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합노동 떠안은 영케어러…자기 삶의 주체로 서려면
진저티프로젝트 ‘티니셔티브’ 통해 돌봄 청년 문제 공론화
“동생을 안아 옮기거나 밥을 먹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어요. 하지만 언제나 동생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점이 더 힘들었죠. 어디를 가든, 미래를 계획할 때조차도요.”
지난달 28일, 서울 성수동 헤이그라운드 서울숲점에서 열린 ‘티니셔티브: 청년에게 붙인 이름표들 – 가족돌봄청년’ 포럼에서 조호근 충남대 학생은 장애가 있는 동생을 돌보며 살아온 이야기를 담백하게 풀어냈다. 이 자리에는 돌봄을 경험한 청년 당사자와 연구자, NGO, 재단, 기업 관계자 등 70여 명이 참석했다.

◇ 정의하기 힘든 이름, 보이지 않는 노동
영케어러는 장애, 중증질환, 치매 등 돌봄이 필요한 가족을 책임지는 아동·청소년 및 청년을 뜻한다. 국내에서는 ‘가족돌봄청년’으로 불리지만, 당사자의 삶을 하나의 단어로 정의하긴 어렵다. 생계와 학업, 돌봄을 동시에 떠안으며 ‘시간 빈곤’ ‘소득 빈곤’ ‘정서 빈곤’의 삼중고에 시달린다.
이들은 단지 가족을 돌보는 역할에 그치지 않는다. 돌봄이란 이름 아래 감춰진 구조적 불균형의 당사자이기도 하다. 최영준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는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돌봄을 ‘얼마나 잘 제공하느냐’에만 집중해왔다”며 “돌봄 제공자는 의무를 다하는 사람 혹은 낮은 수준의 노동자로 인식되어 왔다”고 지적했다. 그는 “영케어러에 대한 논의는 돌봄을 새롭게 바라보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진저티프로젝트는 충남노동권익센터의 ‘지역 영케어러의 복합노동 현실과 지원방안’ 연구에서 이들의 돌봄 경험을 ‘진입기–수행기–전환기’로 구분했다. 갑작스럽게 돌봄을 시작하는 ‘진입기’에는 정보와 정서적 지지가, 돌봄이 일상화되는 ‘수행기’에는 학업·노동 병행자에 대한 복지 지원이, 돌봄이 끝난 뒤 삶을 재정비하는 ‘전환기’에는 심리 회복과 진로 탐색 지원이 필요하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자신이 ‘영케어러’인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 ‘돌봄’이라는 행위를 일상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진저티프로젝트 홍승현 팀장은 “연구를 위해 지역 기반 기관과 오픈채팅방, 지인을 통해 당사자를 수소문했지만, 단 한 명을 찾는 데도 수개월이 걸렸다”며 “스스로를 영케어러라고 인정하는 일도 쉽지 않다”고 말했다.
지난해 월드비전이 1117명의 가족돌봄청소년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전체의 63.17%가 ‘가족돌봄청년’이라는 표현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응답했다.
◇ QR코드 포스터부터 팔찌 캠페인까지…“먼저, 인식부터 높이자”
인지도를 높이기 위한 민간의 노력도 이어지고 있다. 월드비전은 지난해 GS25와 협력해 전국 1만8500개 편의점에 QR코드가 삽입된 포스터를 부착했다. 편의점이 돌봄청년에게 생계와 끼니의 공간이라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황병욱 월드비전 대리는 “해당 캠페인 이후 가족돌봄청년 관련 검색량이 최저점 대비 5배 이상 증가했다”고 말했다.
한화생명은 ‘응원 버튼’을 누르면 기부가 이뤄지는 온라인 캠페인을 통해 1만여 명의 시민 참여를 이끌어냈다. 김향미 CSR전략팀 차장은 “가족돌봄청년이라는 말이 생소했지만, 진정성 있는 메시지가 참여를 이끌어냈다”고 전했다.
◇ “나를 위한 시간, 처음이었어요”… ‘공동체’가 만들어준 변화
“서울에 살면서도 서울숲에 처음 가봤어요. 또래들과 잔디밭에 앉아 이야기 나눈 그날, 처음으로 ‘나를 위한 시간’을 가져본 것 같았어요.” (오아시스크루 참여자 신유정 씨)
가족을 돌보며 살아온 청년들에게 ‘나 자신’은 늘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진저티프로젝트가 월드비전과 함께 운영한 자조모임 ‘오아시스크루’는 이들에게 삶의 중심을 자신에게로 되돌리는 첫걸음이 됐다. 전국 7개 지역에서 총 55명의 영케어러가 참여한 이 모임은 야외 활동, 레고 만들기, 그림 그리기 등을 통해 감정을 표현하고, 서로의 경험을 나누는 시간으로 채워졌다.
모임을 이끈 박선자 진저티프로젝트 팀장은 “가족을 돌보는 청년들은 일정 조정부터 체력, 기대 수준까지 모두 달라 운영이 쉽지 않았다”며 “하지만 ‘처음 기차를 타봤다’는 청년의 말에, 이 모임의 의미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진저티프로젝트는 이 자조모임을 통해 영케어러에게 필요한 세 가지 핵심 경험을 정리했다. ▲자기 인식 ▲자기 돌봄 ▲자기 주도의 가능성이다. 오아시스크루에서는 자신의 감정을 언어화하고, 좋아하는 활동을 찾고,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과정을 설계했다. 박 팀장은 “지원도 중요하지만, 존재를 인정받고 서로 연결되는 경험이 무엇보다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이번 포럼은 진저티프로젝트가 주최하고, 임팩트얼라이언스와 더나은미래가 협력했다. 이날 행사는 이례적으로 연구 조직인 진저티프로젝트가 기획부터 섭외, 운영까지 전 과정을 주도해 눈길을 끌었다. 홍주은 진저티프로젝트 대표는 “티니셔티브는 진저티프로젝트가 관찰한 사회 변화와 현장의 지식을 공유하며 새로운 인사이트를 만드는 자리”라며 “연구를 통해 얻은 지식을 더 나은 변화를 위한 출발점으로 삼고자 마련한 행사”라고 밝혔다.
오는 9월 말에는 ‘자립준비청년’을 주제로 두 번째 포럼이 열릴 예정이다.
김규리 더나은미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