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욱 기자, 네팔 ‘엄홍길휴먼스쿨’ 동행 취재
7년전 “산과 나누며 살겠다” 재단 출범
에베레스트 산자락 해발 4060m에 첫 학교
이후 11개 설립… 신세계·롯데 등 후원
“이제 교사 트레이닝 등도 진행할 계획”
에베레스트부터 로체샤르까지 등반 후
그 산자락에 16개의 학교 짓겠다 다짐 “
빵·옷 아닌 교육을 주고 싶었다”
‘DMZ평화통일대장정’ 장학금 기부도
해발 8500m 절벽. 정상은 100m도 남지 않았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숨 쉴 힘조차 없었죠. 해는 벌써 떨어졌는데, 더 오를 수도 내려갈 수도 없었어요. ‘나도 여기서 끝이구나’ 싶었죠.” 지난 2000년 봄, 히말라야 산맥의 ‘칸첸중가(Kanchenjunga·8586m)’ 정상에 도전했던 엄홍길(53·엄홍길휴먼재단 상임이사) 산악대장의 회상이다. 그날 엄 대장은 로프에만 의지한 채 영하 30도가 넘는 절벽에 밤새 매달려 있었다. 북한산 백운대(850m)만 올라가도 몇 시간만 있으면 저체온증이 온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날은 8500m 상공에 바람 한 점이 없었다. 비행기가 오가는 고도가 ‘무풍지대’라니…. 엄 대장은 새 아침 여명에 힘입어 다시 정상으로 향했다.
“나중에 베이스캠프에서 찍은 영상을 보니, 마치 ‘우주여행’하는 사람처럼 슬로 모션으로 꾸물거리며 기어올랐더라고요. 8000m를 일명 ‘신들의 영역’이라고 해요. 그 아래까지는 인간의 능력으로 가능하지만, 그 이상은 산의 기운이 끌어당겨 줘야 하죠. 그래서 빌고 또 빌었어요. ‘제발 나를 허락해 달라. 그러면 나도 산을 위해 헌신하며 살겠다’고 말이죠.”
세계에서 셋째로 높은 데다 워낙 오지(奧地)라 산악인들조차 꺼린다는 산, 이미 앞선 두 번의 도전에서 동료 2명을 잃으며 실패했던 마의 고지 ‘칸첸중가’는 그렇게 엄홍길 대장에게 정상을 내줬다. 엄 대장은 지난달 26일부터 7박8일 동안 그곳을 다시 찾았다.
“히말라야를 다시 만난다는 생각에 밤새 잠을 설쳤어요.” 이날 엄 대장이 찾은 쓰리머얌 학교는 네팔 동쪽 끝 타플레중(Taplejung) 지역 푸룸부 마을에 위치한 곳으로, 15년 전 자신을 허락했던 칸첸중가의 산자락이다. 수도 카트만두에서 국내선 항공기를 타고 남동쪽 바드라푸르(Bhadrapur)로, 이후 버스로 10시간, 걸어서 4시간이 걸리는 오지 중의 오지다. 학교 건물은 곳곳이 갈라져 있었다. 몇 년 전 있었던 지진의 여파다. 유치부부터 고1까지 350명이 공부하는 학교에 책걸상은 100개뿐이다. 비가 오면 새는 빗물과 소음으로 아예 수업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이 학교의 나렌드라 구릉(53) 교장은 “우리 마을에서 유일하게 중등 이상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학교지만, 산골 깊숙이 위치해 있어 책, 가구 등 모든 것이 부족하다”며 “교사조차 오기를 꺼려해서 한 교사가 3개 학년의 담임을 맡아야 할 정도”라고 했다.
“나마스떼! 싼쩌이처!(안녕하세요! 잘 있었어요!)”
지난달 29일 오후, 산속 깊이 자리한 조그만 학교에 엄홍길 대장의 인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라므로처!(좋아요!)” 엄 대장을 환영하기 위해 모인 500여명의 학생과 주민들도 목청을 높였다. 이날 엄 대장은 자신의 이름을 딴 학교 증·개축의 첫 삽을 떴다. 네팔 히말라야에 짓는 12번째 ‘엄홍길휴먼스쿨’로, 이번 푸룸부 휴먼스쿨은 롯데홈쇼핑이 후원했다. ‘산이 나를 허락한다면, 평생 산과 나누고 베풀며 살겠다’던 다짐이 실행으로 옮겨진 지 벌써 7년째다.
◇’산, 정복 아닌 동행의 상대로…’ 엄홍길휴먼재단 출범
“지인들에게 재단법인을 설립하겠다고 하니, ‘훌륭한 생각’이라며 ‘힘을 보태겠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여의치 않았어요. 재단의 인가 절차도 생각보다 어려웠고, 공간이나 인력도 필요했죠. 의지는 높고 생각은 가득한데, 막상 행동으로 옮기려니 쉽지 않았어요.”
가장 시급한 건 재단의 모체가 될 종잣돈. 뜻하지 않은 곳에서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파라다이스그룹의 파라다이스문화재단이 매년 문화·사회복지·예술 등의 분야에서 1년간 큰 업적을 남긴 인물을 시상하는데 엄홍길 대장이 2007년 특별 공로상 수상자가 된 것. 그 상금(4000만원)이 고스란히 재단에 기부됐다. 100여명의 지인도 뜻을 함께하며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이듬해 5월에 ‘엄홍길휴먼재단’이 공식 출범했고, 정확히 1년 만에 첫 번째 학교가 선정됐다. 에베레스트 산자락 팡보체 마을에 위치한 ‘팡보체휴먼스쿨’이었다. “처음 도전한 산도, 첫 번째 희생자가 나온 산도 에베레스트였어요. 1986년 당시, 결혼한 지 4개월밖에 안 된 셰르파가 정상을 눈앞에 두고 추락 사고를 당했는데, 유가족들을 만났을 때 처참한 기억이 생생했거든요. 그들에게 한 약속을 지키고 싶어 제일 먼저 달려갔죠.”
1년 만에 해발 4060m에 복층 콘크리트 구조물에 튼튼한 책걸상, 수세식 화장실에 컴퓨터실까지 갖춘 최신식 학교가 지어졌다. 말 그대로 세계 최고(最高)의 학교였다. 엄 대장은 “깊은 산 속에 자재를 끌어올리려면 예산과 시간이 두 배 넘게 든다”며 “1년이나 걸리는 대장정이지만, 덕분에 아이들에겐 희망의 공간이 생긴다”고 했다. 통상 산속 학교 하나를 증·개축하는 데 1억8000만원에서 2억5000만원 정도가 들어간다고 한다. 현재까지 기공식을 마친 학교가 12곳(완공 8곳). 대부분 초등학교인데, 특히 16번째 마지막 학교는 수도 카트만두 시내에 마련해 15개 학교의 장학생들이 도시로 진학할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할 예정이다. 박인규 엄홍길휴먼재단 네팔 지부장은 “완공된 학교는 틈틈이 찾아다니며 유지·관리·인식 개선 교육도 진행하고 있다”며 “아직은 하드웨어를 구축하는 단계지만, 이후엔 교사 트레이닝 같은 소프트웨어를 심는 사업도 진행할 계획”이라고 했다.
재단 출범 7년, 엄홍길 대장의 행보는 마치 산행과 같다. 빠르진 않지만 묵직하게 앞으로 나아간다. “정부기관이나 기업에 특별히 도움을 요청하거나 홍보에 힘을 쓰진 않아요. 그저 우리 일을 묵묵히 하니, 뜻이 있는 기업에서 먼저 제안해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재작년 100주년을 맞은 신세계조선호텔(7차 따토바니 휴먼스쿨)이나 지난해 하나금융그룹(9차 마칼루 휴먼스쿨), 올해 롯데홈쇼핑(12차 푸룸부 휴먼스쿨)이 학교 건립을 후원한 것도 그런 경우죠.” 알음알음으로 진행된 재단사업에 벌써 1680명의 일반인 정기후원자(1만~3만원)가 함께하며, 파라다이스그룹, ㈜밀레 등 공식 후원 기업도 15곳이나 된다.
“16개 학교에선 3000명 정도가 공부할 수 있을 뿐이에요. 이들이 모든 걸 다 바꿀 순 없겠죠. 하지만 이 아이들이 자신의 위치에서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20년 후 네팔은 조금 달라져 있지 않을까요?”
◇산과의 약속 갚기 위해 ‘학교’ 짓기로
1988년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Everest·8850m)를 시작으로 2007년 로체샤르(Lhotse Shar·8400m) 정상까지, 세계 최초로 8000m 이상 봉우리 16좌를 모두 정복한 산악인 엄홍길이지만, 아직도 산은 그를 설레게 한다. 엄홍길 대장은 세 살 무렵부터 산을 놀이터 삼아 자랐다. 서울의 도봉산 등산로 입구에서 장사를 하던 어머니 덕분이었다(지금도 도봉산 등산로 입구엔 ‘산악인 엄홍길의 옛 집터’가 남아 있다).
‘세계의 지붕’이라는 히말라야 산맥에 본격적으로 꽂힌 건 군 전역 후인 1985년 무렵(지구상에서 해발 8000m가 넘는 봉우리는 모두 히말라야와 그 경계인 인도·중국 국경지대에 몰려 있다). 이후 30년간 38번이나 고산 등정 길에 올랐고, 이 중 18번은 처참한 실패를 맛봤다. 두어 번의 재도전은 다반사. 1999년 안나푸르나(Annapurna·8091m) 완등은 4전5기 끝에 이뤄낸 결과였다. 이 과정에서 산은 동료 10명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했다.
“산사태, ‘낙빙'(落氷·빙벽등반 중에 얼음조각이나 덩어리가 떨어지는 현상), ‘크레바스'(Crevasse·빙하가 갈라져서 생긴 좁고 깊은 틈) 등이 눈 깜짝할 새 바로 옆에 있던 동료를 수천 길 낭떠러지 밑으로 휩쓸고 가버려요. 그런 걸 알면서도 계속 오른다는 건 그 자체로 엄청난 고통이죠.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한 걸음, 한 걸음이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에요. 알수록 두려워지는 게 바로 산입니다.”
엄 대장은 “모르는 사람들은 산의 겉만 보고 오르지만 난 그 내면의 속살이 보인다”고 했다. 산속 마을의 삶도 그 속살 중 하나였다. 산에 대한 경외감이 커질 무렵, 산꼭대기만 보던 시선이 서서히 넓어졌다. “어느 순간부터 산 아래도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사람이 보이고, 그들의 생활이 보였어요. 특히 고산지대 아이들은 평생을 가난 속에서 살고 그 가난을 대물림해야 했죠.” 산이 끝까지 나를 허락한다면, 평생 이들을 위해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생긴 것도 이 무렵이다.
엄 대장이 이들에게 주고 싶었던 것은 제대로 된 ‘배움의 터전’이었다. “일시적인 도움은 얼마든지 줄 수 있었어요. 근데 빵을 주고, 옷을 준다고 뭐가 변할까요. 정말 필요한 건 교육이라고 생각했어요. 배움이 꿈을 만들고, 변화를 준다고 믿었죠. 이를 구체화한 것이 학교였고요.”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690달러(세계 165위, 2013년 기준)에 불과한 네팔에서 교육은 우선순위 밖이다. 두르가 포리엘(51) 네팔 교육청 타플레중 지역 조사관은 “네팔에서 정부가 지원하는 국립학교의 비중은 17%에 불과한데, 이마저도 중앙정부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산골 오지가 대부분이라 학교 수준이 크게 떨어진다”며 “특히 화장실이 열악해 여학생들이 월경을 시작하게 되면 학교를 아예 포기하는 경우가 다반사”라고 했다.
엄 대장이 숱한 산행 과정에서 마주했던 산간 학교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책걸상이 부족해 흙바닥에 앉았고, 돌로 얼기설기 만든 건물은 고산지대의 칼바람에 속수무책이었다. 유리 제품은 고지대까지 끌어올리기 어렵기 때문에 유리창은 꿈도 못 꿨다. 검은색을 시멘트벽에 칠하면 칠판이, 나무 판때기에 칠하면 공책이 됐다. 푸룸부 마을에 사는 미살림부(13·쓰리머얌 중2)군은 “국어 선생님이 되고 싶은데, 학교에는 교과서 외에 볼 수 있는 책이 하나도 없다”며 아쉬워했다. 엄 대장은 “셰르파(히말라야의 등산 안내자를 이르는 말) 동료들과 얘기를 해보면 의외로 자녀를 가르치려는 의지가 강하고, 아이들 학구열도 높았다”고 말했다.
산간 학교의 열악한 환경이 눈에 들어오자, 막연한 생각이 점차 확신으로 변했다. ’16좌 완등 후 그 산자락에 있는 마을에 16개의 학교를 짓는다’는 구체적인 계획도 세워졌다. 2007년 있었던 로체샤르 등반은 그래서 더 간절했다. “네 번의 도전 만에 (16좌의) 마지막 산인 로체샤르 정상에 올랐는데, 시간을 보니 오후 6시 50분이었어요. 그 시간에 정상에 오르는 건 히말라야 등반사(史)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죠.”(해가 지면 경로를 잃기 때문에 통상 마지막 베이스캠프에서 새벽에 출발해 정상 등극을 오전 10시 정도로 맞춘다고 한다.) 설상가상 동료 한 명은 ‘설맹'(雪盲·태양이 쬐는 설원을 장시간 보고 있을 때 일어나는 안질환)에 걸려 시력까지 잃었다.
“그런데도 살아 내려왔어요. 기적이란 말로도 부족한 거죠. 산이 말하는 것 같았어요. ‘그래. 네가 그렇게 원하면 꿈을 이룰 수 있도록 해줄게’라고요.”
2007년 5월 31일, ‘로체샤르의 기적’으로 완성된 16좌 완등은 엄 대장에겐 또 다른 등반의 시작을 의미했다.
◇산과 도전의 정신, 우리 시대 청년들에게도 심고파
“2002년 에베레스트에 두 번째로 올랐어요. ‘한·일 월드컵’의 성공적인 개최를 기원하는 등반이었죠. 그때 정상에 오른 대원이 4명이었는데, 우리가 4강에 올랐잖아요. 히말라야의 기가 제대로 전해진 거죠(웃음).” 7박8일 동안 엄 대장 입에서 가장 많이 나온 단어는 ‘기(氣)’다. 파이팅 구호, 건배사, 심지어 악수를 건네면서도 ‘기’를 외친다. 엄 대장은 자신과 재단을 통해 우리 청소년들에게도 도전 정신이 전해지길 바란다. 네팔의 학교 건립 사업과 별개로, 국내에서 청소년들의 호연지기와 자기 극복력을 키우는 사업들을 진행하는 이유다. 지난 2013년부터는 매년 여름방학을 이용, ‘엄홍길 대장과 함께 걷는 DMZ평화통일대장정’도 펼치고 있다. 엄 대장과 전국 대학생들이 함께 휴전선 길 155마일(350km)을 걷는 행사로, 각자 1km를 걸을 때마다 100원씩을 적립해 6·25 참전용사 자녀 장학금 등으로 사용한다.
실제로 그의 삶 곳곳엔 산과 도전에 대한 열정이 배어 있다. 네 번째 안나푸르나 등정에서 다리가 180도로 꺾이는 부상을 입고, 의사로부터 ‘입산금지’ 명령까지 들었지만 기어코 4전5기를 이뤄내기도 했다.
“군 전역 후 네팔 카트만두로 날아와 한식당을 차렸었어요. 여기서 장사하며 돈도 벌고, 히말라야에도 맘껏 가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1년 만에 접었죠. 가게가 너무 잘되다 보니 얽매여서 산에 더 못 가더라고요. 안주하는 것도 싫었죠. 장사를 계속했으면, 아마 큰돈은 벌었을 겁니다. 하지만 산악인 엄홍길은 없었겠죠.”
지난 2일, 12차 기공식 일정의 마지막 날 아침. 일주일 넘는 강행군에 모두가 지쳐 있던 그때, 엄홍길 대장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새벽에 헬기를 타고 13차 학교 부지를 보러 히말라야로 날아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