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아웃’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두 가지 감정이 동시에 든다. ‘또 번아웃 이야기야?’ 하며 인상이 찌푸려지는 한편 ‘그래서 어떻다는 건데?’ 하며 귀가 쫑긋 세워진다. 정확한 형체도 알 수 없는 번아웃이 이곳저곳에서 무분별하게 언급돼 들려오는 것이 피곤하다가도, 언젠가는 이 전염병이 나를 찾아올 수 있으니 증상을 잘 알아둬야만 할 것 같다.
임팩트 생태계에서 일하며 얻는 가장 큰 수혜는 ‘동료’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을 일하면서 사귈 수 있다는 것이다. 언젠가부터 옆집, 앞집, 옆 동네 동료들이 ‘번아웃’으로 퇴사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누구보다도 몰입했던, 조직에 헌신했던, 성과가 보이던 사람들이기에 그 결정이 이해되지 않았다. 내가 그 역병에 걸리기 전까지 말이다.
입사한 이래 모든 해가 쉽진 않았지만, 특히 작년은 보릿고개를 넘는 것만 같았다. 임팩트 생태계에 들어오는 자원들은 점점 축소돼 가고, 동료들은 떠나고, 함께 일하던 조직들이 하나둘씩 사라져갔다. 마치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에 탄 것처럼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의 각오로 버텼다. ‘살아남아야만 한다’는 생존의 두려움은 가연성 높은 연료이기에 내면에서 활활 불이 잘 붙었다. 업무 엔진은 가열차게 돌아갔으며, 일의 결과들은 나쁘지 않았다. 몰입은 좋은 것이고, 나는 좋은 일을 하고 있기에 이 상태의 건강성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았다.
책 <번아웃의 종말>에서는 ‘번아웃’의 원인이 조직 사회의 현실과 우리의 이상 사이의 모순에서 발생한다고 말한다. 바로 여기에 임팩트 생태계 실무자들이 겪는 번아웃의 맹점이 있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일한다는 이상은 우리가 이 일을 하는 동력이자, 우리의 존재 이유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상에는 현실이라는 그림자가 붙어있다.
그림자의 그늘은 이렇다. 우리가 만들고 싶은 변화는 마치 억겁의 시간을 인내한 자만 목격할 수 있는 기적처럼 더디게 일어난다. 반면 자원이 적으니 적은 사람이 많은 일을 해내야만 한다. 생존을 위해서는 나와 나의 조직의 경쟁력을 실력으로 증명해야만 한다. 좋은 일을 한다는데 어쩐지 좋지가 않다. 이상과 현실이 삐걱대기 시작한다.
악플보다 무서운 것이 무플이라고 했던가. 변화를 만드는 일을 한다는 우리에게 ‘번아웃’이 더 무서운 것은 무기력을 넘어 감정이 마비된다는 것이다. 감정은 변화와 매우 연결돼 있다. 감정은 행동으로 이어지게 하는 신호탄이기 때문이다.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의로운 분노에는 냉담함이 찬물을 끼얹고, 열심히 쌓아 나르던 희망의 둑보다 막막함이 만드는 두려움의 파도가 더 크게 친다.
무언가 변화를 만들고 있다는 감각은 사라지고, 자기 의심의 늪에 풍덩 빠져 버린다. 냉담함, 두려움, 고립, 자기 의심, 관성 등 행동을 멈추게 하는 감정이 산불처럼 번진다. 반대로 행동을 촉진하는 감정인 긴급함, 분노, 희망, 연대, 효능감은 서서히 불이 꺼지고 재가 된다.
어느샌가 변화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자부심과 존재 이유는 사라지고 푸르르 엔진이 꺼진다. 우리가 일에 담은 진심의 깊이만큼 취약해지기 때문이다. 변화를 만들게 하는 감정의 마비는 ‘임팩트 생태계와의 작별’이라는 선택지로 곧장 내몰리게 한다. 결국 ‘번아웃’은 개인의 소진 차원을 넘어 조직의 생산성은 물론, 넓고 긴 시야로 봤을 때 임팩트 생태계의 인재 유출까지로 이어진다.
스탠퍼드 소셜 이노베이션 리뷰(SSIR)의 아티클에서는 “번아웃을 개인적 차원에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조직적 차원에서의 진단과 개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번아웃 평가 도구인 마슬라흐 번아웃 인벤토리(Maslach Burnout Inventory·MBI)를 만든 크리스티나 마슬라흐는 근로자를 ‘식초 속의 오이’에 비유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선한 활동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속한 ‘나쁜’ 상황의 주요 요소를 파악하고 분석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오이가 담겨있는 식초 통을 분석하지 않고 오이의 특징을 조사하여 오이가 피클로 변한 이유를 알아낸다고 상상해 보세요.”
과도한 업무나 부족한 자원이 ‘번아웃’에 영향을 미치지만, 직장에서의 공정성, 투명성, 목적에 집중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그 원인을 개인의 차원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팀의 차원, 조직의 차원에서 감지한다면 증상이 심화하기 전에 미리 인식하고 개선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번아웃’의 개인 차원의 원인으로서는 ▲완벽주의 성향 ▲직업 유형에 따른 개인적 상황 ▲대처 및 감정 조절 능력이 있다. 팀 차원으로는 ▲규모 ▲협업 방식 ▲업무 수행 방식 ▲개방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분위기를 꼽는다. 조직 차원으로는 ▲투명성 수준 ▲역할의 명확성 및 보상 등이 있다. 무엇보다 이 아티클의 필자가 강조하는 것은 오이가 피클이 된 시스템적 원인을 진단하고 개선하는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백해무익해 보이는 ‘번아웃’도 나름의 쓸모는 있다. 번아웃은 어딘가에 괴리가 있다는 신호탄이기 때문이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 있는 수많은 일의 골짜기 중에서 신호탄이 쏘아져 올려진 바로 그 지점에 변화의 단서가 있다. 그러나 단서를 찾아 혼자서 떠난다면 길을 잃기 십상이다.
필자는 동료들과 함께 회고하고 대화하며 골짜기들을 하나씩 넘으며 그 신호탄의 위치를 찾아가 보려 한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는 속담처럼, 이곳 임팩트 생태계에서 배운 것은 결국 변화를 만드는 태도니까 말이다.
안지혜 진저티프로젝트 디렉터
필자 소개 건강한 변화가 시작되는 곳 (주)진저티프로젝트에서 디렉터로 일하고 있습니다. 성수동의 사회혁신가부터 군산, 밀양의 청년까지 섹터와 지역을 넘나들며 교육, 연구, 출판의 형태로 변화를 촉진해 왔습니다. 사회혁신가, 문화기획자는 어떤 조건과 환경 속에서 성장하는지, Z세대와 함께 일하기 위한 조직문화는 무엇인지 연구했습니다. 진저티프로젝트에서 매니저, 팀장에 이어 현재는 디렉터로서, 나의 성장을 넘어, 조직의 성장, 동료의 성장이 일어나는 건강한 환경을 만들어가기 위한 고민과 분투를 풀어내고자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