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선은 사회의 위험 자본이 되어야 합니다”

[인터뷰] 송주미 美 시겔 가족 재단(Siegel Family Endowment) 부사장 및 최고운영책임자

생성형 AI가 세상을 바꾸고 있다. 그러나 기술 발전 속도만큼 불평등과 배제의 문제도 심화되고 있다. 기술이 소수의 이익이 아닌 모두의 공익(Public Good)에 기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다.

이 흐름 속에서 10년 넘게 ‘기술과 공익’을 화두로 삼아온 재단이 있다. 컴퓨터 과학자 출신이자 글로벌 투자사 ‘투시그마(Two Sigma)’의 공동 창립자인 데이비드 시겔(David Siegel)이 2011년 설립한 시겔 가족 재단(Siegel Family Endowment·SFE)이다. 그는 MIT에서 컴퓨터공학 박사 학위를 받고 AI 연구를 수행했으며, 현재 600억 달러 규모 자산을 운용하는 투시그마의 공동 회장을 맡고 있다.

SFE는 “기술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만든다”는 미션 아래 ▲학습 ▲노동 ▲인프라 분야를 중심으로 변화를 지원해왔다. 2023년 기준, 재단 자산은 약 5억 달러(한화 약 6994억 원), 연간 보조금 지급 규모는 수천만 달러에 달한다. 단기 성과보다 장기적 ‘시스템 변화’에 투자하며, 스스로를 ‘사회의 위험 자본’이라 칭할 만큼 실패 가능성이 있더라도 대담한 실험을 지원한다.

◇ 학습·노동·인프라, 세 가지 변화의 축

‘학습’ 분야의 대표 사례는 2018년 시작된 ‘모던 클래스룸 프로젝트(Modern Classrooms Project·MCP)’다. 워싱턴D.C 지역 저소득층 고교 수학 교사였던 카림(Kareem Farah)과 롭(Rob Barnett)은 잦은 결석과 학력 격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사 제작 영상 기반 학습 ▲학생 주도 학습 속도 조절 ▲완전 이해 후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마스터리 기반 학습을 도입했다.

이를 통해 학생 개개인의 학업 수준과 정서적 필요에 맞춘 교육이 가능해졌다. 지난 5년 동안 2만 명의 교육자가 ‘가상 멘토링’ 프로그램에 참여해 교육용 영상과 진도 추적 도구를 제작했으며, 참여 교사들은 자기주도 학습 설계, 숙달 기반 평가 등에서 일반 교사보다 높은 역량을 보였다.

실제로 MCP 활용 교사의 50여 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97%가 ‘자기 주도 학습 단원을 설계할 수 있다’고 답했지만, 일반 교사는 32%에 불과했다. 또 학생 개별 요구 대응 능력도 88% 대 42%로 큰 차이를 보였다. 지금까지 6000개가 넘는 학교가 MCP를 도입했으며, 100만 명이 넘는 학생이 영향을 받았다

‘노동’ 분야에서는 2024년부터 ‘경제정책연구소(Economic Policy Institute·EPI)’에 30만 달러(약 4억 원)를 지원하기 시작한 것이 대표적이다. EPI는 지난 30년간 임금 정체, 고용 환경 악화, 인종별 임금 격차 등 불평등 심화를 연구해왔으며, 모든 노동자가 공정한 임금과 양질의 일자리, 의료·노후 보장을 누리도록 정책을 제안해왔다. 특히 ‘구직자-일자리 비율’ 지표를 개발해 고용난 분석에도 기여한 싱크탱크다.

‘인프라’ 분야는 물리적 시설을 넘어 디지털·사회적 기반까지 포괄한다. 대표 사례로 ‘코드 더 드림’은 소외 청년에게 무료 소프트웨어 교육과 유급 견습 기회를 제공해 지역사회의 디지털 역량을 높이고 있다. 코넬테크의 ‘공익기술 이니셔티브(PiTech)’는 대학원생이 공익 기술 개발에 참여하도록 돕는다. SFE는 2020년 포드재단(Ford Foundation) 등과 함께 ‘공익기술 인프라 기금(Public Interest Technology Infrastructure Fund)’을 조성해 지금까지 39건의 프로젝트에 약 2500만 달러(349억 원)를 지원했다.

◇ 성과보다 중요한 ‘통찰 수익률’

SFE는 ‘기술은 중립적이지 않다’는 믿음을 전략의 핵심에 두고 있다. 어떤 기술이 누구를 위해 설계되고, 어떤 가치가 내재되는지에 따라 사회적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를 검토하지 않으면 기존 불평등을 강화하고 미래 시스템에 해를 끼칠 수 있다. 송주미(Jumee Song) 시겔 가족 재단(Siegel Family Endowment) 부사장은 “기술 설계·실행·관리에 배제된 이들이 중심이 돼야 한다”며 “특히 역사적으로 목소리를 잃어온 이들에게 발언권을 주는 데 집중한다”고 말했다.

SFE가 지원하는 ‘블랙테크퓨처스 연구소(BlackTechFutures Research Institute)’는 흑인과 소외 공동체가 기술 서사를 주도하고 포용적·공정한 디지털 미래를 설계하도록 돕는다. ‘AFL-CIO 기술연구소’는 노동자의 지식·전문성·권익을 중심에 두고 기술 변화가 모든 미국 노동자에게 번영을 가져오도록 교육과 정책 분석을 제공한다.

성과를 정의하는 방식도 독특하다. 송 부사장은 “우리는 투자 수익률(ROI)이 아니라 통찰 수익률(ROI·Return on Insight)을 본다”며 “새로운 관점을 발견했는가, 공론장을 변화시켰는가, 시스템을 더 공평하게 움직였는가가 지표”라고 설명했다. 이어 “단기 산출물이 적더라도 의제·프레이밍·규범이 바뀌면 사회적 파급은 크다”고 덧붙였다.

미국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의 ‘ICA 펀드(ICA Fund)’ 지원 사례는 SFE의 철학을 잘 보여준다. ICA는 단순히 자금을 빌려주는 대신, 기업이 성장하면 창업자가 다시 지분을 되사도록 하는 ‘지분 임팩트 투자(equity impact investing)’ 방식을 개척했다. 기업의 성과가 외부 투자자의 부(富)가 아니라 창업자와 지역 공동체의 자산으로 남도록 한 것이다.

ICA의 실험은 업계 전반에도 질문을 던졌다. “다른 지역에서도 커뮤니티 자산 형성이 가능할까. 지역 특색을 잃지 않으면서도 확산할 수 있을까.” ICA는 이 고민을 공유하기 위해 모델과 도구, 성공 사례, 정책 아이디어를 모두 오픈소스로 공개하고 있다.

성과도 뚜렷하다. 지금까지 지역 기업에 1500만 달러(한화 약 209억 원) 이상을 투자했고, 170여 개 회사를 지원했다. 이를 통해 7700개의 일자리를 만들고 지켜냈다. 특히 육성 프로그램을 거친 기업들의 연평균 고용 성장률은 34%에 달한다.

송 부사장은 “우리가 추구하는 임팩트는 숫자가 아니라 통찰”이라고 말했다. SFE가 강조하는 ‘통찰 수익률’과 ‘위험 자본으로서의 자선’은 기술 불평등이 심화되는 시대, 공익 자선이 나아갈 길을 묻고 있다.

아래는 SFE 송주미(Jumee Song) 부사장과의 일문일답.

―SFE는 어떤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나.

“데이비드 시겔이 기술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깊이 이해하고 긍정적으로 만들기 위해 2011년 설립했다. 출발점은 ‘사람이 배우고(learning), 일하고(work), 무언가를 만드는(infrastructure) 방식을 규정하는 시스템’에 대한 호기심과 장기적 탐구였다. 우리의 비전은 모든 사람이 급변하는 사회에 의미 있게 참여할 수 있도록 도구·기술·맥락을 갖춘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어떤 기준으로 보조금을 지원하는지 궁금하다.

“우리는 보조금을 줄 때 세 가지 포트폴리오(학습, 노동, 인프라)를 중심으로 기관을 선정한다. 사회 변화와 기술 발전 속에서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가려는 단체를 지원한다. 규모가 작거나 성과 데이터가 부족해도 새로운 아이디어와 가능성이 있으면 지원 대상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아이디어의 힘, 사회 구조를 바꿀 잠재력, 함께 배우고 대화하려는 태도를 중시한다. 지원 기관은 오래된 기관일 수도, 신생 조직일 수도 있지만, 공통적으로 큰 사회적 질문에 도전하며 지식과 실험으로 변화를 만들어가려는 의지를 갖고 있다.”

―어떤 파트너들과 협력하고 있나. 

“비영리·학계 수혜자를 단발성 지원이 아닌 다년간의 탐구 여정 파트너로 본다. 월튼 가족 재단과 함께 ‘다차원적 학교 인프라’를 주제로 220만 달러(약 31억 원) 규모의 ‘러닝 랜드스케이프 챌린지(Learning Landscapes Challenge)’를 진행했다. 이 챌린지는 미국 전역의 초·중·고 학생들을 위해 디지털·교내·지역사회 기반 학습을 연결하는 교육 인프라 모델을 발굴·구현하는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것이다. 오는 9월 열리는 UN 총회 기간에는 200명 이상의 임팩트 투자자 행사인 ‘테크 투게더(Tech Together)’를 개최할 예정이다. 또한, 미국 국립과학재단(NSF)의 첫 ‘책임감 있는 기술 설계·개발·배포(ReDDDoT)’ 프로그램의 창립 자선 파트너로 참여해 1800만 달러(약 250억 원) 규모의 연방 투자 유치에도 기여했다.” 

―기술 주도 사회에서 SFE의 미래 비전은.

“재단은 단순한 자금 제공자가 아니라 사회 혁신과 시스템 변화를 위한 ‘위험 자본’이어야 한다. 새로운 아이디어에 과감히 투자하고, 문제와 가장 가까이 있는 현장의 리더를 지원하며, 전통적 투자자가 꺼리는 영역에 자금을 투입할 수 있는 특권과 책임이 있다. 자선 활동은 칸막이를 허물고 협력을 촉진하며, 모범 사례를 공유하고, 인재 파이프라인을 강화해 더 정의롭고 공평한 미래를 만드는 데 기여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자선은 급변하는 기술 환경 속에서도 공익과 사회 정의를 위한 혁신을 뒷받침할 수 있을 것이다.”

조유현 더나은미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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