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해법] 美 다자주의 이탈과 ODA 축소
한국, 다자주의 복원 위한 ‘연결국가 전략’ 고려해야
“미국이 빠진 자리를 누가 채울 것인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공적개발원조(ODA)를 대폭 축소하겠다는 입장을 밝히며, 세계 개발협력 질서에 균열이 발생하고 있다. 미국국제개발처(USAID)의 예산 83%에 달하는 사업이 중단됐고, 1만 개 넘는 NGO가 보조금 지급 중단 통보를 받은 상태다.

전문가들은 미국의 이탈이 단기 현상이 아닌 구조적 변화로 보고 있다. 이에 따라 한국이 국제 개발협력에서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와 ‘글로벌 노스(Global North)’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 트럼프의 ‘USAID 무력화’, 글로벌 보건 위협
트럼프 2기 행정부는 다자주의 협력에서 빠르게 이탈하고 있다. 임기 시작 몇 달 만에 세계보건기구(WHO), 파리기후협정, UN 기후변화 대응 기금 이사회 등에서 탈퇴했으며, 유엔 인권이사회와 팔레스타인 난민구호기구(UNRWA) 등 유엔 산하기구에서도 공식적으로 발을 뺐다.
ODA 축소는 더욱 본격적이다. 미국은 지난 10년간 전 세계 ODA의 20%, 총 3861억 달러(한화 약 571조 1200원)를 지원한 최대 공여국이다. 2023년 미국은 647억 달러(한화 약 95조7000억 원)를 공여하며 전 세계 ODA의 28%를 차지했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USAID의 5800개 다년계약과 국무부 보조금 4100건을 해지하며 44억 달러(한화 약 6조5100억원)를 절감하기로 했다. 이로 인해 1만 개가 넘는 구호단체가 보조금 중단 통보를 받았다.
USAID 예산 삭감은 젠더, 보건, 인도주의 지원 등 주요 분야에 직격탄이 될 전망이다. USAID 내부 자료에 따르면 생명·보건 분야 지원이 1년간 중단될 경우 말라리아 사망자는 최대 16만6000명까지 늘고, 결핵 발생은 28~32% 증가할 수 있다. 에볼라 등 신종 감염병 발생 건수도 최대 2만8000건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USAID 폐쇄 시도는 미국 내 제동이 걸린 상태다. 미국 연방 대법원은 최근 USAID가 체결한 약 20억 달러(한화 약 2조9600억 원) 규모의 해외 원조 계약에 대해 예산 지급을 명령했다. 그러나 이번 판결은 해고된 인력 복귀나 기관 정상화 조치는 포함하지 않았다. 이미 많은 직원이 해고된 상황이라, 설사 예산이 복원되더라도 사업 재개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 “트럼프는 지지층을 위해 ODA를 줄였다”
전문가들은 이번 ODA 축소 조치가 ‘국익’이라는 정책적 판단이 아니라 정치적 메시지에 가깝다고 분석한다. 지난 4일 경희대학교 공공대학원이 주최한 ‘미국 우선주의와 글로벌 개발협력의 위기, 한국의 대응전략과 모색’ 콘퍼런스에서 김영완 서강대 교수는 “트럼프 대통령이 국익보다 지지층을 의식해 원조를 끊으려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왔다. 미국 내 ODA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배경이라는 분석이다.
실제로 2015년 카이저 패밀리 재단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들은 연방 예산의 31%가 ODA에 쓰인다고 착각하고 있지만, 2023년 USAID 예산은 381억(한화 약 56조 3700원) 달러로 전체 예산의 1%에도 미치지 않는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은 지난 3월 보고서에서 “실제 USAID 해체가 정부 지출을 획기적으로 줄여주지는 못할 것”이라며 효과에 대해선 회의적인 시각을 내놨다.
이에 대해 봉영식 연세대 교수는 미국의 중동 전쟁 개입이 국민 정서에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 이라크 전쟁 7년, 아프가니스탄 전쟁 20년 등 9·11 이후 미국이 투입한 전쟁비용은 약 8조 달러(한화 약 1경1835조 원)에 달한다. 봉 교수는 “이런 배경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해외 퍼주기’를 줄이겠다고 말하면, 대중은 쉽게 동의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중국의 일대일로가 성과를 내지 못했고, 소프트파워도 충분히 성장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트럼프는 USAID를 축소해도 미국의 영향력이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덧붙였다.
서정건 경희대 교수는 트럼프 대통령의 과감한 정책 추진 배경으로 보수 우위의 연방 대법원 구조를 꼽았다. 현재 미 대법원은 보수 6명, 진보 3명으로 구성돼 있다. 서 교수는 “연방법원은 대통령의 행정권을 폭넓게 인정해 온 판례가 많다”며 “대법원 판결로 정책이 완전히 뒤집히기보다는, 효력 정지나 일시적 제동 수준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하지만 “트럼프가 폐지하려는 부서는 기능만 다른 곳으로 넘기고 껍데기만 남기는 방식으로 사실상 무력화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 한국, ‘미국의 빈자리’ 채울 수 있나
미국의 ODA 축소가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는 분석이 이어지는 가운데, 한국의 대응 전략에 눈길이 쏠리고 있다. 최근 미국뿐 아니라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주요 OECD 국가들도 보수화 흐름 속에서 잇따라 ODA 예산을 줄이고 있다. 영국은 ODA 비율을 국민총소득(GNI) 대비 0.5%에서 0.3%로 낮췄고, 네덜란드는 오는 2025년까지 3억 유로(한화 약 4890억 원), 2027년까지 총 24억 유로(한화 약 3조9120억 원)를 감축할 계획이다.
이처럼 국제개발협력에 공백이 커지는 상황에서, 한국이 다자주의 복원의 ‘교두보’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제안이 나온다. 김태균 서울대 교수는 “한국은 호주, 뉴질랜드 등과 함께 글로벌 사우스와 글로벌 노스를 잇는 연결고리가 될 수 있다”며 “단순 지원이 아닌, 수원국 자립을 돕는 방향으로 ODA 시스템을 설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봉영식 연세대 교수는 “미국의 ODA 인력이 대거 이탈한 지금이야말로 한국이 관련 지식과 인적 자산을 구축할 기회”라며 “한국형 ODA 모델을 구체화하고, 대중에게는 ‘국제무대에서 한국의 역할이 커지고 있다’는 메시지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미국도 중국보다는 한국이 그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정부는 2025년 ODA 예산을 역대 최대인 6조5010억 원으로 확정했다. 이는 2019년(3조2000억 원)보다 두 배 가까이 늘어난 규모로, 당초 확대 목표를 5년 앞당겨 달성한 수치다. 다자주의의 후퇴 속에서 한국이 그 빈자리를 채울 수 있을지 시험대에 오르고 있다.
채예빈 더나은미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