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재작 한국정밀농업연구소장
[농업의 미래, 미래의 농업] ‘식량안보 정글’을 헤쳐 나갈 내비게이션

지도를 보고 길을 찾아가는 걸 ‘독도법’이라 한다. 독도법에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자신의 위치를 찾는 것이다. 나침반으로 방향을 확인하고 지도의 등고선과 지형지물과 대조해 현재 위치를 특정한다. 그 이후는 쉽다. 지도를 따라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가면 된다.  현실 세계에서도 독도법의 원리는 그대로 적용된다. 만약 농업의 미래가 궁금하면 먼저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어떤지 알 필요가 있다. 이때 사용되는 방법이 ‘벤치마크’다. 벤치마크는 기업이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다른 회사나 업계의 우수사례를 참고하는 경영 기법을 일컫는다. 물론 기업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방법론이기도 하다. 농업 분야에서는 시범농장, 선진지 견학, 해외연수 등이 벤치마크 목적으로 활용된다. 그렇지만 현실에서 벤치마크는 선진국의 사례를 국내에 재현하는 용도로 주로 사용된다. 농업 분야에서도 정책과 제도, 기술과 교육 등 다양한 영역에서 외국의 사례를 국내에 적용해 우수한 성과를 거뒀다. 학계에서는 이를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 전략이라고 명명했다. 벤치마크를 활용한 빠른 추격자 전략은 우리가 따라 할 대상이 있는 한 유효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우리 앞에서 길을 만들어 주던 대상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우리만의 지도가 필요한 때가 도래했다. 해외 사례가 국내에 적용될 때는 필연적으로 부작용도 발생한다.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적 배경을 도외시한 정책과 제도가 다른 나라에서 같은 효과를 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말처럼 외국의 성공 사례는 타국에 이식돼 후유증만 남길 수 있다. 벤치마크를 통해 독일에서 농민이 되기 위해서는 농업직업학교를 졸업한

임성택 법무법인 지평 대표변호사
[기업과 사회] 기업의 공급망 책임은 어디까지일까?

2010년 네슬레는 오랑우탄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그린피스가 네슬레 광고를 패러디한 영상을 공개하면서다. 영상에는 어느 회사원이 네슬레 초콜릿을 꺼내 먹는데 다름 아닌 오랑우탄 손가락이었다. 그린피스는 네슬레의 초콜릿 원료인 팜유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오랑우탄 서식지인 열대우림이 파괴되고 있다고 비난했다. 네슬레는 억울했다. 네슬레와 팜유 공급계약을 체결한 회사도 아니고 공급망의 말단 농장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네슬레는 먼저 해당 동영상의 삭제를 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청구는 받아들여졌지만 영상은 오히려 사람들의 관심을 사게 되고 여론은 더 나빠졌다. 기업은 공급망의 환경파괴나 인권침해에 대해 어디까지 책임을 져야 할까? 1차 협력사가 아닌 말단의 공급망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할까? 법률상으로 보면 네슬레는 아무런 책임이 없었다. 스스로 한 행위도 아니고, 아무런 계약관계도 없는 농장의 산림 벌채를 교사하거나 방조한 바 없었다. 직접 계약관계가 없는 말단 공급망의 불법행위에 대해 연대책임을 묻는 법률도 없었다. 그러나 네슬레에 대한 시민사회 및 소비자들의 비난은 거셌다. 결국 네슬레는 해당 업체와의 거래를 중단하고, 10년 안에 산림 벌채가 없는 공급망을 만들며, 2015년까지 100% 지속가능한 팜유를 사용하겠다고 약속했다. 지속가능한 팜유란 생산과정에서 환경 파괴와 인권 침해가 없는 팜유를 말한다. 네슬레는 ‘법적 책임’은 없지만 ‘사회적 책임’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공급망의 첫 단계부터 상품이 생산돼 소비자에게 판매되는 전체 사슬에서 기업의 책임은 높아지고 있다. 무엇보다 기업의 공급망 관리에 대한 사회의 요구가 높아지고 있다. 사회적 책임은 시장과 사회가 책임을 묻는 것이다. 소비자들이 외면하고, 투자자들이 투자를 하려 들지

정유미 포포포 대표
[기차에서 일합니다] 유괴 미수 사건의 전말

“선생님! 오늘 은성이(가명)가 유괴될 뻔해서 경찰서에 다녀오는 길이에요!” 부재중 통화를 이제 발견했다는 A선생님의 목소리는 격양돼 있었다. 유괴라니. 9시 뉴스에 등장할 법한 일이었다. A선생님이 부리나케 경찰서에 달려갔을 때 은성이는 잔뜩 겁을 집어먹은 채 떨고 있었다. 꼬치꼬치 상황을 캐묻는 어른들 앞에서 아이의 진술은 조금씩 흔들렸다. 혼비백산한 아빠를 대신해 A선생님은 경찰과 인근의 CCTV를 확보하러 나섰다. 자초지종은 이러했다. 돌봄센터에 간다던 아이는 방향을 틀어 놀이터에서 홀로 놀고 있었다. 낯선 사람이 다가와 처음에는 말로 그다음에는 완력으로 아이를 끌고 가려는 시도가 수면 위로 드러났다. 그날의 일은 단순 유괴 미수 사건이 아니었다. 전지적 시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었다. 지역의 결혼이주여성들과 그림책을 만드는 ‘그림과 치유’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아이들을 두고 본국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던 엄마들의 사연을 처음 접하게 됐다.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타국에서 가정 폭력, 향수병 등 여러 상황에 노출된 여성들이 도움의 손길을 청할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고민 끝에 본국에 홀로 돌아가는 그 발걸음이 가벼웠을 리 없다. 그렇게 남겨진 아이들과 양육을 떠맡게 된 아빠는 이중고에 처했다. 생계에 쫓겨, 정보의 부재로 어쩔 수 없이 방임된 아동의 숫자는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다. 돌봄센터나 보육 지원 정책을 알게 된다면 그나마 운이 좋은 케이스. 제도권 안에서 받을 수 있는 혜택을 찾을 여력조차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정보 접근성의 허들을 넘었다 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사회보장제도의 혜택은 건강보험료를 기준으로 결정되는데 단 몇백원 차이로 은성이네는

전혜경 유엔난민기구 한국대표부 대표
[사회혁신발언대] 어린이날, 난민 아동의 보호 받을 권리를 생각한다

해마다 어린이날이 되면, 한껏 부푼 마음과 기대에 찬 눈망울로 사랑하는 가족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즐거워하는 아이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아이가 어린이날의 들뜬 분위기를 온전하게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 아동복지법 6조에 따르면, 어린이날은 ‘어린이에 대한 사랑과 보호의 정신을 높임으로써 이들을 옳고 아름답고 슬기로우며 씩씩하게 자라나도록 하기 위해’ 제정됐다고 한다. 어린이들이 ‘보호’를 받고, 나아가 삶의 여러 가지 권리를 마음껏 누릴 수 있게 하는 데에는 ‘출생신고’가 필수적이자 가장 기본적인 요소다. 어린이들에게 출생신고가 중요한 많은 이유 중 하나는, 출생이 등록되지 않을 경우 교육, 노동, 의료 서비스, 이동 등 삶의 다양한 기본적인 권리를 누리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되고, 무국적자가 될 위험에 더욱 많이 노출되기 때문이다. 이에 관해 유엔 아동권리협약 제7조 제2항은 ‘아동은 출생 후 즉시 등록돼야 하며, 출생 시부터 성명권과 국적 취득권을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당연하게 느껴질 수 있는 이 ‘출생신고’가 당연하지 않은 경우들이 있다. 난민의 자녀들이 그러하다. 현재 대한민국 내 외국인 자녀의 출생신고는 출신국 대사관을 통해서만 진행할 수 있다. 하지만 애초에 본국에서 박해를 당할 위험이 있어 우리나라에서 보호를 받고 있는 그들이 출신국 대사관에 찾아가는 것은 여의치 않다. 비단 이런 경우뿐만 아니라, 본국의 출생등록 관련 법 제도상의 문제나 대한민국 내 체류 자격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본국 대사관에서 출생 등록이 거부되는 경우도 빈번하다. 출생신고는 국가가 아동의 존재 사실을 확인하고 이를 바탕으로

김정태 엠와이소셜컴퍼니 대표
[혁신의 목격자] 당신의 게임은 무엇인가요?

‘대표나 창업가의 삶이란 어떤 것인가요?’ 이제 60명 넘어가는 조직을 이끄는 시점에서 누군가 이런 질문을 한다면 이렇게 답해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건 마치 비유적으로 전쟁에 참여했지만, 끝날 기미가 없는 전쟁을 해가면서도 또 개인의 삶은 그대로 지속하는 이중성 아닐까요?’ 금방 끝나는 해프닝이라고 간주했던 어떤 전투. 사람들은 그 해가 끝나기 전 크리스마스 이전에 복귀할 것이라며 출전하는 군인들을 환송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역사가들이 이름을 붙이기까지 누구도 이 게임의 본질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1914년 7월 28일, ‘제1차 세계대전’이라 사후에 명명된 전쟁의 시작은 이러했다. 1918년 종전이 되기까지 이어진 1460일 동안의 참호전쟁에서 군인들은 휴가를 쓰고 집에 다녀 왔고 다시 전쟁에 참여하기를 지속했다. 전쟁과 일상이 공존했다. 창업한 날, 새로운 혁신을 시작하겠다고 출사표를 던진 날도 이와 비슷한 시작일 것이다. 세계적인 경영사상가 사이먼 시넥은 비즈니스와 혁신 생태계 관점에서 이를 ‘무한게임’(The Infinite Game)이라고 설명한다. 저서 ‘인피니티게임’에서 그는 비즈니스를 “승패가 갈리는 운동 경기, 일회성 사건이 아니라 게임을 해나가는 여정 그 자체가 게임”이라고 정의한다. 한두 번의 승리나 성공은 의미가 없다. 전쟁이 계속되더라도 일상을 꾸리고 계속 게임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무한게임’이다. “게임에 명확한 종료 지점이 없어서 사실상 ‘이긴다’는 개념도 없다. 무한게임의 주목적은 게임을 계속해 나가며 그 게임을 오랫동안 유지하는 것이다.” 지금은 유럽에서 사회혁신을 가르치는 교수님이 오래전 ‘소셜섹터에 참여하는 종사자들의 유입 유형’을 바탕으로 박사논문을 썼다. 나 역시 인터뷰에 참여했는데,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뉘었다고

신수정 KT엔터프라이즈 부문장
[완벽한 리더 삽니다] 완벽한 스타일이란 없다

한 임원이 있다. 스타일이 솔직하고 진취적이었다. 새롭게 조직을 맡은 후 리더십 평가와 다면평가를 받았다. 아니나 다를까 다면평가 점수가 높지 않았고 성향이 너무 주도적이니 보완하라는 권고가 있었다. 나와의 1대1 미팅 시 고민을 털어놓으며 지금까지 이런 스타일을 바꿔보려고 노력했는데 잘 안되어 힘들다고 했다. 나는 답변했다. “괜찮은데요. 굳이 스타일을 바꿀 필요가 있을까요?” 그는 놀라서 “제 스타일이 너무 진취적이라 직원들이 힘들어하는데 제 스타일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요?”라고 반문했다. 나는 답했다. “괜찮아요. 그것이 본인의 강점인데요. 만일 상무님이 진취적인 것이 잘못됐다고 소극적으로 행동하면 어떻게 될까요? 본인이 가지고 있던 추진력이나 혁신 능력이 다 사라지지 않겠어요? 그러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리더가 될겁니다. 단지, 자신이 이런 스타일이고 그러기에 본의 아니게 구성원들을 힘들게 할 수도 있고 필요한 부분은 피드백 해달라고 구성원들과 진솔하게 소통하시죠. 그리고 상무님과 달리 적극적이 아닌 다른 구성원의 스타일 또한 잘못된 것이 아님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예전에는 한 금융기관의 행장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소탈하고 친화력이 있는 분이었다. 이분이 행장이 되자 주위 참모들은 이런 제안했다고 한다. “이제 행장님이 되셨으니 진중한 모습을 보이시는 게 어떨까요.” 행장은 한두주간 그렇게 하셨단다. 조용히 말하고 무게도 잡고 말수도 줄였다. 그러자 주위 임직원들이 “행장님 어디 아픈 거 아냐?” “심기가 불편하신 거 아냐?” “부인이랑 싸우신 거 아냐?” 등으로 뒷담화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에 다시 원 상태로 돌아오니 다들 편해했단다. 많은 분이 리더십 책을 읽고 강연을 들으면서 자신의 스타일이

양경준 크립톤 대표
[로컬 패러다임] 로컬은 취향의 대상이 아니다

‘패러다임(paradigm)’은 패턴, 예시, 표본 등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파라데이그마(παράδειγμα)에서 유래한 말로 ‘한 시대의 보편적인 사고의 틀(frame)’을 뜻한다. 우리말로는 시대정신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미국의 과학사학자이자 과학철학자 토마스 쿤(Thomas S. Kuhn)이 1962년 자신의 책 ‘과학혁명의 구조(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에서 처음 사용했는데 그는 이 책에서 과학의 발전은 점진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패러다임 전환(Paradigm Shift)’에 의해 혁명적으로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이후 보통명사화 되면서 상황이나 생각이 혁명적으로 바뀌는 상황을 뜻하는 표현이 됐다. 패러다임 시프트를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예로 천동설과 지동설을 들 수 있다. 지금이야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돈다는 지동설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한 16세기 이전에 우리가 살았다면 우주가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는 천동설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지동설과 마찬가지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패러다임들이 있는데 그중 가장 강력한 것은 아마도 산업혁명일 것이다. 과학혁명이 산업의 영역으로 확장되고 적용되면서 구축된 산업혁명 패러다임의 가장 큰 특징은 ‘대량생산 대량소비’다. 1760년대 기계의 발명으로부터 촉발된 산업혁명은 짧은 시간 안에 인류를 규정해 버렸는데 구체적으로는 이렇다. 대량생산이 가능하게 하려면, 다시 말해 대량생산 기계를 작동하려면 많은 인력이 필요했다. 이는 농촌의 노동력을 빨아들이면서 도시화를 가속했다. 엄마 아빠를 모두 공장에 뺏긴 아이들을 관리(탁아)해야 했기 때문에 공장 시스템과 똑같은 형태의 공교육이 등장했다. 아이들은 정해진 시간에 등교하고, 정해진 시간 동안 공부하고, 정해진 시간에 쉬고, 정해진 시간에 밥을 먹고, 정해진 시간에 하교했다. 대량으로 생산해 대량으로 소비하는

정유미 포포포 대표
[기차에서 일합니다] 프랑스의 돌봄교실에서 발견한 질문

워킹맘의 무덤이라 불리는 여덟 살 학부모의 세계로 진입했다. 예비 소집일에 돌봄교실 안내문을 받고 적잖이 당황했다. 과밀학급임에도 전 학년 기준 돌봄교실은 딱 두 반, 우선순위 대상을 읽으며 애초에 기대를 접었다. 돌봄교실과 병행할 수 있는 방과 후 수업의 평균 경쟁률은 5대1. 갑작스런 휴강이나 학교를 마치고 생기는 공백에 대한 변수는 불안으로 번졌다. 직접 돌보거나, 맡기거나. 아이의 이동 동선에 맞춰 안전을 책임질 학원 선생님을 연결하는 건 양육자 개인의 몫이었다. 새벽 기차를 타고 미팅에 나서는 경우를 대비해 촘촘하고 전략적인 방과 후 스케줄이 필요했다. 허리띠를 졸라 아이 사교육에 헌신한 부모가 노년에 빈곤을 겪는 현실을 목도하면서도 막상 당사자가 돼보니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초등은 100만원, 중등은 200만원, 고등은 300만원이라는 사교육비 지형도가 드라마 속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인근의 태권도, 미술, 피아노 학원은 학교를 대신해 돌봄을 담당해 온 오랜 성지였다. 점심시간을 반납하고 교문 앞에서 아이를 기다리는 워킹맘도 여럿. 엄마와 학원 선생님의 손을 잡고 학원으로 떠나는 아이들의 거대한 밀물과 썰물 사이로 교정에 고요가 찾아왔다.  다른 나라의 사정은 어떨까. 포포포 매거진 오픈채팅방에서 프랑스 통신원으로 활약하는 민영님을 줌으로 만났다. 프랑스의 돌봄교실은 누구나 저렴하게 필요할 때마다 신청할 수 있다. 아이들은 추워도 비가 와도 쉬는 시간이면 무조건 교실 밖으로 나가 뛰어논다. 아이를 맡길 수 있는 ‘썽트르 루아지르’라는 별도의 기관도 존재한다. 반면, 한국의 돌봄교실은 여전히 맞벌이 가정이나 저소득층을 위한 서비스로 기능한다. 안전상의 이유로 돌봄의 영역은 교실 안으로

임성택 법무법인 지평 대표변호사
[기업과 사회] 우리도 ‘소셜 택소노미’ 논의를 시작하자

지난해 한국에서 30조원이 넘는 사회적채권이 발행됐다. 녹색채권은 전년보다 절반이나 줄었는데 사회적채권은 오히려 늘었다. 사회적채권은 사회문제 해결 또는 완화를 목적으로 발행하는 채권이다. 어떤 경우에 사회적채권에 해당할 수 있을까? 카드회사가 중소가맹점 지급주기 단축을 위해 채권을 발행한다면, 은행이 중소기업 대출을 위해 채권을 발행한다면, 통신회사가 통신품질 제고를 위해 채권을 발행한다면, 제약회사가 신약 개발을 위해 채권을 발행한다면, 사회적채권으로 볼 수 있을까? 이런 질문에 답을 찾는 것이 바로 ‘택소노미’다. 소셜 택소노미(Social Taxonomy)는 사회적으로 지속가능한 경제활동을 분류하는 기준이다. 유럽연합(EU)은 그린 택소노미에 이어 2022년 2월 소셜 택소노미를 발표했다. 한국은 2021년 12월 녹색 분류체계를 만들었다. 이른바 ‘K-택소노미(Taxonomy)’다. 그러나 소셜 택소노미에 대해서는 아무런 논의도 없다. 사회적채권을 포함해 ‘지속가능금융’이 늘고 있으나 무엇이 ‘지속가능한’ 경제활동인지는 모호하다. 논쟁적이기도 하다. 택소노미는 기업 입장에서 환경적으로 유용한 활동, 사회적으로 유익한 활동의 기준이 된다. 외형적으로는 환경적·사회적 지향을 가지는 경제활동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워싱(washing)을 방지하고 식별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ESG 워싱은 세계적으로 정책당국뿐 아니라 소비자, 시민사회의 각별한 관심을 받고 있다. 소셜 택소노미는 환경에 집중돼 있는 분류체계를 인권을 포함한 사회적 영역으로 확장한 것이다. EU가 가장 앞서 있다. EU 소셜 택소노미는 아래와 같은 사회적 목표 및 판단기준을 제시한다. 택소노미에 포함되려면 우선 사회적 목표에 ‘실질적으로’ 기여해야 한다. 사회적 목표는 이해관계자에 따라 설정된다. 예를 들어 근로자와 관련해서는 ‘양질의 일자리’다. 그냥 일자리가 아니라 ‘좋은’ 일자리에 방점이 찍혀 있다.  소비자와 관련해서는 적절한 생활수준과

황신애 한국모금가협회 상임이사
[모금하는 사람들] 운영비가 기부금 낭비라는 오해

모금단체가 운영비를 너무 많이 사용하는 것이 불편해 기부를 중단한다는 말을 들을 때가 있다. 기부자들은 직접 프로그램에 지원하고 싶어 하고, 대상에게 직접 전달하거나, 프로그램 직접 경비로 쓰이는 것을 일 잘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내 돈이 운영비로 쓰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과연 운영비는 낭비이고, 잘못 쓰이는 것인가?  잠시 재난 상황을 떠올려보자. 사람들은 가장 빠르고 즉각적으로 일하는 단체에 박수를 보낸다. 이렇게 빠르게 대응을 할 수 있으려면 평소 관리가 체계적이고 준비도가 높아야 하며 운영비가 더 들어간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체계적으로 일을 잘하는 것을 선호하면서도 내 돈이 운영비에 쓰이지 않기를 바란다. 앞뒤가 맞지 않는다. 무엇이 잘못됐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부금을 인건비로 사용하는 것에 부정적이다. 왠지 내 기부금으로 남의 인건비나 늘려주는 것 같은 느낌이 싫고, 인건비가 늘어나면 지원비가 줄어서 일에 지장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를 반증하는 연구결과가 있다. 미국 플로리다주립대학의 조셉 스틴(Joseph Stinn) 교수는 비영리단체의 효율성과 간접비 비율은 서로 정비례하고, 단체의 효율성과 모금비용은 역의 관계라고 말했다. 행정운영과 인력체계가 잘 유지돼야 단체가 안정적이고 책임감 있게 일할 수 있기 때문에 결국 효과적으로 일하는 단체는 운영비와 인건비가 높다는 것이다. 반면 단체의 기본 운영체계와 인건비에 투자하지 못하면 좋은 인프라와 인력을 확보하기 어려워져 업무역량이 떨어지게 되며, 이를 보충하기 위해 더 많은 모금비용을 지출하게 된다. 악순환이다. 이렇게 보면 비영리단체의 빈익빈부익부 현상은 간접비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회문제 해결과 혁신 과제를 위해 비영리 세계로 뛰어든

[논문 읽어주는 김교수] ESG의 종말

수년 전 시작된 ‘ESG(환경적, 사회적, 거버넌스) 경영’의 열풍은 계속해서 정점을 갱신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여러 질문도 잇따른다. ‘ESG는 언제까지 지속될까?’ ‘ESG는 한때 유행이 아닐까?’ ‘ESG의 끝은 어디고, 다음은 무엇일까?’ 등이다. 이에 대해 영국 런던비즈니스스쿨의 알렉스 에드먼스(Alex Edmans) 교수는 ‘ESG의 종말(The end of ESG)’이라는 다소 자극적인 글을 집필했다. 에드먼스 교수는 모건스탠리(Morgan Stanley)에서 투자 및 채권 관련 업무를 하고 런던비즈니스스쿨 교수를 역임하며 지속가능한 금융과 투자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지난해 말 공개한 그의 연구는 ‘ESG가 특별한 것이 아니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최근 ESG 경영은 기업 경영진, 투자자뿐 아니라 규제 기관과 공공기관, 비영리조직, 심지어 대중도 관심갖는 용어가 됐다. 주요 기업은 최고경영진을 의미하는 ‘C레벨’에 최고지속가능성책임자를 임명하고, ESG 영향을 기반으로 전략적 결정을 정당화한다. 경영진의 급여와 인센티브도 ESG 지표에 연결하고 있다. 기업과 투자자뿐 아니라 공공기관에서도 ESG 경영을 강조하고 있고, 대학에서도 ESG 과정을 도입하고 ESG 센터를 설립했으며, ESG와 관련된 다양한 프로젝트가 분주하게 진행되고 있다. 지난 2006년 ESG 6대 원칙준수를 강조하는 책임투자원칙(PRI)이 설립될 당시 동참한 투자자는 수십 곳에 불과했지만, 2023년 3월 현재 총 5435개로 급증했다. 이러한 ESG 열풍 속에서 에드먼스 교수는 ESG에 대한 일부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지만, ESG를 완전히 버릴 것을 제안하지는 않았다. 그는 ESG가 중요한 지표이며,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갖도록 장려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봤다. 그러나 ESG를 ‘마케팅 도구’로 사용하는 기업들을 비판하며, ESG가 아닌 다른

김정빈 수퍼빈 대표
[쓰레기공장 이야기] 선형경제에서 순환경제로

날씨는 따뜻해지고, 바야흐로 봄입니다. 식욕과 소비 욕구가 덩달아 충만해지는 계절입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꼭 갖고 싶은 옷이나 신발, 가방도 많고, 매력적인 전자제품도 눈에 밟히고,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싶은 음식들도 넘쳐납니다. 이러한 풍요와 편리함은 인류가 만들어 온 위대한 문명의 결과입니다. 하지만 이 문명에는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쓰레기와 폐기의 현장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쓰레기 현장의 규모는 너무나 크고 위협적이며 심지어는 어둡고 침침해서 누구도 그 실체와 모습을 직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한번 용기를 내서 함께 한번 상상해 볼까요? 우리 사회는 수많은 산업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화장품 산업, 장난감 산업, 음식이나 음료 산업, 전자제품 산업 그리고 생필품 산업 등. 이렇게 많은 산업에서 생산한 제품들은 결국 어디로 갈까요? 제품마다 약간의 시차는 있겠지만 결국은 모두 쓰레기장으로 모입니다. 그러면 그 모든 걸 받아내야 하는 쓰레기장의 규모는 얼마나 커야 할까요? 상상이 가시나요? 아마도 우리 문명이 생산하는 모든 제품을 순차적으로 다 담을 수 있는 규모여야 할 겁니다. 인터넷으로 검색하거나 요즘 그 유명한 ‘챗GPT 4.0’에 물어봐도 좋습니다. 그 정도 크기의 쓰레기장을 가진 나라나 도시를 찾아 줄 수 있을까요?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많은 쓰레기가 쓰레기장 안에 다 담지 못하면 나머지 쓰레기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우주로 가거나 공기 중에 분해됐을까요? 아마도 우리가 잘 보지 못하는 바다로, 강으로 또는 땅속으로 들어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현실에 너무 좌절하지 않고 고통스럽지만 좀 더 자세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