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 28일(수)
구멍 난 외부이사 선임 제도… 흔들리는 사회복지법인

‘도가니법’ 후유증
이사 3분의 1 이상 외부인사 임명 의무화
무보수 명예직인데다 책임만 떠안아 기피
전문성 없는 인물 앉혀 이사회 때마다 마찰도

40년간 제조 관련 사업을 통해 100억원대 자산을 모은 한중만(가명·63)씨는 3년 전부터 사회복지법인 설립을 준비했다. 지체장애 자녀를 키우면서 느꼈던 불편함을 직접 개선하고, 더 많은 장애아동을 돕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5월, 그는 고민 끝에 법인 설립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지난 1월 시행된 사회복지사업법(일명 ‘도가니법’) 개정안에 포함된 ‘외부이사 선임’ 조항 때문이다. 한씨는 “외부 이사로 인해 법인 자체가 흔들리고, 운영을 제대로 못하는 사례들이 생겨나더라”면서 “최근 사회복지법인을 설립하려던 주변의 50~60억원대 자산가 4명도 ‘운영의 위험 부담을 떠안은 채 정부로부터 구속만 받을 바엔 차라리 법인 설립을 안하는게 낫다’면서 맘을 바꿨다”고 귀띔했다.

미상_그래픽_사회복지_외부이사소파_2013

지난 1월 27일 시행된 사회복지사업법의 일부 조항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각 사회복지법인 이사 정수의 3분의 1 이상을 외부 이사로 선임해야 한다(제18조 2항)는 조항 때문이다. 이에 모든 사회복지법인은 각 시·도에 구성된 사회복지위원회나 시·군·구에 설치된 지역사회복지협의체가 2배수로 추천한 외부 인사들 중에서 반드시 이사를 선임해야 한다. 전문가들은 “제2의 도가니 사건이 없도록 투명성을 강화하자는 취지에는 모두가 공감하나, 그 방법이 잘못됐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해당 조항은 지난해 헌법소원이 제기돼 현재 재판부에서 심의 중이다.

◇추천할 이사 없어 난리…구멍 뚫린 시스템에 전문성 하락

충남에 위치한 한 사회복지법인은 벌써 몇 달째 외부 이사를 선임하지 못하고 있다. 지역사회복지협의체(이하 협의체)가 “아직 인력풀이 구성되지 않았다”면서 이사 추천을 미루고 있기 때문. 법인 관계자는 “이사가 선임되지 않은 채로 감사를 받게 되면 ‘문제 법인’으로 찍히는 데다, 민법상 이사 등기 의무를 미룬 것으로 간주돼 과태료를 부담할 수 있다”며 걱정했다. 한편, 제주특별자치도 산하 사회복지위원회(이하 위원회)는 외부 이사 공개모집을 했으나 교수·변호사 등 복지관련 전문가들이 신청하지 않아, ‘경력 10년 이상인 시설 직원은 모두 공개 모집을 신청하라’고 각 사회복지시설에 연락을 취했다. 장애인시설에서 10년 넘게 근무한 한 사회복지사는 “요청에 떠밀려 나도 이름을 올렸지만, 사회복지법인 이사회에서 시설장을 임명하고 시설 운영을 지원하는데, 시설 관계자가 이사가 되면 공정성에 위배되는 게 아닌가 우려된다”고 말했다.

현재 전국의 사회복지법인 수는 총 1648개(2011년 말 기준·보건복지부 통계). 대부분의 법인은 평균 7~9인 정도의 이사를 선임하는데, 한 법인당 평균 2명 정도 외부이사를 선임하면 약 3300명의 전문가가 필요한 셈이다. 문제는 사회복지법인 이사가 무보수 명예직이고 해당 법인이 문제될 경우 책임만 떠안기 때문에, 대부분 사회복지법인 이사 자리를 꺼린다는 점이다. 대구의 한 사회복지법인 대표는 “그동안 지역 내에서 오랜 시간 신뢰를 쌓아온 전문가분들을 여러 차례 설득해 어렵게 이사로 모셔왔다”면서 “지자체 산하 위원회가 급하게 모집한 이들 중에서 이사를 추천하다 보니, 기존 이사진보다 전문성이 떨어지고 비전도 공유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한 기독교 사회복지법인에는 불교계 전문가가 이사로 추천·선임돼, 이사회 때마다 마찰을 빚기도 했다. 정무성 숭실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법 개정으로 투명성을 강화하려다 전문성까지 잃어버릴 수 있다”면서 “위원회나 협의체에서 기한 내에 좀 더 전문성 있는 이사를 추천할 수 있도록 검증 시스템을 강화하고 인력풀을 세밀하게 구성해야한다”고 강조했다.

◇”특정 단체·인물 선임해라”…지자체 압력에 전전긍긍

지자체에서 사회복지사업법 개정안을 정치적으로 활용해, 외부 이사 선임에 대해 압력을 넣기도 한다. 실제로 한 광역시에선 특정 단체의 인물을 외부 이사로 선임하라는 권고문을 사회복지법인들에 보냈다. 해당 공문을 받은 한 사회복지법인 관계자는 “이사 임기 만료까지 2년이나 남았는데도, ‘왜 외부이사를 선임하지 않느냐, 빨리 임명하라’면서 계속 압력을 넣고 있다”면서 “우리는 법인의 전문성·투명성을 보완해줄 이사가 필요한 것이지, 지자체와 정치적으로 연결된 특정 단체의 인물을 소개받고 싶은 것이 아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자체의 보조금을 받는 사회복지법인들이 지자체 추천 이사들을 거부하기 어렵다는 점 때문에 정치적으로 악용될 소지가 높다는 지적도 있다. 20여년 동안 장애인관련 복지법인을 운영해온 한 대표는 “2월에 요청한 이사를 6월에서야 추천받았는데, 기존 이사진과 비교해 전문성이 현저히 떨어져 재추천을 요청했다”면서 “그러자 ‘추천한 이사를 임명하지 않으면 법인 취소 사유에 해당한다’면서 거부하면 불이익을 줄 것처럼 말해 선임하기로 결정했다”고 귀띔했다. 대구의 한 사회복지법인 사무총장은 “추천 이사를 거부한 법인들에는 평소 해당 법인에 ‘안티’ 성향을 가진 인물을 다시 추천할 수 있기 때문에, 함부로 재추천을 요청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투명성 강화를 위한 대안은 따로 있다

복지부는 “사회복지시설들은 정부로부터 운영비의 80% 이상을 받고 있기 때문에, 시설을 운영하는 사회복지법인들에 국가의 감시·감독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는 국가가 법인 및 시설에 주는 보조금이 아니라, 시설로부터 복지 서비스를 받는 개별 국민을 보조하는 비용”이라면서 “수혜자와 접점에 닿아있는 사회복지시설의 서비스를 평가해야지, 사회복지법인의 외부 이사를 선임한다고 투명성이 강화되는 것이 아니다”고 주장하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정부가 추천한 외부 이사 선임을 의무화하는 사례는 한국이 유일하다. 일본은 2000년 사회복지법인·시설을 지원하는 ‘국가보조금’을 ‘국가부담금’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민간복지활성화를 위한 정책을 강화하는 추세다. 지난해에는 사회복지법인의 재무제표를 홈페이지에 공표하는 것을 의무화하는 방법으로 투명성·공정성을 보완했다. 프랑스는 정부 및 지자체 공무원이 이사진으로 활동하는 에이(a)형과 의결권 없이 이사회 참석만 가능한 비(b)형 정관으로 나눠, 법인이 정관의 종류를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한다. 대신 에이형 정관을 선택한 사회복지법인에는 이사 월급을 비롯해 법인 자체에 대한 운영비와 보조금을 몇 배로 지급하고 있다. 현소혜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법적으로 이사진 구성에 국가가 개입하는 것은 자율성 침해로서 헌법 위배의 소지가 있다”면서 “감독 체계의 투명성을 강화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봉주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시설 자체 평가에서 서비스 품질 평가 체계로 전환이 필요하다”면서 “외부이사 추천 제도에 대해 세밀한 수정·보완이 이뤄지지 않으면, 법인들의 이사 임기 만료가 본격화되는 내년 1월 이후 부작용이 쏟아져나올 것”이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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