. 놀이터가 어떤 공간인지 지역 주민들이 알아야 아이들의 놀이를 지켜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놀이터가 만드는 것도, 관리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망가지는 건 순식간이에요. 저희가 놀이터를 탐방 다니다 보면,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뛰어 노는 데 ‘시끄럽다’며 뭐라고 하시는 분들도 계세요. 그래서 저희는 계속해서 지역 주민들에게 이게 어떤 공간인지 이야기하고, ‘아이들에게도 놀이터에서 놀던 추억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니냐’며 저희 편으로 끌어들여요.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아이들의 놀이를 지켜주려는 어른들도 생겨야 놀이터를 지킬 수 있더라고요.”
작년 한 해, 6개월에 걸쳐 새롭게 태어난 놀이터. 폐쇄 위기에 놓였던 두 놀이터가 아이들이 찾아오는 아지트로 거듭났다.
“한번은 개조 공사 마친 뒤에 세화 놀이터에 찾아갔는데, 자전거들이 쫙 세워져 있더라고요. 무슨 일인가 했더니 세화 놀이터 근처에 사는 아이들이 학교 친구들에게 ‘우리 동네에 재미있는 놀이터 생겼다’면서 다 불러모은 거예요. 세화 놀이터가 초등학교에서 좀 떨어져있다 보니 멀리 사는 아이들이 자전거 타고 몰려온 거죠.”
2015년 9월에는 ‘세화·상봉 놀이터’ 백일잔치도 열렸다. 그는 놀이터 활동가로 변모한 지역 주민들을 발견했다. “진현이랑 같이 술래잡기할래?” 라고 적힌 손수 만든 포스터에서부터 직접 붙인 발자국 모양 스티커, 입구에서부터 늘어선 각종 놀이도구까지, 지역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준비한 것들이었다.
작은 변화가 아동의 기본적인 권리를 지키는 발판이 될 것이라는 믿음. 그가 ‘놀이터를 지켜라’를 쓰게 된 이유다. 책의 생명력만큼이나 아동의 놀 권리에 대한 문제의식도 길게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요즘 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이 아이들 잘 못 놀게 해요. 다치거나 시끄럽다는 여러 이유에서죠. 아이들도 학원 숙제가 너무 많다 보니 ‘놀 시간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정말 많이 해요. 노는 건 아이들의 당연한 권리예요. 저희만 해도 어렸을 때 정말 신나게 놀았잖아요. 그게 큰 자산이고요. 독자 분들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면서, ‘아이들은 놀아야 한다’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관심을 가지셨으면 좋겠어요. ‘놀이터를 지켜라’ 프로젝트는 계속 이어질 겁니다.”
문현순 더나은미래 청년기자(청세담 6기)
놀이터를 지켜라(NGO, 지자체, 건축가, 기업, 마을 공동체가 함께한 놀이터 개선 프로젝트 586일의 기록)|제충만 지음|푸른숲 |368쪽|2만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