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6일(화)

[숨은 영웅을 찾아서] ① 복지가의 마음과 경영인의 머리로… “30년 외길, 장애인 복지 기반 닦았죠”

[더나은미래·더퍼스트 공동기획] [숨은 영웅을 찾아서]
(1) 이동한 사회복지법인 춘강 이사장

장애인 110명 일하는 복지관 설립…
새벽 6시부터 작업장서 일 가르치고
체크리스트 만들어 작업 과정 점검

장애인센터 최초 4대보험 도입…
지적·지체장애인 근로시간도 단축

“퇴역 군인(Veterans) 일어나주십시오.” 미국에선 중요한 행사에 앞서 이들에 대한 존경을 표하는 걸 당연시한다. 우리나라 행사장에선 정치인, 경제인 등의 순으로 박수 행렬이 이어진다. 오피니언 리더로 불리는 이들이 진짜 영웅일까. 우리 사회에서 꼭 필요하지만 누구도 쉽게 하지 못하는 일, 그 일을 오랫동안 해온 진짜 영웅을 만날 수는 없을까. 더나은미래는 공익 전문 온라인매체 ‘더퍼스트’와 함께 ‘영웅의 재발견’ 시리즈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이동한 사회복지법인 춘강 이사장은 제주도 장애인 복지의 아버지로 불린다. 일자리가 필요한 장애인을 위해 장애인근로센터와 공장을 짓고, 제주도에 재활병원이 없는 불편함을 해결하려 춘강의원을 세웠다. 조경, 웨딩 등 개인 사업을 통해 벌어들인 수익은 고스란히 장애인 복지를 위해 투자하는 우리 시대 숨겨진 영웅이다. /조철희 더 퍼스트 기자
이동한 사회복지법인 춘강 이사장은 제주도 장애인 복지의 아버지로 불린다. 일자리가 필요한 장애인을 위해 장애인근로센터와 공장을 짓고, 제주도에 재활병원이 없는 불편함을 해결하려 춘강의원을 세웠다. 조경, 웨딩 등 개인 사업을 통해 벌어들인 수익은 고스란히 장애인 복지를 위해 투자하는 우리 시대 숨겨진 영웅이다. /조철희 더 퍼스트 기자

‘아버지의 모습으로 기억하겠습니다.’ 이동한(63) 사회복지법인 ‘춘강(春江)’ 이사장이 지난 1월 12일 제주도 사회복지협의회장직에서 물러날 때 받은 기념 액자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다. 그의 이름 앞에는 ‘장애인의 아버지’라는 수식이 고유명사처럼 따라다닌다. 하루 이용자(중복 집계)만 1000명이 넘는 제주장애인종합복지기관과 서귀포시장애인종합복지관, 제주 최초의 재활의학 병원인 춘강의원이 모두 그의 손에서 탄생했다. 춘강은 오는 28일, 법인 인가 27주년을 맞는다. 제주도지체장애인복지회에서 장갑 기계 두 대로 직업 재활 사업을 시작하던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이 이사장이 장애인 복지에 몸담은 지는 햇수로 30년째다.

◇밥 퍼주던 부둣가집 막내아들, 복지사업가 되다

이 이사장은 두 살 때 앓은 소아마비로 지체장애 2급 판정을 받았다. 열네 살 때부터 3년간 병원에 누워 16차례 수술을 거쳤다. 하지만 그는 일찌감치 사업가의 길을 선택, 성공 궤도에 올랐다. 20대에 한국상호신용금고를 운영했고, 제주공항의 조경을 담당한 청원녹화조경공사와 제주 지역 최대 예식장인 전원웨딩홀은 창업부터 지금까지 이 이사장이 대표를 맡고 있다. 서울 장애인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각 시도에 장애인 종합복지관을 설립한다’는 정부 발표가 나자, 그는 1987년 제주 장애인종합복지관 건립을 위해 부지 1000평과 자산 8억6000만원을 출연했다.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어머니는 홀몸으로 6남매를 키우면서 17년간 제주도 적십자 봉사대장을 하셨습니다. 부둣가와 가까웠던 저희 집은 가난한 보부상들의 쉼터였지요. 어머님께서 닦아두신 복으로 제가 밥을 먹고사니 저 역시 그 길을 따르게 됐습니다.” 현재 춘강에서 운영 중인 장애인근로센터 2곳에 고용된 장애인은 110여명. 제주센터는 한복과 갈천공예, 이불, 복사용지, 세탁, 감귤 정과(감귤의 살만 발라낸 후 설탕과 꿀에 절여 졸이는 것) 등을 담당하고, 서귀포에 위치한 어울림터는 된장·간장 제조와 양초공예, 조각 등의 공정을 소화 중이다. 초창기 이 이사장은 새벽 6시면 작업장을 찾아 장애인 직원을 직접 가르쳤는데, 조그만 허점도 허투루 넘기질 못해 ‘잔소리꾼’으로 통했다. 작업 과정은 모두 체크리스트로 만들어 점검했다. ‘장애인이 만들면 품질이 낮다’는 시장의 편견을 깨기 위해서였다. “계량 사업을 했던 내게 공정의 정밀함과 제품의 완성도는 생명과 같았다”는 이 이사장의 말을 증명하듯, 춘강장애인근로센터는 ‘2002월드컵 관련 상품 생산 유망 중소기업’에 장애인 고용 기업으로는 유일하게 선정됐다.

춘강장애인근로센터의 작업 과정. /조철희 더퍼스트 기자
춘강장애인근로센터의 작업 과정. /조철희 더퍼스트 기자

“저는 젊은 시절부터 경영을 했기에 ‘되지 않는 사업’은 즉각 철수했습니다. 일본에 연 6만달러씩 수출하며 승승장구하던 피혁 공예 사업도 중국 등 해외 노동력과 비교해 인건비와 타산이 맞지 않는다는 판단이 섰을 때 바로 접었고요. 사회복지는 실천의 영역입니다. 따뜻한 가슴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어요. 복지가의 마음과 경영인의 차가운 머리가 만날 때 제대로 된 복지를 실현할 수 있습니다.”

춘강은 장애인근로센터 최초로 최저임금과 4대 보험(1999년)을 도입했다. 사업이 궤도에 오르기까지 매년 1~2억원의 손실을 입었지만 “근로자에게 반드시 지켜야 할 약속”이었기에 이 이사장은 개인 사업에서 번 돈을 쏟아 부었다. 23년째 근무 중인 고순희 춘강장애인근로센터 사무국장은 “24년간 퇴사자 수가 20명도 채 되지 않는다”고 했다. 입사를 위해서는 수십 대 일의 경쟁률을 뚫어야 한다. 장애에 따라 작업 배정을 달리하는 데다, 다양한 사업 분야가 있어 한 직무에 적응하지 못해도 교육을 거친 후 다른 사업장으로 옮길 수 있기 때문에 인기가 높다. 노사협의체도 있다. 4년 전부터 노사협의체와 회의를 통해 지적장애인 4시간, 지체장애인 7시간으로 근로시간을 단축했고, 안전한 출퇴근을 위해 동절기 5시 퇴근제를 결정했다.

2011년, 이 이사장은 세계 최대 미로 테마파크(기네스 등재 추진) 메이즈랜드를 개장했다. 이미 SBS 일요 예능 프로그램 ‘런닝맨’에 방영되는 등 관광 명소로도 인기가 높지만 이곳이 더욱 특별한 이유는 전 구역이 문턱 없는 ‘베리어 프리(barrier free)’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메이즈랜드는 노인과 장애인, 비장애인 누구나 즐길 수 있는 휴식 공간을 테마로 만들었습니다. 임직원의 삼분의 1 이상이 노인과 장애인으로 구성돼 있고 테마파크 내의 식사와 청소 등을 담당하고 있지요. 모두가 함께 어우러져 일하고 즐기는 모습을 보면, 사람들이 공생(共生)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이 이사장은 올해 초 에티오피아 딜라 지역에 1억7000여만원 상당의 의수를 지원한 데 이어, 메이즈랜드의 수익금 중 일부를 해외 구호에 쓸 예정이다.

2011년 이동한 이사장이 설립한 세계 최대 미로 테마파크 ‘메이즈랜드’엔 문턱이 없다. 장애인 접근성이 좋은 이곳엔 직원의 삼분의 1 이상이 노인과 장애인으로 구성돼 있다. /메이즈랜드 제공
2011년 이동한 이사장이 설립한 세계 최대 미로 테마파크 ‘메이즈랜드’엔 문턱이 없다. 장애인 접근성이 좋은 이곳엔 직원의 삼분의 1 이상이 노인과 장애인으로 구성돼 있다. /메이즈랜드 제공

◇장애인 복지의 씨앗 뿌려

그가 뿌린 씨앗은 조금씩 싹이 나고 있다. 포스코와 계열사 근로자들의 작업복 세탁을 담당하는 장애인 표준 사업장 ‘포스위드(현 포스코휴먼스)’는 춘강이 처음 세운 장애인 세탁 사업장을 벤치마킹했다. 2006년 제주장애인종합복지관의 사회적 일자리 창출 사업으로 운영됐던 이동 청소 사업단 ‘청소척척’은 2011년 ‘제주클린’이라는 이름으로 독립해 어엿한 사업체로 성장했다. 제주시 외도동에 위치한 천연비누·화장품 공방 ‘허브앤케어’는 춘강근로센터에서 10년간 한복 작업을 하던 김윤실씨가 대표를 맡고 있다. 이 이사장의 사업 모델은 해외에서도 관심이 높아 견학자가 많다. 이 이사장은 하지만 아직 해결 과제가 많다고 했다. 장애인 근로작업장 대부분이 ‘중증 장애인 생산품 우선 구매 특별법’에 의존하고 있는 현실을 꼬집으며 “품목별 우대 주체 지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최근 ‘사회적기업 제품 공공기관 우선 구매 제도’ 등 여러 제도가 신설 운영되고 있습니다. 기업이나 공공기관의 구매력은 한계가 있는데 실무진은 사회적기업 제품을 구매할지, 아니면 장애인 생산품을 우선 구매할지 잘 알지 못해요. 춘강의 제품 역시 ‘사회적기업에서 만든 것이냐’는 질문을 자주 받곤 합니다. 물론 매출도 급감했고요. 주문량이 유동적으로 변하면 사업장은 경영 불안에 떨어야 하고 궁극적으로는 고용 유지가 어려워집니다.” 이 이사장은 올해 사단법인 허가를 받은 한국사회복지법인협회 대표로서, 건강하고 도덕적인 사회복지법인을 만들기 위한 활동도 이어갈 계획이다. 미상_그래픽_장애인_이동한인터뷰QR코드_2014 “‘도가니 사건’ 등으로 사회복지법인에 대한 사회적 신뢰가 하락한 가운데, 사회복지사업법 개정으로 법인 이사 정수의 3분의 1 이상을 외부 추천자로 선임해야 하는 등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현장에서 일어나는 사회복지사들의 인권 문제는 소외된 채 남겨졌고 이해 관계자들의 목소리도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국내 사회복지법인의 지난 60년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협회가 머리를 맞댔습니다. 윤리위원회를 조직하고 문제 사안이 발생하면 자율 조사를 실시하는 방안을 추진 중입니다. 자정 노력을 통해 법인이 각자의 철학을 실현하고 민간 복지 전문가가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협회의 숙제이자 저의 또 다른 목표라 할 수 있겠지요.”

※QR코드로 들어가시면 인터뷰 영상을 볼 수 있습니다.
제주=권보람 더퍼스트 기자 영상=조철희 더퍼스트 기자

관련 기사

Copyrights ⓒ 더나은미래 & futurechosun.com

전체 댓글

제262호 창간 14주년 특집

지속가능한 공익 생태계와 함께 걸어온 1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