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김만갑 교수·굿네이버스 개발… 대한민국 적정기술제품 1호 ‘G-Saver’

추위는 물론 가족의 삶까지 데워주는 ‘적정기술’ 다섯 아이의 아버지, 푸릅돌찌(43)씨를 만나러 가는 길은 멀었다. 몽골 울란바토르시에서 가장 가난한 동네인 하일라스트 지역. 언덕 꼭대기에 위치한 그의 집까지 가는 길 내내 몇 번이고 거친 숨을 몰아 쉬며 주저앉았다. 하지만 투덜거릴 수는 없었다. 주민의 60% 이상이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살아가는 이곳에서, 아이들은 매일 이 언덕길을 오르내리며 물을 길으러 다닌다. 언덕, 언덕마다 몽골 전통 가옥인 ‘게르’와 판잣집이 가득한 모습은 1970년대 우리나라의 달동네를 떠올리게 했다. 푸릅돌찌씨는 초등학교 경비 일을 하며, 노모와 다섯 아이를 부양하고 있다. 한국에서 손님이 온다고 들뜬 푸릅돌찌씨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G-Saver 덕에 올해 아빠 노릇을 제대로 했다”며 고마워했다. ‘G-Saver’는 기온이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겨울이 1년 중 8~9개월이나 이어지는 몽골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축열 난방 장치다. 열원(熱源) 보존시간을 연장해줄 뿐만 아니라, 매연 또한 감소시키는 효과가 있다. “매년 겨울 들어가는 연료비 때문에 1년 내내 허리가 휘었어요. 연료를 안 때면 얼어 죽으니, 나무와 석탄은 어떻게든 마련해야 하죠. 그래서 빚을 질 때도 많고, 연료비 때문에 가족들 먹을 것도 장만 못 할 때가 다반사죠. 그런데 새 난방장치 덕분에 연료비가 절반으로 줄어 제가 우리 아들딸들 공책·연필·신발까지 사줬다니까요.” 푸릅돌찌씨는 그동안 아빠 노릇 제대로 못 했다며 목이 멨다. 어느새 아빠 곁으로 온 둘째 딸 체르마(14)는 “아빠가 이번에 학용품을 사 주셔서 학교 가는 게 더 좋아졌다”며 배시시 웃는다. “난로에 나무를

문화의 다양성 가르치는 필리핀 레아 선생님

“서로 다른 문화가 충돌 아닌 소통의 시작점 되도록 설득할 것” 메콩강 인접 6개국의 사회문제… 문화 예술 통해 개선 목표… 예술가 초청, 3주간 역량 교육… 문제 해결 위한 네트워크 조직·공연… “우리의 다양성을 축하하기로 해요.” 26개국에서 모인 35명의 서로 다른 종교와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에게 레아 에스팔라르도(41)씨가 웃으며 말했다. 지난 6월 24일부터 7월 3일까지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 국제이해교육원 주관으로 열린 교원 연수 과정에서다. 유네스코 평화센터에서 이뤄진 이 강의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존재하는 문화와 역사 간의 다양성을 이해하고 평화적인 대화를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서 열렸다. 레아씨는 메콩강 인접 6개 국가의 문화 예술가들을 육성하는 ‘메콩 프로젝트’의 총감독이면서 얼마 전까지는 록펠러재단 동남아시아 사무소의 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녀가 요즘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메콩 프로젝트는 메콩강에 인접한 6개의 국가(중국,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 태국 그리고 베트남)의 지역사회가 당면한 문제들을 문화 예술을 이용해 개선시켜보자는 것이다. “2002년부터 메콩강 유역의 국가들이 아시아개발은행(ADB)에 의해 경제적으로 한 권역이 되었어요. 그러면서 급속한 개발이 벌어지고, 이 개발 속에서 소수민족 간의 갈등, 정치 난민과 이주 노동자의 발생, 성의 상업화나 인신 매매 같은 문제들이 일어나고 있어요.” 레아씨는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6개 국가에서 활동하고 있는 예술가들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그녀는 1년에 한 번씩 6개 국가에서 23~28명 정도의 프로 예술가들을 초청해 3주간에 걸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예술가 자신이 해결하고자 하는 사회문제의 메시지를 공연이나 작품과 결합시키는 방법, 이 작품을 이용해 지역사회 내의 토론을 조직하는

[Cover story] [세계 Top 10 사회적 기업가를 찾아서] ④’안데스 식료품점’ 설립자 기욤 밥스트

빈곤층에 꿈을… 일자리·저렴한 식료품에 독립심까지 지금으로부터 5년 전, 이드리스 벤메라(Idris Benmerah·52)씨는 마지막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프랑스에 왔다. ‘프랑스 드림(France Dream)’을 품고 이민 온 수많은 알제리인 중 하나였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그는 13살 때 아버지가 허리를 다쳐 일을 그만두신 후로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농사며 공사장 일이며 손에 닿는 일은 다 했다. “어른이 되어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아 가정을 이루었지만, 도무지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어요. 오히려 부양해야 할 가족만 늘어난 셈이죠. 우리 아이들에게 이 가난을 물려줄 수는 없었습니다.” 벤메라씨는 그렇게 프랑스로 건너갈 결심을 하고 2005년 홀로 지중해를 건넜다. 큰 꿈을 품고 프랑스에 왔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언어도 통하지 않고 아는 사람도 한 명 없으니 일자리를 구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직장도 집도 구하지 못한 벤메라씨는 고향의 가족에게 안부 전화를 거는 것조차 마음이 불편했다. 수개월 그렇게 방황하던 중, 그는 구직상담소의 도움으로 안데스(ANDES:Association Nationale De Développement des Epiceries Solidaires)라는 곳을 알게 됐다. 빈곤층 대상의 식료품점인 이곳에서 가난한 ‘고객’들은 시중가의 10~20%에 해당하는 저렴한 가격으로 물건을 구매한다. 벤메라씨는 총 14개월 동안 이 회사의 인턴으로 일하며, 채소와 과일을 나르고 손으로 불량품을 골라내고 각 식료품점으로 갈 상품을 포장하고 배송했다. 몇 년이 흐른 지금, 그는 안데스 중앙물류센터에서 배달과 인턴 교육을 담당하는 정규 직원이 됐다. 알제리에 남아 있던 가족도 드디어 프랑스로 데려올 수 있었다. “두 딸, 두 아들에게 제 어린 시절과는 다른

“기다리는 분들 있어 행복… 이런 게 살아 있다는 느낌이구나”

나눔 실천하는 이발사 아저씨 매달 마지막 주 수요일이 되면 양천장애인종합복지관은 아침부터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평상시 복지관에 얼굴을 잘 비추지 않던 사람들까지 지하 2층에 마련된 간이 이발소 앞을 서성거린다. 조규동씨가 익숙하게 간이 철제 의자에 앉자 조병헌(63세)씨가 이발 가운을 두르고 가위질을 시작했다. 조병헌씨가 이곳에서 이발 봉사를 한 것은 3년째. 규동씨는 “아침 10시부터 어두워지도록 하루 종일 머리를 깎는데도 매번 허투루 하는 법이 없다”고 했다. 조병헌씨가 이발 봉사를 시작한 것은 30년째이다. 이곳을 포함, 이발소가 쉬는 매주 수요일마다 여러 복지기관을 찾아다니며 봉사를 한다. 한 번 갈 때마다 보통 50명 정도의 ‘단골’이 눈 빠지게 기다린다. 사람들이 몰려 점심도 국에 만 밥만 꿀떡 넘기고 다시 가위를 잡는다. 6남매 중 장남인 조씨는 18살에 혼자 상경해 이발 기술을 배웠다. 32살에 결혼하고 집과 직장이 자리를 잡아 갈 무렵 어머니와 아버지가 1년 새 모두 돌아가셨다. 그가 이제 막 부모님께 따뜻한 밥 한 그릇 올릴 수 있겠구나, 마음먹은 찰나였다. 고향인 홍천에서 아버님 상을 치르고 서울에 올라오는 길, 만나는 어르신들이 모두 아버지처럼 보였다. 노인정 봉사를 처음 시작한 것도 부모님을 제대로 모시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노인정이 재개발로 철거될 때까지 자원봉사를 나갔어요. 어려운 형편의 어르신들을 만나면서 더 나이가 들면 아예 조그만 복지시설을 마련해 오갈 데 없는 분 20명 정도를 모시고 살아야겠다는 꿈도 생겼습니다.” 조씨는 이 꿈을 이루기 위해 2002년부터 3년 동안은 아예 가게 문을 닫고 명지대를

“연봉 절반 줄었지만 내 열정, 사람 위해 쓸 거예요”

“내가 마음 먹는 만큼 세상이 변하겠구나…” 영리에서 비영리로 옮긴 사람들 “비영리의 사람 중심 마인드와 영리의 효율성이 합쳐지면 엄청난 변화 가져올 것” 국제 구호단체인 월드비전은 2010년 공채를 진행하면서 ‘세상 변했다’는 것을 실감했다. 대기업 근무자, 해외 MBA 출신, 고연봉의 쟁쟁한 사람들이 다수 지원한 것이다. “좀 더 보람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다음세대재단 역시 최근 프로젝트 담당자를 채용하는 과정에서 같은 경험을 했다. 방대욱 총괄실장은 “얼마 전만 해도 마음에 딱 맞는 사람을 찾기가 어려웠는데, 올해는 실력과 열정을 모두 갖춘 지원자가 많아 누구를 뽑아야할지 고민이 많았다”고 말했다. 이처럼 ‘쟁쟁한’경력을 가진 사람들이 비영리로 옮기는 이유는 뭘까. 그 궁금즘을 풀기 위해 최근 1~2년 새 영리 부문에서 국제구호 비영리 단체로 ‘이적’한 4명의 전문가들을 만나봤다. 한국컴패션의 지경영 홍보팀장(39·LG전자 근무), 유니세프한국위원회 채정아 미디어팀장(36·MTV 근무), 월드비전 길연수 해외사업본부과장(33·인천국제공항공사 근무), 굿피플 김기원 해외사업팀 주임(29·삼성전자 근무)은 만나자마자 비영리의 ‘경쟁력’에 대해 얘기를 풀어놨다. “비영리 조직의 가장 큰 장점은 ‘사람 중심’의 일 진행에 있는 것 같아요. 한 명이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 아주 크고 마케팅과 커뮤니케이션, 프로그램 운영까지 본인이 마음만 먹으면 다양한 일을 할 수 있거든요.”기원씨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삼성전자에서 근무할 때는 모든 사람이 딱 자기 분야의 일만 했어요. 저는 엔지니어 출신이라 제품 개발을 맡으면 끝까지 그 일만 해요. 그 제품을 어떻게 하면 더 잘 팔수 있을까 같은 마케팅 아이디어는 낼 엄두도 못

‘공감의 뿌리’ 프로그램 개발자 메리 고든

“아이들에게 다른 사람의 마음 헤아리는 ‘공감’ 알려주고 싶어” 캐나다에 사는 9살, 데이비드는 자폐아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친구들의 생일 파티에 초대된 적이 없다. 반 아이들에게 데이비드는 좀 이상한 아이, 함께 놀기에는 꺼려지는 아이였다. 어느 날, 데이비드 교실에 아기와 아기 엄마, ‘공감의 뿌리’ 전문 강사가 찾아왔다. ‘공감의 뿌리’는 유치원·초등학교 아이들을 대상으로 1년간 아기의 성장과 부모와의 소통을 경험하며 ‘공감’역량을 키우는 프로그램이다. 이들은 친구 사이엔 따돌리면 안 된다는 교훈적인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저 아기의 성격, 감정, 아기와 엄마의 관계에 대해 함께 느끼고 나누었을 뿐이다. 그러면서 반 아이들은 조금씩 느끼게 됐다. 따돌림을 당하면 얼마나 괴롭고 슬플지를. 그 후 한 해 동안 데이비드는 생일 파티에 세 번 초대됐다. 이 ‘공감의 뿌리’라는 프로그램을 만든 사람은 메리 고든이다. 1996년 개발, 2000년 교육 재단을 만들었다. 그녀는 2002년 세계적인 사회적 기업가에게 주어지는 ‘아쇼카 펠로(Ashoka Fellow)’로 선정됐고, 2008년에는 아쇼카의 ‘체인지메이커 상(Changemakers Award)’도 받았다. ‘공감의 전문가’답게 직접 만나 본 메리 고든은 부드럽고 온화한 모습이었다. 목소리에도 따뜻함이 넘쳤다. “유치원 교사로 처음 교실에 들어섰던 때가 생각납니다.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주겠다는 열정이 넘쳤던 때죠. 그런데 처음 교실에 들어선 날 모든 열정이 무너졌어요. 불과 대여섯 살인 아이들 사이에서도 어떤 아이는 인기 있는 스타가 되고, 어떤 아이는 패자로 낙인 찍혀 따돌림을 당해요.” 그녀는 그때부터 ‘공감의 뿌리’ 프로그램을 구상했다고 한다. “아이들에게 자신의 감정과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고, 다른

“기업의 사회공헌… 부가적 선택 아닌 기본적 마음가짐 돼야”

다이애나 로버트슨 교수 인터뷰 “지금의 10~20대가 기업의 활동을 크게 바꾸어 놓을 거라고 믿습니다.” 세계적인 경영전문대학원(MBA) 와튼스쿨(펜실베니아대 경영대학원)의 다이애나 로버트슨 윤리경영 교수는 자신있게 말했다. 예전의 와튼 학생들이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을 것인가에 관심이 있었다면, 지금의 아이들은 어떻게 하면 더 가치 있게 살 것인가를 고민한다고 말이다. 와튼 스쿨은 올해 6개의 CSR(기업의 사회적 책임) 관련 과목을 개설했다. 모두 “학생들이 원해서”였다. 여름 방학이면 골드만삭스, 맥킨지 등에서 인턴십을 하는 것을 당연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상당수의 학생들이, 요즘엔 사회적 기업이나 비영리 재단에서 모금 계획을 짜고 경영 컨설팅 연습을 한다. 세계적인 MBA를 졸업한 학생들은 미국 내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로 성장한다. 어릴 적부터 나눔과 봉사를 몸에 익히며 커 온 아이들은 기업 문화까지도 바꿀 태세이다. “지난 30년간 학계는 CSR을 잘하는 기업이 성과도 좋다는 연구 결과를 끊임 없이 발표해 왔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이런 ‘실증적’ 결과조차 인정하지 않으려는 학자들이 있지요. 특히 재무 쪽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변하고 있고 대세는 거스를 수 없습니다.” 지난해 미국 하버드 경영대학원을 졸업한 학생 800여명 중 20%가 일종의 ‘윤리 서약’에 서명했다. 이 서약은 ‘관리자로서의 나의 목적은 더 큰 선(the greater good)에 봉사하는 것’이라는 문구로 시작한다. 컬럼비아대 경영대학원 학생들도 교수와 학생이 합의해 만든 윤리 규범에 의무적으로 서약한다. 최근 월스트리트 발(發) 전 세계 금융위기를 겪은 학생들은, 정직과 신용, 성실 같은

[세계 Top 10 사회적 기업가를 찾아서] ③ ‘KIVA’ 창업자 맷 플래너리

타인의 삶을 바꾸는 나눔 빛이 되는 대출 5년간 가난한 이들에게 1600억원 지원 2005년부터 52개국 35만명 도와 현지 돌아다니며 제안·타당성 검토 모금기간 한계선 정해 희소성 심어 1998년 5월 6일 아프리카 시에라리온 북쪽에 위치한 콘뎀바야 마을에 혁명군(RUF)이 들이닥쳤다. 이날 혁명군은 눈에 띄는 대로 마을 젊은이들의 손을 잘랐다. 적에게 협조했다는 이유였다. 당시 18살이었던 옌쿠 세새이(Yenku Sesay·30)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아버지는 피투성이가 된 옌쿠를 오토바이에 태워 병원이 있는 수도로 3일 밤낮을 달렸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손을 되살릴 수는 없었다. 그 후 옌쿠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세계 최빈국 중 하나인 시에라리온에서 손이 없는 옌쿠가 얻을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 거리로 나와 구걸을 시작했다. 그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온 것은 2006년, 사회적 기업 키바(KIVA)의 현지 파트너인 살롱소액금융신용(Salone Microfinance Trust·SMT)을 만나면서였다. SMT는 긴 시간의 면접과 심사를 통해 옌쿠의 잠재력과 자립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높이 사 30만레온(100달러에 해당)을 빌려주었다. 옌쿠는 작은 구멍가게를 열어 과자, 건포도 등의 마른 과일을 팔았다. 2년 만에 옌쿠는 자신의 대출금을 모두 갚았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발생한 수익을 재투자하여 다양한 식료품, 의류, 신발 등을 파는 가게로 사업을 확장했다. 옌쿠처럼 키바를 통해 지금까지 인생 역전을 이룬 사람은 52개국, 35만명이 넘는다. 키바는 세계 최초로 개인 대 개인(P2P) 방식의 마이크로크레디트(microcredit, 소액금융) 사업을 온라인으로 펼치는 사회적 기업이다. 인터넷을 통해 빈곤의 굴레를 벗어나 자립하려는 사람들과 자신의 작은 도움으로 누군가의 삶을 바꾸는

잠깐의 귀찮음이 이만큼 지구를 살린다는 놀라운 사실!

신혼부부, 지구 살리기 신혼을 시작하다 자전거 출퇴근·이면지 쓰기… 알지만 안했던 ‘그린 행동’ 실천 옮겨 지난 5일은 환경의 날이었다. 기후 변화로 인한 환경 문제의 해결을 미뤄둘 수 없다는 인식이 커진 요즘, 어떻게 하면 지구 살리기에 동참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착한’ 사람들이 늘고 있다. 조선일보 공익섹션 ‘더 나은 미래’는 이런 사람들의 참여를 늘리기 위한 가장 간단한 방법을 찾아봤다. 지난해 10월 결혼한 임동준(32), 김혜원(29) 부부가 이 고민에 동참했다. 이 부부는 IT 기업인 시스코(Cisco)의 ‘백만 개의 그린행동’ 홈페이지를 통해 탄소 배출을 줄일 수 있는 행동의 노하우를 참고했다. 편집자주 #1 5월 23일 저녁 7시, 신사동의 한 카페에서 막 퇴근한 부부를 만났다. 임동준씨는 ‘탐스슈즈’라는 신발을 수입해 판매하는 사업가다. 이 신발 회사는 손님이 신발 한 켤레를 사면 제3세계의 어린이에게 신발 한 켤레를 기부하는 ‘착한 소비’ 전략으로 올해 국내에서만 5만 켤레 이상의 신발을 팔았다. 부인 김혜원씨는 케이블 TV의 방송작가다. ‘지구 살리기’라는 거창한 주제 앞에 동준씨는 “남의 얘기 같다”고 했다. “탄소 배출이라는 말 자체가 너무 먼 얘기 같잖아요.” 남편의 말에 혜원씨는 말했다. “그건 좀 무책임한 생각인데. 요즘 환경 문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교육과 강제를 통해서라도 탄소 줄이기를 해야 한다고.” 눈이 가늘어졌다. 신혼부부는 ‘그린 행동’의 목록을 펼쳐두고 앞으로 1주일간 해야 할 행동에 대해 토론을 시작했다. 혜원씨는 “이미 실천하고 있는 것들도 있고, 생각보다 어렵지 않을 것 같다”며 활짝

[Cover story] 아프리카서 희망농사 짓는 이상훈·이송희 부부

지치지 않는 아프리카 봉사”말라리아도 우릴 못 막아요” 이상훈(43), 이송희(37) 부부는 결혼생활 15년 중 9년을 아프리카에서 보냈다. 세 아이 중 두 딸도 아프리카 케냐에서 태어났다. 말라리아와 풍토병에 시달리며 16년째 긴급 구호와 지역 사회 개발에 헌신하고 있는 이 부부는, 이달 말 아이 셋을 데리고 다시 아프리카 르완다로 떠난다. ‘청년’ 이상훈과 ‘젊은 아가씨’ 이송희의 첫 만남이 있었던 바로 그 장소. 200만명이 넘는 르완다 난민촌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한 그곳에서 ‘희망 농사’를 지을 예정이다. 운명은, 소설보다 더 극적이다. 이상훈씨가 르완다에 첫발을 내디딘 건 1994년이다. 종족 분쟁으로 대학살을 피해 수백만 명의 르완다 국민들이 난민이 된 상태였다. 극심한 식량부족과 콜레라 등 전염병으로 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다. 신문에 난 ‘기아대책 봉사단’ 광고를 보고 지원한 상훈씨는, 겨우 3개월간의 교육을 마치고 르완다에 파견됐다. 의사 2명, 간호사 5명으로 이뤄진 팀과 함께 난민들을 대상으로 한 의료 봉사를 시작했다. 밀어닥치는 난민들로 의료팀은 하루 종일 치료와 수술로 전쟁을 치렀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천막으로 돌아오면, 또 다른 ‘먹는’ 전쟁이 벌어지곤 했다. “모두 힘들고 피곤하니 밥 당번 때문에 싸우기도 많이 했습니다. 누가 밥을 할거냐, 김치는 왜 없냐며 매일 큰소리가 났지요.” 상훈씨는 젊고 철없던 그 시절이 떠오르는지 싱긋 웃었다. “이대로는 의료 봉사를 제대로 진행하기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인근 국가들의 봉사단원들에게 SOS를 보냈지요. 다행히 케냐 나이로비에서 도와주러 오겠다는 연락이 왔어요.” 반가운 마음에 상훈씨는 공항까지 달려나갔다. 당연히 40~50대

백광우 교수 인터뷰_”매월 300~400명에 무료 봉사… 같은 길 걷는 후배 기다려”

2002년 개인 병원 정리 후 장애인 돕는 제자 키우고자… 아주대학병원 교수직 맡아 “봉사를 한 지 10년이 되던 해까지는 저도 거만했어요. 아픈 사람을 무료로 치료해 주니까요. 20년이 넘으니까 비로소 이제 내 일을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30년이 되자 저와 같은 길을 걷는 후배들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습니다.” 매월 평균 300~400명, 31년간 17만건의 무료 치과 진료. 아주대 치의학과 백광우 교수(58)의 지난 30년간 봉사 내역이다. 백 교수는 1979년 서울대 치의학과를 졸업하고 의사자격증을 따자마자 서울 시립 아동보호소(현재 꿈나무 마을)의 고아들을 대상으로 무료 치과 진료를 시작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는 해외 봉사로 눈을 돌려 매년 3번씩 자비를 들여 마리아수녀회가 운영하는 필리핀의 어린이집 4곳을 돌며 무료 진료를 해 왔다. 한 번 갈 때마다 그는 약 3000명의 아이들을 돌보고 돌아온다. 2008년부터는 매주 목요일마다 안양소년원을 찾아가 진료를 하고, 2009년부터는 서울시립영보자애원의 여성 장애인도 진료해 오고 있다. 백 교수가 매월 300~400건의 무료 진료를 소화하면서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치료의 질이다. 그는 치과병원과 동등한 수준의 장비가 갖추어지기 전에는 진료를 하지 않는다. 자비를 들여 필리핀 어린이집 4곳과 안양소년원, 꿈나무 마을에 대학치과병원에 버금가는 진료 장비를 구입해 기증한 것도 나름대로의 원칙 때문이다. “누구나 인간적인 치료를 받고 싶잖아요. 몇명을 치료해 주었느냐 보다 적절한 치료를 해 주었느냐 못해 주었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백 교수가 처음부터 전공을 치과로 정하고 봉사 활동을 시작한 건 아니었다. 서울 공대에 지원하려고 입학서류를 들고

측은한 맘에 시작한 도움… 대표 사회 공헌으로

국민연금공단 사회공헌 ‘저소득층 연금 지원’ 국민연금공단 이경욱(38)씨가 박수미(51·가명)씨를 만난 것은 10년 전이다. 박씨는 남편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후 노후를 위해 들었던 연금 가입을 취소하기 위해 공단 포항지사에서 근무하던 이씨를 찾아왔다. 박씨는 “남편이 죽고 난 후 불행이 끊이질 않았다”며 “물혹으로 자궁적출 수술을 받았고, 그 후 숨쉬기 힘들 정도로 건강이 나빠져 일자리도 잃었다”고 울먹였다. 기초생활수급비 21만원으로 초등학교와 유치원을 다니는 두 남매를 키워야 했던 박씨에게 연금 가입은 사치처럼 보였다. 하지만 연금 가입을 포기한 후에도 박씨의 연금 보험료는 매달 납부됐다. 1만9800원씩 내던 보험료도 오히려 월 4만원으로 늘었다. 박씨를 상담했던 공단의 이씨가 대신 보험료를 납부해줬던 것이다. 이씨는 “동네 수퍼 배달을 해 주고 돈 대신 과일을 받아와 어린 아이들을 먹인다는 박씨 말에 울컥했다”고 했다. 이씨는 2009년까지 꼬박 9년 동안 박씨의 연금을 대신 납부했다. 이씨의 당시 월급은 67만원. 빠듯한 월급으로 허리띠를 졸라매는 아내가 속상해할까 봐 박씨의 연금 통장을 몰래 만들어 관리했다. 이씨 덕에 국민연금 최소 의무 납부 기간인 10년을 채운 박씨는 만 60세부터 매달 30만원씩 연금을 받을 수 있다. 박씨는 “형편대로 살겠다고 몇 번씩 얘기했지만 어려워 말라며 계속 도와줬다”고 했다. “친척도 이렇게 도와주지는 못할 거예요.” 목소리가 떨렸다. 1995년부터 국민연금공단이 본격적으로 연금 가입을 유치하면서 이씨와 같은 직원이 각 지사 별로 생겨났다. 이씨처럼 저소득층 연금 가입자와 상담하면서 처지를 딱하게 여기고 도와주기 시작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전주지사의 한 직원은 5명의 연금

제262호 창간 14주년 특집

지속가능한 공익 생태계와 함께 걸어온 1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