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6일(수)

“웃으며 기부하는 문화 만드는 것… 나눔 기획자 된 이유죠”

나눔콘텐츠 기획사 명랑캠페인 오호진 대표

영화·공연계 미다스의 손
영화 ‘친구’,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 등
기획하는 것마다 대박 행진

나눔 기획자로 제2의 인생
‘공연 때마다 반드시 소외계층 초청’ 조항
사회적기업 ‘태양의 서커스’ 공연이 계기

“즐겁게 기부하자”
공감 영화제·낭독 연극·댄스마켓부터
나눔 관심자 대상 나눔 대학도 진행

2005년 1월, 한 청년의 이야기가 520만 관객을 울렸다. 상영 첫 주부터 흥행 1위를 고수하더니, 입소문을 타고 개봉 한 달 만에 전국 관객 400만명을 돌파했다. 영화 ‘실미도(2003)’ ‘태극기 휘날리며(2004)’ 이후 최고 인기였다. 다섯 살 지능을 가진 스무 살 초원(2급 지적장애)군의 마라톤 완주를 다룬 영화 ‘말아톤’ 이야기다. ‘말아톤’은 2001년 춘천마라톤 풀코스를 2시간57분07초 만에 질주한 배형진군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스포츠·장애 등 흥행하기 어려운 요소를 두루 갖췄음에도, 관객의 열렬한 호응을 이끌어낸 비결에 영화계는 주목했다. 그 중심엔 1년 반 이상 장애 현장을 다니며 기획의 완성도를 높인 여성이 있었다. 바로 오호진(41·사진)씨다.

14년간 영화·공연기획자로 활약하다가 나눔기획자로 변신한 오호진 명랑캠페인 대표. /양승호 작가 제공
14년간 영화·공연기획자로 활약하다가 나눔기획자로 변신한 오호진 명랑캠페인 대표. /양승호 작가 제공

“춘천마라톤을 완주한 배형진군 기사를 조선일보에서 접하고, 가슴이 ‘쿵’ 내려앉았어요. 좋은 영화로 만들어내고 싶었죠. 장애인학교인 육영학교를 비롯해 장애 관련 단체들을 직접 찾아다녔어요. 영화를 기획하려면 일단 저부터 발달장애인에 대해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배형진군 어머니를 인터뷰하고 몇 달간 함께 지냈어요. 입버릇처럼 ‘아들보다 하루 더 사는 게 소원’이라던 어머니 말씀에 같이 울기도 했고요. 이런 생생한 스토리가 담긴 덕분인지 기존 목표치였던 80만명보다 무려 7배 이상 많은 관객이 영화를 찾아주셨어요.”

그녀의 손을 거친 영화와 공연들은 ‘대박’이 많았다. 국내 최초로 8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친구(819만명)’, 올림픽 체조경기장 1만석을 매진시킨 세계적인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 내한 공연’, 14년 만에 내한한 발레리나 강수진과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로미오와 줄리엣’ 등 작품마다 성공을 거뒀다. 탁월한 기획력과 마케팅 전략 덕분이었다.

“강수진씨와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이 내한한 2008년은 경기 불황 때문에 미국에서도 관객이 300명에 불과했어요. 어렵게 내한하는 만큼 국내 발레 저변을 넓히고 싶었어요. 공연 1년 전, MBC ‘무릎팍 도사’ 제작팀과 협의해서 강수진씨 방송을 촬영하고, 녹화본은 공연 전 2주에 걸쳐 방송되도록 했죠. 발레단 100명이 연습을 위해 세종문화회관으로 이동할 때마다 방송을 본 시민들이 환호하며 응원해줬어요. 물론 전석 매진됐고요.”

지난 14년간 영화·공연계 ‘미다스의 손’으로 활약한 오씨는 2012년 돌연 사표를 던지고,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연극·콘서트·영화·춤 등 엔터테인먼트를 접목시킨 다양한 나눔 문화 콘텐츠를 제작하는 기획사 ‘명랑캠페인’을 차린 것. 영화·공연 기획자에서 나눔 기획자로의 변신이었다.

“작품을 만들면서 제 삶이 바뀌었어요. 혹시 ‘엘시스테마’라고 들어보셨나요? 베네수엘라의 음악교육 시스템이에요. 마약과 범죄에 노출된 빈민 아이들을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교육해 자립시키죠. 전과 5범 소년을 포함해 11명으로 시작한 단원 수가 현재 30만명에 이르고, 세계적인 뮤지션도 30명에 달해요. 2008년 엘시스테마의 카라카스 유스오케스트라 초청 공연을 진행하면서, 단원들의 열정과 엘시스테마 시스템에 감동을 받았어요. 회사에서 기획, 제작한 ‘태양의 서커스’ 공연을 보면서 또 한 번 충격을 받았어요. 전 세계에서 서커스로 가장 돈을 많이 버는 엔터테인먼트사인 태양의 서커스가 알고 보니 사회적기업이더군요. 태양의 서커스는 캐나다의 석회석 채석장과 쓰레기 매립장이던 몬트리올 지역을 매출 1조원대 세계 서비스 메카로 만들었어요. 혁신적인 아이디어로 지역을 발전시킨 거죠. 계약서에는 태양의 서커스 공연을 올리려면 반드시 소외계층을 초대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고, 환경재단도 별도로 갖고 있더라고요. 그때 확신이 들었어요. 저도 지금껏 배워온 노하우를 공익 활동에 쏟자고 다짐했죠.”

공익 분야를 배우고 싶은 마음에 희망제작소에서 진행하는 공익 기획자 양성 프로그램(소셜디자이너스쿨)부터 수강했다. 이후 작은 결혼식·친환경 결혼식·셀프 웨딩 등 ‘우리가 주인이 되는 결혼’ 아이디어로 소셜벤처경연대회에서 수상도 하고, SNS로 생필품을 모아 판자촌에 기부하는 캠페인을 진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갈증은 계속됐다. 결국 오 대표는 공연기획사를 그만두고 푸르메재단 모금팀장으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그동안 쌓아온 네트워크를 활용해 연예인들과 기부 공연, 뮤지컬 등 다양한 캠페인을 진행했다. 오 대표는 그중에서도 션과 함께하는 ‘만원의 기적 콘서트’를 가장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로 꼽았다.

“당시 푸르메재단은 장애아동 재활병원 건립을 위한 기부금이 필요한 상황이었어요. 가수 션은 예전부터 나눔 콘서트를 꼭 하고 싶어 했고요. 둘의 니즈(needs)를 접목해 션이 시작한 하루 1만원씩 1년 동안 365만원을 기부하는 만원의 기적 캠페인을 활성화했어요. 기부자들과 뮤지컬도 관람하고, 콘서트도 했죠. 만원의 기적 콘서트는 예술의 전당 후원을 받아 2500석을 매진시켰는데, 당시 힙합가수로서 예술의 전당에 오른 이는 션이 처음이었죠. 10개월간 모금팀장으로 일하면서 푸르메재단뿐만 아니라 재미난 기획력을 필요로 하는 비영리단체가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명랑캠페인을 차린 이유죠.”

오 대표는 2013년 베리어프리 영화제, 아름다운재단과의 시설 퇴소 아동 자립 캠페인 등 비영리단체의 캠페인을 기획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아무리 소액이더라도 비영리단체마다 다른 업체에 별도의 캠페인 기획을 맡길 수 있는 재정적 상황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에 오 대표는 직접 나눔 콘텐츠를 개발해서 그 수익금을 비영리단체에 기부하고, 나눔 기획자를 발굴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탄생한 프로젝트들이 바로 공감영화제, 낭독 연극, 나눔대학, 이쁜 얼굴쇼, 나눔 콘서트, 댄스 마켓(춤과 마켓이 결합된 신개념 바자회) 등이다. 영화·공연 기획을 함께했던 전문가들이 프로젝트마다 태스크포스(TF)로 모여 전문성을 더하고 있다.

“공감영화제는 다문화, 장애, 빈곤 등 공익 이슈로 제작된 영화를 관람하고 함께 이야기하는 프로젝트예요. 예를 들어, 다문화가정 아이들이 오케스트라를 만들면서 꿈을 찾아가는 영화 ‘안녕, 오케스트라’를 상영할 땐 이 영화를 관람하러 온 관객, 다문화 가족, 다문화 가정을 후원하는 단체 등 삼자가 함께 모여 관람해요. 영화가 끝나면 토크쇼, 사진전, 연주회 등을 진행하면서 삼자가 서로 알아가는 시간을 가집니다. 그 과정에서 신규 후원과 기부가 일어나요. 영화값은 자유예요. 명랑캠페인의 모든 행사는 관객들이 공감한 만큼 자율적으로 티켓값을 지불하는 ‘공감요금제’가 적용됩니다. 신기하게도 매번 일반 티켓값보다 더 많이 내시더라고요(웃음).”

지난여름에 시작한 공감영화제는 2회 만에 800명이 참여, 약 400만원이 걷혔다. 명랑캠페인은 이를 다문화 단체를 통해 도움이 필요한 티베트 청년, 희망제작소, 비영리단체 바라봄사진관에 기부했다.

지난 2월 14일, 대학로 공연장 벙커1에서 열린 낭독 연극 ‘뛰뛰빵빵’을 진행한 배우들과 이를 총괄 기획한 명랑캠페인 오호진 대표(왼쪽에서 넷째)의 모습.
지난 2월 14일, 대학로 공연장 벙커1에서 열린 낭독 연극 ‘뛰뛰빵빵’을 진행한 배우들과 이를 총괄 기획한 명랑캠페인 오호진 대표(왼쪽에서 넷째)의 모습.

낭독 연극 ‘뛰뛰빵빵’ 역시 2년째 지속된 프로젝트다. 낭독 연극이란 등장인물별로 배우들이 앞에 나와 앉아서 대사를 읽어주는 형태의 연극이다. 치매에 걸린 엄마와 가족의 이야기를 담았다. 연극 ‘푸르른 날에’로 4년간 3만여 관객을 모은 국내 흥행 극작가 정경진, ‘사천가’, ‘억척가’로 국내외에서 인정받는 연출가 남인우가 오 대표와 함께 제작했다. 연극 무대는 다양하다. 재활병원, 카페 등 낭독 연극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찾아갔다. 6회 공연 모두 전석 매진(600명)을 기록했다. 지난 2월 14일 대학로 공연장 ‘벙커1’에서 ‘뛰뛰빵빵’을 관람한 임슬아(여·29)씨는 “낭독극이라고 해서 그냥 읽을 줄만 알았는데, 목소리나 표정으로 연기하는 모습에 집중해서 봤다”면서 “공연 중간부터 눈물이 너무 많이 나와서 고개를 숙이고 들었다”는 소감을 남기기도 했다.

이뿐만 아니다. 명랑캠페인은 나눔에 관심 있는 이들을 대상으로 교육·워크숍·문화 관람을 지원하는 ‘나눔대학’, 션·유오성 등 유명인을 초청해 기부 권장쇼(이쁜 얼굴쇼)도 진행 중이다. 더 많은 이가 나눔을 알아가고, 즐겁게 기부하는 문화를 만드는 것. 오 대표의 목표다.

“명랑캠페인을 접한 분들이 개인적으로 나눔 기획을 의뢰하는 경우도 늘었어요. 남자 친구와 기념일을 맞아 100만원을 기부 행사로 기획하고 싶다고 해서, 구룡마을 아이들에게 뮤지컬을 보여주는 프로젝트를 진행했어요. 어떤 분은 돌잔치 비용을 뜻깊게 쓰고 싶다고 해서, 형편이 어려워 재활병원에 다니지 못하는 아이의 지원금으로 전달했고요. 이젠 누구나 나눔 기획자가 될 수 있어요. 자기만의 콘텐츠가 생기는 거죠. 모두가 나눔 기획자가 되는 날까지 열심히 나눔을 부추기겠습니다.”

정유진 기자

강미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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