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필립 뒨통(Philippe Duneton) 유니테이드(Unitaid) 사무총장
“감염병 퇴치 노력이 경제적 이유로 둔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멈추는 것은 단순한 정지가 아니라 퇴보를 의미합니다. 지금까지 성취한 것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지난 17일 서울에서 열린 ‘2025 세계바이오서밋’ 참석차 방한한 필립 뒨통(Philippe Duneton) 유니테이드(Unitaid) 사무총장은 <더나은미래>와의 인터뷰에서 강조한 말이다. 유니테이드는 2006년 WHO 산하에 설립된 국제 보건기구로, HIV/AIDS·결핵·말라리아 등 3대 전염병 퇴치를 목표로 한다. 혁신적 치료제와 진단도구를 시장에 안착시켜 가격을 낮추고, 저소득국에 보급해 매년 3억 명 이상이 혜택을 받고 있다.
올해 초, 글로벌 보건 프로그램 최대 공여국이던 미국이 국제 원조 전면 중단을 선언하면서 세계 보건에 공백이 발생했다. 지난 18일 발표된 ‘미국 우선 글로벌 보건 전략’도 양자 협정에 무게를 두겠다는 방침을 담았다. 그러나 세계는 이미 유니테이드를 비롯한 다자 협력을 통해 중저개발국에 의약품을 빠르고 저렴하게 공급하는 체계를 구축해왔다. 이 때문에 글로벌펀드, 세계백신면역연합(GAVI) 등 기존 협력 체계가 약화되면서 지원의 중복, 공급망 분절, 협상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다자 협력의 성과는 분명하다. 소아마비 발생 건수는 99% 이상 줄었고, HIV/AIDS 사망은 2004년 정점 대비 약 70% 감소했다. 말라리아 사망률도 2000년 대비 절반으로 낮아졌다. 결핵은 2015~2023년 사이 사망률이 23% 줄었다. 그러나 소아마비 외 다른 주요 감염병은 아직 완전히 퇴치되지 않았다. 국제사회가 여전히 힘써야 할 과제가 남아 있는 이유다. 이에 <더나은미래>는 18일 서울에서 필립 뒨통 사무총장을 만나 향후 과제와 해법을 물었다.
―글로벌 보건 다자협력에서 유니테이드는 어떤 역할을 하나.
“유니테이드는 ‘시장 형성자’다. 각국의 보건 수요를 파악해 필요한 혁신을 찾아내고, 이를 치료제나 진단기기 형태로 시장에 맞춰 공급한다. 이후 글로벌펀드와 가비(Gavi)가 확산을 맡는다. 다시 말해, 유니테이드는 혁신을 가장 먼저 시작하는 선구자 역할을 하는 셈이다. 이 과정을 통해 유니테이드는 매년 약 10억 달러(한화 약 1조 4000억)의 비용을 절감하고, 1달러 투자당 46배의 효과를 거두고 있다. HPV(인유두종바이러스) 검사·치료 프로그램이 대표적이다. 조기 병변을 발견하는 체계를 통해 아프리카 여성 200만 명이 혜택을 받았다. 이제 르완다는 호주와 함께 자궁경부암 예방 수준이 세계적으로 높은 나라로 손꼽힌다.”
―오늘날 세계가 마주한 가장 큰 보건 위기는 무엇인가.
“무엇보다 ODA와 보건 재정 지원이 줄고 있다는 점이다. 치료와 감시가 중단되면 대규모 집단 감염이 재발할 수 있고, 20년 안에 새로운 팬데믹이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 내성 확산은 대응을 더 어렵게 하고 비용 부담을 키운다. 기후변화도 위협이다. 실제로 2023년 말라리아 발병 건수는 2억6300만 건으로, 2015년 최저점 이후 다시 증가세다. 기온 상승은 모기 매개체와 기생충의 성장 속도를 높이며 감염력을 키웠고, 그 결과 고지대와 온대 지역 등 과거에 말라리아가 없던 지역까지 위험이 번지고 있다. 홍수와 가뭄 같은 극한 기상 현상도 보건 서비스 접근을 약화시켜 약제 내성 위험을 더욱 높이고 있다.”
―기후변화에 대한 유니테이드의 대응은.
“첫째는 적응이다. 콜드체인 없이도 보관할 수 있는 의약품을 개발해 고온 환경에서도 안정성을 유지하려 한다. 산후 출혈 치료제가 그 사례다. 고온에서도 품질이 유지돼 폐기를 줄이고, 보건서비스 접근성이 낮은 지역에서도 쓸 수 있다. 동시에 탈탄소 노력도 병행하고 있다. 치료제 생산 과정에서 탄소 배출을 줄이고 있는데, HIV 치료제의 경우 탄소 감축 효과가 스위스 제네바 전체 배출량에 맞먹는다.”
―미국의 원조 중단으로 다자 협력이 흔들리고 있다. 돌파구는 무엇인가.
“빌 게이츠가 말했듯 미국의 공백은 누구도 메울 수 없다. 그렇다고 멈출 수는 없다. 우리는 가격을 낮추고 집행 효율을 높이는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다. 일부 국가는 자국 재원을 활용해 대응 역량을 키우고 있다. 한편으로는 미국 정부가 결국 돌아올 것으로 생각한다. 최근 HIV를 연 2회 접종으로 예방할 수 있는 ‘예즈투고’ 주사제가 개발됐는데, 미국 역시 자국 임산부 보호를 위해 이를 도입할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게이츠 재단, 글로벌펀드와 협력해 이 주사제의 합리적 가격을 보장해야 한다. 결국 지금까지 해온 일을 더 치열하게 이어가는 수밖에 없다.”
―글로벌 보건에서 한국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
“2024년 기준으로 한국은 유니테이드에 두 번째로 많은 기금을 투자했다. 새 정부가 국제 보건을 주요 아젠다로 두고 투자를 이어가길 바란다. 재정적 지원도 중요하지만 정치적 지원이 더 중요하다. 유니테이드 이사회는 소규모지만 유럽, 한국, 일본, 아프리카 국가 등 다양한 구성원으로 이뤄져 있다. 한국의 목소리는 이사회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채예빈 더나은미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