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돈 한줌 쥐여주기보다, 자신의 지역 지켜낼 ‘사람’에 집중”

이성민·김창숙 캄보디아 기아봉사단 요즘이 캄보디아의 1년 중 가장 시원한 때라고 했는데, 기온은 여전히 30도를 넘었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3시간여를 포장도 안 된 붉은 흙길을 달렸다. 차창을 통해 들어오는 뜨거운 햇빛 속에 꼼짝없이 앉아 있다 보니, 온몸은 땀으로 젖고 속은 메슥거렸다. 수도 프놈펜에서 남서쪽으로 120㎞ 떨어져 있는 ‘쭘끼리’군(郡)에 도착하자마자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부터 찾았다. ‘쭘끼리’라는 이름은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뜻이다. 이름처럼 산악지대와 밀림지대가 많은 이곳은 캄보디아에서도 특히 눈물과 상처가 많은 지역이다. 게릴라전을 펼치기 좋은 지형 탓에 이곳에서는 크고 작은 전쟁이 끊이질 않았다. ‘킬링필드’로 대변되는 학살과 내전을 1998년까지 겪었다. 1979년 크메르루주 정권이 무너지면서 일부 군대가이 지역 산악지대로 숨어들었기 때문이다. 마을 모든 집이 가족을 잃거나 장애인이 된 식구를 끌어안고 산다. 이 땅에서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상처를 치료하고 있는 부부를 만나기 위해 서울에서부터 이 먼 거리를 쉼 없이 왔다. 국제구호개발 NGO인 기아대책에서 15년 전 캄보디아 기아봉사단으로 파견한 이성민(53)·김창숙(48) 부부다. “당시만 해도 총을 든 군인들이 거리를 활보하던 시절인데,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모르겠어요. 6살·3살의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캄보디아에 왔습니다. 긴급구호 활동을 펼치느라 항상 위험한 곳에 있으면서 많이 용감해졌죠, 뭐.” 이성민 씨는 국내에서 긴급구호, 국제개발 활동 자체가 없었던 1989년, 해외 원조를 목적으로 세운 기아대책의 1호 간사이자 긴급구호 활동가다. 대한민국표(表) 1세대 해외 긴급구호 활동가인 셈이다. “그 시절 이 지역은 외부와의 왕래도 거의 없었어요. 먹을 것도 부족한 형편이니

“21세기 富,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기부 관점·권유 방식도 바꿔야 할 때”

폴 쉐비시 보스턴 대학 사회학 교수 21일 대한상공회의소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국제기부문화심포지엄 ‘기빙코리아 2010’에서 폴 쉐비시(Paul G. Schervish·65) 교수를 만났다. 폴 교수는 보스턴 대학의 사회학 교수이면서 부와 자선 연구센터(Center on Wealth and Philanthropy at Boston College) 소장으로 미국의 고액 기부자들을 오랜 시간 연구해왔다. ‘기부문화, 길을 묻다’라는 주제로 열린 이 행사에서 그는 21세기에는 ‘부’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있으며 기부문화도 바뀌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콧수염을 길러 친근해 보이는 폴 교수는 자신이 한국에 대해 받은 첫인상에 대해 말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많은 차들이 쌩쌩 달리고 있어서 마치 사람을 칠 것 같았습니다. 서울시내 어디를 가도 커피 전문점이 있었어요. 모든 사람들이 휴대폰으로 통화를 하면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누구와 통화를 하는 걸까요?” 폴 교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동차와 휴대폰을 가지고 있는 풍요의 21세기에는 ‘부’가 목적이 아닌 수단이 된다”며 “그렇게 되면 자신의 삶뿐 아니라 타인의 삶까지 보살피려 하는 쪽으로 인간의 본성이 발현될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과 자녀들을 위해 더 많은 부를 추구하는 것에서 벗어나 가족과 이웃, 지역사회와 국가 전체가 잘사는 법을 고민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폴 교수는 “부가 늘어날수록 돌봄과 사랑을 보여줄 수 있는 범위도 커진다”고 말했다. 폴 교수는 부를 바라보는 관점이 변화하는 이 시대에 기부를 바라보는 관점 또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부자가 일방적으로 자선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자선을 베풂으로써 기부자의 마음에 생길 수 있는 변화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에는 1만

세계 TOP10 사회적 기업가를 찾아서⑧ 日 ‘테이블포투’ 창업자 마사히사 고구레

선진국엔 ‘건강식’ 후진국엔 ‘희망식’ 20엔<약 280원>으로 만드는 기적의 식탁 기업·학교 등 330여 기관과 제휴, 현재까지 1억200만엔 모여…르완다·우간다·에티오피아 등 아프리카 54개 학교에 급식 지원 일본 최대 무역회사 중 하나인 미쓰이(Mitsui & Co.). 이곳 구내식당에 ‘아프리카 아이들을 위한’ 점심메뉴가 있다고 해서 찾아갔다. 12시가 가까워지자 직원들이 하나 둘 구내식당으로 모여들었다. 다양한 메뉴들 중에서도 유독 ‘테이블포투(Table for two)’ 메뉴에 사람들이 줄을 길게 섰다. 유이치 아오키(57) 사회공헌부장은 “2008년 8월부터 테이블포투 메뉴를 시작했다”며 “직원들이 이 메뉴를 선택할 경우, 판매액에서 자동으로 20엔(약 280원)이 기부되고 회사도 20엔을 매칭해 추가 기부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2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미쓰이 상사는 테이블포투 메뉴 판매를 통해 약 148만엔(2000만원)의 기부금을 모았다. 지난 7월부터는 포인트 카드 제도를 도입해 이 메뉴를 10번 먹으면 무료 음료수를 제공하면서 기부를 독려하고, 회사는 동시에 아프리카 고아원에 추가 기부를 하고 있다. 회사 내에는 테이블포투 서포터즈 모임도 구성돼 있다. 주로 20~30대 젊은 직원들로 구성된 모임은 사내 캠페인 활동을 주도한다. 정기적으로 사내 설문조사를 통해 메뉴 개발, 홍보 전략을 짠다. 서포터즈 중 한 명인 히데아키 시미즈(29)씨는 “사회적 책임은 기업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시민 모두의 것이기도 하다”며 “직장생활을 하면서 동시에 글로벌 사회에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다는 게 참 보람있다”고 말했다. 테이블포투 메뉴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두 사람을 위한 것이다. 비만으로 고심하는 선진국 사람들과 굶주림으로 고통 받는 후진국 사람들을 위한 메뉴다. 비타민·무기질

“자폐 자녀, ‘말아톤’처럼 장기 계획 세워야”

김용직 한국자폐인사랑협회 회장 비공식적으로는 4만~5만명, 정식 등록 숫자는 1만4000여명인 자폐성 장애인의 특징은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다는 것이다. 필요한 법이나 제도를 요구할 수 없기에 변화는 더디기만 하다. 이들을 위한 ‘공식 목소리’를 내는 곳은 2006년 만들어진 ‘한국자폐인사랑협회’가 유일하다. 한국자폐인사랑협회 김용직(55) 회장은 사법연수원 12기 출신의 변호사다. 오랜 판사생활을 접고 2001년 법무법인 KCL의 대표 변호사로 전직한 이유는 자폐성 장애를 앓고 있는 아들(27) 때문이었다. 변호사 활동을 하며 사회복지법인 이사, 서울시장애인재활협회 이사 등을 거쳐 2006년부터 지금까지 한국자폐인사랑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영화 ‘말아톤’이 나온 뒤 자폐와 관련된 단체가 필요하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됐습니다. 자폐에 대한 사회의 이해를 높이고 힘을 모으기 위해 자폐 아동 부모 3분의 1, 전문가 3분의 1, 후원자 3분의 1로 구성된 한국자폐인사랑협회가 탄생했습니다.” 한국자폐인사랑협회가 하는 중점 사업은 ‘자폐사랑캠프’이다. 매년 여름 2박3일 동안 자폐 아동과 가족 등 1000여명이 함께 한다. “차량 지원은 물론이고 그때만큼은 가족들도 편안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자폐 장애아를 돕는 자원봉사자도 따로 모집합니다.”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에 캠프 자원봉사자는 교육도 따로 받아야 한다. “많은 자폐 아동 가족께서 좋아해주셔서 열심히 하고 있다”며 미소를 지었다. 협회 활동 5년차. 김용직 회장은 지역별로 자폐성 장애인만을 위한 센터를 만드는 것이 가장 절실하다고 말했다. “자폐성 장애인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많이 필요로 해서 종합복지관에 가면 항상 소외되고, 뒷전으로 처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아이들이 주인인 센터가 생겨야 합니다.” 김 회장은 그러기

“장애인도 배우로서 인정받고 자신감 찾아갑니다”

장애인 배우 길러낸 ‘메자닌 극단’ 지난 8일 서울 대방동에 있는 여성플라자 아트홀 ‘봄’의 무대에선 노란 머리에 갈색 눈을 가진 아버지와 아들이 초콜릿 파이를 굽고 있었다. 아버지가 뒤돌아선 사이 계란을 껍질째 넣고, 설탕과 밀가루를 들이붓는 아들의 모습에 관객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발달 장애 아동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한국어 단어가 적힌 ‘커닝페이퍼’를 보며 내뱉는 아버지의 어설픈 대사엔 박수까지 치며 깔깔댔다. 제8회 장애어린이축제 해외 초청작으로 올려진 오스트리아 메자닌 극단의 연극 ‘초콜릿 파이’는 비장애인 배우 한 명과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는 장애인 배우 한 명이 초콜릿파이를 구우며 생기는 에피소드를 다룬 극이다. 비장애인 관객은 다운증후군을 앓는 배우가 상대방의 연기에 시의적절하게 반응하며 능숙하게 극을 이끌어가는 모습에 놀라워했고, 장애 아동들은 외국 배우가 어설픈 한국 단어를 내뱉을 때마다 박수를 치며 즐거워했다. 연극이 끝나고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함께 연극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실행에 옮긴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바로 이 무대를 기획하고 만든 연극배우이자 연출자인 마르티나 콜빙거-라이너(Martina Kolbinger-Reiner·46·사진) 씨를 찾아 나섰다. “독일 국경도시 파사우(Passau)와 오스트리아 그라츠(Graz)에서 총 5년 동안 연극과 영화를 배우고 극단을 세우기로 마음먹었어요. 그러다 공동대표를 맡기로 한 파트너의 아들을 만났습니다.” 파트너의 아들은 발달 장애 아동이었다. “그 친구가 연극을 보면서 무척 좋아하는 거예요. 잘만 하면 장애인이라도 연기를 하며 극에 참여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하는 극단 메자닌(Mezzanin)은 1989년 그렇게 탄생했다. 하지만 메자닌 극단을 운영해 온 21년은

[Cover story] 인터뷰―월드비전 한국 박종삼 회장 “우리의 나눔은 개미군단의 승리이자 생명 나눔”

아동 결연사업 규모 세계 4번째짧은 역사 속 ‘기적’의 성적모금이 가장 잘된 시기는 IMF 때”우리는 충분히 스스로를자랑스러워할 자격 있어” 전쟁을 직접 겪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극한의 굶주림과 공포를 이해하게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 ‘어려운 일’이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이뤄졌던 때가 1950년, 6·25전쟁 이후다. 당시 한국 거리에는 굶고 병든 아이들이 넘쳤다. 전쟁을 피해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이 자신의 목숨 하나 부지하기 어려운 시절. 커다란 트럭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아이들의 시체를 보고, ‘어린 생명을 돕자’는 구호단체가 생겨났다. ‘한국 월드비전 60년, 세계 월드비전 60년’의 역사도 그렇게 시작했다. 당시 14살 소년이었던 월드비전 박종삼(75) 회장도 1950년 그 추운 겨울을 ‘거리의 소년’으로 지독하게 났다. “길에서 잠자며 며칠 굶주리고 나니, 지나가는 사람 주머니에서 동전이 떨어졌으면 좋겠다는 기도가 절로 나왔다”고 했다. 살아남으려면, 다른 사람의 생명까지도 도와줄 수 있으려면, 실력을 갖춰야 한다고 깨달았다.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며 살아남았고, 그 생명을 지킬 수 있도록 기회를 준 사람들에게 보답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서울대 치과대학을 나와 진료 봉사에 나섰고, 무의탁 청소년들을 위한 마을을 세웠다. 20년 넘게 교수로도 봉직했다. 결혼도 하지 않고 쉼 없이 달려온 시간들. 그는 “학교 정년 퇴임식 날, 비로소 쉴 수 있다는 생각에 안도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안식은 오래가지 않았다. 월드비전 이사들이 찾아왔다. 그간 쌓은 모든 지식과 네트워크를 월드비전의 성장을 위해 쏟아달라는 요청이었다. “완고하게 거절하는 저에게 한 분이, 얼마 안 있으면

[세계 Top 10 사회적 기업가를 찾아서] ⑦ 美 ‘컬리지 서밋’ 창업자 JB슈람

저소득층 대학 진학 돕는 ‘내비게이터’ “가난하다고 꿈까지 가난할 순 없다” 1993년 화창한 어느 봄날. 네 명의 학생이 ‘요벨청소년센터’를 찾았다. 미국 워싱턴DC의 주택단지에 위치한 이 센터는 저소득층 청소년들을 위한 방과 후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곳이다. 당시 원장을 맡고 있던 JB슈람(JBSchramm·47) 씨를 찾아온 아이들은 “대학에 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다. 어려운 가정형편, 본받을 역할 모델(role model)과 멘토의 부재, ‘대학’에 대한 정보 부족과 자신감 부족 등으로 센터 아이들 대부분이 대학 진학을 포기하는 것에 안타까워하던 때였다. “모처럼 용기를 내 찾아온 아이들을 실망시킬 수 없었다”는 슈람씨는 하버드 신학대학원 재학 시절 신입생 학업 상담 조교로 일하면서 얻은 노하우를 모두 쏟았다. 대학에서 작문을 가르치는 친구, 학교에서 멘토로 봉사하는 친구에게 도움도 청했다. 한걸음에 달려와 준 고마운 친구들과 함께 그는 네 아이들의 에세이를 비롯한 입학서류 작성을 도왔다. 그리고 몇 개월 후 네 명의 아이들은 각각 아이비리그 중 하나인 브라운대학교를 비롯해 코네티컷대학교, 몽고메리카운티 커뮤니티칼리지에 입학했다. 교육 분야의 세계적인 사회적 기업인 ‘컬리지 서밋(College Summit)’의 출발을 만든 첫 결실이었다. 친구들은 한 번의 봉사로 여기고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슈람씨는 대학 진학의 ‘시장 격차’ 문제를 고민하며 그 문제 해결을 자신의 삶으로 만들었다. 그의 노력에 아쇼카재단과 스콜재단, 슈밥재단은 각각 2000년, 2006년, 2007년 ‘올해의 사회적 기업가’로 선정하며 화답해줬다. 2010년엔 미국의 국가 봉사 프로그램 조직인 CNCS(Corporate for National and Community Service)로부터 사회혁신펀드를 지원받았고, 오바마 대통령은 노벨평화상 상금 중

“외롭지만 꼭 필요한 사업에 도전… 또 다른 기적이 꽃필 겁니다”

신인숙 하트하트재단 이사장 발달장애 아동 ‘윈드 오케스트라’부모·공무원… 모두 불가능이라 말해5년 동안 연주회만 50~60회 열어 발달장애 아이들로 구성된 ‘윈드 오케스트라’ 얘기를 들은 건 4년 전이었다. 낯선 사람들과 있으면 극도로 예민해지고, 눈조차 마주치기 힘든 아이들이 모여 음악을 연주한다는 것이었다. ‘정말 가능해?’라는 혼잣말 후엔, 곧바로 그 사실을 잊었다. 그 후 2년. 그때 들었던 아이들이 미국에서 공연을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무대에 선 아이들의 모습을 동영상을 통해 보곤, 목이 메었다. 훌륭한 공연 뒤에는 눈물 없이는 듣기 힘든 이야기와 고통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곤 또 그 감동을 잊었다. 그리고 두 달 전, ‘윈드 오케스트라’를 만든 하트하트재단의 식구들을 만났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아파도 병원을 갈 수 없고, 배우고 싶어도 책을 읽을 수 없는 아이들에게 태양광 램프를 보내는 사업을 시작한다고 했다. 이 기발한 아이디어와 감각은 누구한테서 나오는 걸까. 하트하트재단의 신인숙(61) 이사장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엔 복지관 운영부터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하트하트재단이 설립된 지 22년이 넘었습니다. 처음 만들 때만 해도 종합 사회복지관에 대한 욕구가 높았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우리 재단 사업이 다른 복지관이나 백화점 문화센터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만 할 수 있는 사업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의료 사각지대에 집중하자고 결심했습니다.” ―기억납니다. 청각환자 지원 사업이었지요 “청각 환자에게 인공 달팽이관을 지원하는 것과 화상 환자에게 피부 이식 수술비를 지원하는 것, 미숙아 지원 사업 등이 대표적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의료 보험에 해당되지 않아 저소득층에서는

“성공 요인이요? ‘나만의 것’으로 꿋꿋이 밀고 나가세요”

1인 창조기업가들의 재능기부 클래스 지난 19일 일요일 오후, 직장인이 전부 빠져나가 조용해진 여의도의 한 카페에 ‘초대받은’10명 남짓한 사람들이 모였다. 중소기업청과 조선일보 더나은미래가 마련한 ‘1인 창조기업가들의 재능기부 클래스’를 듣기 위해서다. 이날 ‘재능기부’의 주인공은 스타벅스, 커피빈 등 글로벌 프랜차이즈 커피숍 틈에서 맛과 품질을 무기로 성공한 ‘주빈커피’의 송주빈(51) 대표였다. 1999년 대방동의 한 작은 가게에서 종업원 1명과 시작한 그의 커피 인생은 현재 3개의 커피숍과 1개의 로스팅 공장, 종업원 22명을 거느리며 월 매출 2억원을 기록할 만큼 성장했다. “저는 대기업 엔지니어 출신입니다. 해외 출장 기회가 많아 세계 여러 곳을 다니며 커피를 마셨죠. 마시면 마실수록 매력있는 게 커피라고 생각했습니다. 언젠가 사업을 해보고 싶다 생각했었죠.” 그러던 차에 과장 진급에서 떨어졌다. 그는 그 길로 사표를 쓰고 커피숍을 준비했다. “건물 2층인 이 자리에 커피숍을 열기로 하고 인테리어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공사 시작 이틀 후, 1층에 스타벅스가 들어온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주변에서는 다들 공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접으라며 뜯어말렸다. “하지만 상관없었어요. 저는 제 커피에 자신이 있었거든요.” 하루 4시간씩 가게 앞 테니스장에서 커피콩을 볶았다. 좋은 커피의 맛을 내기 위해서는 생두를 볶는 과정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연기가 많이 나서 어쩔 수 없이 밖에서 생두를 볶았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이 너무 쳐다봐 민망했다”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재능기부 클래스의 또 다른 강사였던 홍대 앞 생면국수 전문점 ‘요기’의 배태진(44) 대표 역시 “내가 가장 잘 아는 것을 해서 성공했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홍익대

“청각장애 학생들의 자신감 회복을 돕고 싶어”

사회적 기업 ‘헤드플로’ 전하상 대표 코넬대 장애지원 프로그램으로 배움에 대한 목마름 해소… 이 시스템을 혼자 누리기 안타까워 사회적 기업 세울 것을 결심했죠 지난주, 영어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한 교실을 찾았다. ‘미래에 하고 싶은 일 5가지’라는 주제로 말하기를 훈련하는 날이었다. 교실 3면을 둘러싼 칠판 곳곳에 학생들은 자신만의 리스트를 적고 발표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뭔가 보통의 교실 풍경과는 달랐다. 교실 오른편 스크린에 자막처럼 글씨가 계속 올라왔다. 강의 내용뿐만 아니라 심지어 농담까지, 교실 안의 모든 이야기가 올라왔다. 자세히 보니 교실 한쪽에서 보조강사가 모든 내용을 타이핑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말하기를 훈련하면서 갑자기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른다. 지휘를 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제자리에서 점프도 한다. 바로 청각장애인을 위한 영어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헤드플로(Headflow)’의 교실 풍경이다. 헤드플로는 청각장애인에게 영어 프로그램, 리더십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사회적 기업이다. 청각장애인 학생들을 위해 수업에서의 모든 ‘말’을 타이핑해 화면에 띄운다. 강세·억양에 대한 개념이 부족한 학생들을 위해 발을 세게 구른다거나 점프를 높이 하는 것, 지휘를 하거나 그래프를 그려보는 것 등으로 느낌을 설명한다. 이러한 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개발한 사람은 본인 스스로도 청각 장애를 갖고 있는 전하상(24·사진)씨다. 헤드플로의 설립자이자 대표이기도 하다. “저 스스로가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제대로 배워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우리나라 청각장애인들이 얼마나 배움에 목말라 있는지 절감할 수밖에 없다”는 전하상씨. 그는 언제부터 안 들렸는지조차 모른다고 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입 모양을 보고 이해하고, 유치원이나 학교에서도 다른

‘따로 또 같이’ 힘 모아 부산 중앙동의 활력 되찾다

‘또따또가’원도심 문화창작공간 “미군 부대에서 시레이션(C-ration)이라고 전투 식량을 담는 박스가 나왔어. 이게 안에 기름종이가 발라져서 비가 안 샜다고. 이 박스랑 판자를 엮어 만든 박스집들이 용두산 공원에 바글바글했다니까.” 부산 중구 토박이 임금칠(64)씨가 전하는 중앙동의 옛 모습은 한 끼 밥벌이를 위해 뛰어다니는 사람의 활력으로 가득찼다. 그 후로도 중구는 “무역이면 무역, 장사면 장사, 안 되는 일이 없었다”고 했다. 중구, 그중에서도 중앙동은 부산 일번지였다. 그랬던 곳도 다른 오래된 도심처럼 쇠락하기 시작했다. “서면 쪽에 호텔이 생기면서 상권이 흩어지기 시작”하더니, 1998년 시청이 이전하면서 인구가 급격히 감소했다. 1990년대 초반 8만명에 달했던 숫자가 98년 이후에는 5만명으로 줄었다. 빈 건물이 늘어갔다. 이렇게 활력을 잃어가던 중구에 최근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문화 바람’ 덕분이다. 임금칠씨는 지난 9월 어르신 여덟 분과 함께 용두산 공원에서 사진 전시회를 열었다. “14살 때부터 신문 배달하고, 인쇄업을 하면서 맺어온 사진과의 인연이 전시회까지 이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했다. 그것도 평생을 곁에 두고 살아온 용두산 공원에서의 일이다. 어르신들에게 무료 사진 수업을 진행하고 전시회까지 치른 사진작가 프리야 김(39)씨는 지역에서 열리는 조그마한 전시회에 많은 후원이 쏟아져 깜짝 놀랐다고 했다. “중구노인복지회관 후원으로 전시회에 참여하신 어르신들 사진엽서를 1000부씩 만들었어요. 엽서 뒷면에 전시회 소개를 넣었는데 그건 인쇄골목에 계시는 분이 실비로 해주셨어요. 사진 인화비하고 전시회 포스터, 플래카드는 ‘또따또가’에서 제공했죠.” 지난 7월에는 ‘또따또가’에 입주한 몇몇 예술가들이 ‘중앙동 인쇄 골목에 화분을 놓자’는 취지로 자선 콘서트를 열었다. 작업실에서 나와

“10년 후 가장 큰 이슈는 ‘다문화’ 건강한 사회 통합 프로그램 필요해”

한용외 인클로버재단 이사장 기업 사회 공헌과 사회복지 쪽에 깊은 관심을 가지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이름이 ‘한용외’ 전 삼성사회봉사단 사장이었다. 삼성재단과 삼성그룹 전체의 사회 공헌을 총괄했던 사람. 될성부른 사람은 확실히 키워주고 보수적인 삼성 조직문화 속에서도 아니다 싶으면 ‘No’라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평가였다. 하지만 인터뷰는 녹록하지 않았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얘기할 때 사회 공헌은 ‘책임’이 아니라 ‘재량’이라고 목소리를 높였고, 국민을 위한 정치가 아니라 정당을 위한 정치를 하기 때문에 미래를 내다보는 정책이 나오지 않는다고 일갈했다. 무엇보다 인터뷰를 위한 시간 확보가 쉽지 않았다. 사재(私財) 10억원을 기부해 만든 다문화지원재단 인클로버(www.inclover.or.kr) 활동과 사회복지를 주제로 한 박사 논문 집필, 최근 임명된 중앙국립박물관 이사장 역할까지 하느라 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 쓰고 있었다. 인터뷰는 지난 4일 과천교육문화회관에서 열린 다문화 캠프 현장과 9일 집무실에서 두 번에 걸쳐 진행됐다. 다문화는 인생 2막을 시작하는 한 이사장에게 큰 화두(話頭)로 보였다. ―다문화 지원재단을 만드신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앞으로 5~10년 이후에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이슈가 무엇일지를 고민해보니 다문화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문제를 조직적으로 조사, 연구하고 해결하려는 재단이 필요했지요.” ―정부는 물론이고 기업에서도 다문화 프로그램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다문화 프로그램은 한글과 한국 문화를 중심으로 한 주입식 통합 프로그램입니다. ‘한국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것도 중요하지만 그들의 고유성을 인정해줄 때 통합 속도가 더 빠를 거라고 생각합니다. 자국의 책을 읽고 문화를 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통합 프로그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