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지혜 진저티프로젝트 디렉터
[조직문화 pH 6.5] 요즘 애들의 역사는 반복된다

최근 한 시민대학에서 MZ세대에 대한 강의를 했다. 하루 종일 격무에 시달린 뒤 퇴근한 X세대 중간관리자들과 자녀를 이해하고 싶은 4050 어머니들이 주 대상이었다. 보통 ‘Z세대’가 가진 특징이 어떤 성장 환경에서 비롯되었는지 맥락을 충분히 설명하면 ‘아, 그래서 그랬구나’ 하는 공감의 눈빛이 돌아오곤 했는데, 그날은 달랐다. 여기저기서 “우리도 힘들다”는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대표에게 바로 찾아가 컴플레인을 하는 바람에 곤란해진 부장, 업무를 요청하면 “이걸요? 제가요? 왜요?”가 돌아오니 결국 본인이 남아 야근을 한다는 팀장, ‘블라인드 앱’에 이상한 글이 올라오진 않는지 회사 평판 관리에 신경 쓰라는 사장 사이에서 눈치만 본다는 관리자까지. ‘MZ스럽다’도 옛말이고, 이제는 40대를 희화화하는 ‘영포티’라는 밈까지 등장했다. 세상살이도 퍽퍽한데 세대 간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는 듯하다. 한 지점에서 만날 수 없는 평행선처럼, 세대 차이는 왜 이토록 좁혀지지 않는 걸까. ◇ 세대 차이의 이유 우리가 말하는 세대 차이는 결국 ‘시간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서로 다른 세대는 같은 시대를 살지만, 같은 시간을 살고 있지는 않다. 사회학자 카를 만하임은 이를 ‘동시대의 비동시성(the non-simultaneity of the simultaneous)’이라 불렀다. 그는 “모든 사람은 완전한 동시대적 가능성 속에서 나이가 같은 사람들과, 나이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고 있다. 각 개인에게 동일한 시간은 다른 시간이며, 비슷한 나이대의 사람들과 공유하는 자기 자신만의 시대다”라고 말했다. 단적인 예로 세월호와 같은 시대적 사건을 모두가 함께 목격했더라도, 청소년과 어른의 시선과 해석은 같을 수 없다. 청소년은 ‘가만히 있으라’는 말만 따르면 안

[조직문화 pH 6.5] 생존의 갈림길, ‘턴 어라운드’를 만드는 한 끗

필자가 일하고 있는 진저티프로젝트는 올해 4월이면 11살이 된다. 돌이켜보면, 그때는 모든 걸 다 알고 있을 것처럼 보였던 대표님들도 사실 창업 4년 차의 길을 걷고 있었고, 완벽해 보이던 선배들 역시 성장과 불안 속에서 버텨내고 있던 프로젝트 매니저들이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 변화의 흐름 속에서…생존과 지속 사이 달리는 열차의 창밖 풍경처럼, 조직을 둘러싼 생태계도 끊임없이 변해왔다. 소셜벤처, 임팩트, 변화와 같은 단어들이 마치 봄날 새순처럼 피어나던 시절이 있었다. 눈앞의 성과는 보이지 않았지만, 저마다의 열정으로 만든 풍성한 잎사귀들이 가득했던 때였다. 우리는 곧 더 나은 세상을 목격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감과 자부심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열차에서 내리는 사람들도, 새로운 사람들이 올라타는 일도 반복됐다. 떠나는 이들을 보내며 가끔은 메마른 작별 인사를 나누었고, 새로 합류한 이들을 맞이하며 벅찬 환영을 하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열차가 멈추지 않도록 연료를 공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치 영화 ‘설국열차’의 배경처럼 경제 한파 속에서 조직을 유지하는 일은 점점 더 힘겨운 싸움이 되었다. 때로는 생존조차 위협받는 순간들도 있었다. 10년을 넘긴 조직은 그 자체로 우리를 설명하는 든든한 간판이었다. 시간 속에 축적된 성과와 평판은 자산이 되었다. 그러나 ‘왕관을 쓴 자는 그 무게를 견뎌야 한다’는 말처럼, 그 자산을 유지해야 한다는 부담도 커졌다. 우리가 쌓아온 유산을 하나도 빠짐없이 지켜야 한다는 강박은 결정의 순간마다 불안을 키웠다. 최근 비영리 조직의 생애주기 모델을 접하게 됐다. 10년 차가 된 우리 조직은 치열한

[조직문화 pH6.5] 사무실 문화가 ‘파티션’에서 ‘집중빡빡타임’으로 변하기까지

“그런데 책상을 붙여 굳이 서로 마주 보고 일하는 이유가 뭐에요?” 조직에 새롭게 합류해 일한 지 3개월을 넘긴 구성원이 나에게 물었다. 아차, 우리가 왜 이렇게 일하는지를 한 번도 제대로 설명한 적이 없다. “아… 그게요. 홈페이지에 있는데요.”라는 말로 입을 뗐다. 생각해 보니 조금 우스운 말이다. 홈페이지에 조직문화가 문장으로 정리된 것과 지금 내 옆에 있는 동료가 그 문화를 아는 것의 격차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차이만큼이나 크니까 말이다. 처음에는 조직의 문화를 충분히 공유하지 않은 것이 문제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명문화된 조직문화와 실제 우리가 보내는 일상 사이의 격차가 보였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것처럼 보이는, 현재의 우리를 다 담아내지 못하는 단어와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사이에는 누구라도 빠지기 쉬운 협곡이 있다. 바로 ‘존재한다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의 협곡이다. 그 협곡은 습관적 관행이라는 안개로 뒤덮여 있기에 잘 눈에 띄지 않는다. 책 ‘어댑티브 리더십’에서는 조직의 현재 상태는 나름의 진화의 과정을 거쳐 일상이 된 것이라고 말한다. 조직의 구조, 문화, 관행은 조직을 규정하고 유지하는 역할을 하지만, 때로는 끈질기게 느껴질 정도로 잘 변하지 않는 이유는 장시간에 걸쳐 서서히 쌓여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각 조직이 보내는 오늘의 질서는 과거의 위기를 넘게 하고 필요했던 변화가 일어나게 했던 일종의 성공 방식으로서, 현재도 매끄럽고 우아하게 작동되며 과거의 수많은 결정의 패턴을 통해 완고하게 구축되었다는 것이다. 책상을 붙이고 칸막이도

[조직문화 pH6.5] ‘번아웃’이라는 신호탄

‘번아웃’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두 가지 감정이 동시에 든다. ‘또 번아웃 이야기야?’ 하며 인상이 찌푸려지는 한편 ‘그래서 어떻다는 건데?’ 하며 귀가 쫑긋 세워진다. 정확한 형체도 알 수 없는 번아웃이 이곳저곳에서 무분별하게 언급돼 들려오는 것이 피곤하다가도, 언젠가는 이 전염병이 나를 찾아올 수 있으니 증상을 잘 알아둬야만 할 것 같다. 임팩트 생태계에서 일하며 얻는 가장 큰 수혜는 ‘동료’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을 일하면서 사귈 수 있다는 것이다. 언젠가부터 옆집, 앞집, 옆 동네 동료들이 ‘번아웃’으로 퇴사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누구보다도 몰입했던, 조직에 헌신했던, 성과가 보이던 사람들이기에 그 결정이 이해되지 않았다. 내가 그 역병에 걸리기 전까지 말이다. 입사한 이래 모든 해가 쉽진 않았지만, 특히 작년은 보릿고개를 넘는 것만 같았다. 임팩트 생태계에 들어오는 자원들은 점점 축소돼 가고, 동료들은 떠나고, 함께 일하던 조직들이 하나둘씩 사라져갔다. 마치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에 탄 것처럼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의 각오로 버텼다. ‘살아남아야만 한다’는 생존의 두려움은 가연성 높은 연료이기에 내면에서 활활 불이 잘 붙었다. 업무 엔진은 가열차게 돌아갔으며, 일의 결과들은 나쁘지 않았다. 몰입은 좋은 것이고, 나는 좋은 일을 하고 있기에 이 상태의 건강성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았다. 책 <번아웃의 종말>에서는 ‘번아웃’의 원인이 조직 사회의 현실과 우리의 이상 사이의 모순에서 발생한다고 말한다. 바로 여기에 임팩트 생태계 실무자들이 겪는 번아웃의 맹점이 있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일한다는 이상은 우리가 이 일을 하는 동력이자, 우리의 존재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