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8년째 성동구 이끄는 정원오 구청장
‘붉은 벽돌 건물’은 서울 성수동의 상징이다. 카페, 레스토랑, 옷 가게, 펍, 공유 오피스 등 건물에 들어선 트렌디한 공간들이 붉은 벽돌의 분위기와 묘하게 어우러지면서 청년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어느 날 저절로 이뤄진 게 아니라 성동구의 치밀한 계획과 디자인 아래 ‘만들어진 상징’이다. 지난달 21일 만난 정원오(54) 성동구청장은 “2014년 구청장 취임 후 8년간 벌인 여러 일 중의 하나가 ‘붉은 벽돌 건축물 지원 사업’”이라고 했다.
“붉은 벽돌로 명소가 된 뉴욕 브루클린처럼 되고 싶어서 ‘한국의 브루클린’을 대놓고 표방하며 오래된 붉은 벽돌 공장과 주택들의 수선·건축비를 지원하는 조례를 만들었어요. 이제는 건물 짓는 사람들이 자체적으로 붉은 벽돌로 건물을 올리고 있어요. 지원금과 별개로요.”
지난 3월에는 뉴욕의 ‘브루클린 상공회의소’ 대표단이 서울을 다녀갔다. 성수동을 직접 탐방하고 싶다며 구청에 연락해온 것이다.
“브루클린 상공회의소장이 성수동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가장 놀란 것은 붉은 벽돌 건물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젠트리피케이션’을 방지하기 위한 노력을 같이 했다는 점이었어요. 성동구의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을 바탕에 깔고 성장해 나간다는 겁니다.”
가치를 추구하는 기업들 성수로 몰린다
―브루클린 상공회의소장이 또 어떤 이야기를 하던가요?
“랜디 피어스(Randy Peers) 소장은 브루클린을 ‘변화를 선도하는 데 집중하는 도시’라고 소개했어요. 성동구에 대해서도 비슷한 인상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우리가 하는 여러 정책을 수입하고 싶다는 이야기도 했어요. 성동구의 기업들을 같이 데려와서 설명을 해달라고 했습니다. 앞으로 두 지역 간에 협력할 부분을 찾아나가며 교류하자고요.”
―성동구의 문화나 분위기가 독특하긴 하죠.
“사회혁신가들이 성수동으로 모이면서 분위기가 더 많이 바뀌었어요. 환경, 젠더, 장애 등 사회문제를 비즈니스로 해결하고자 하는 소셜벤처 창업가들이 성수동에 자리 잡고 일종의 ‘밸리’를 형성했어요. 그 덕에 IT 기업이 포진한 판교나 대기업이 모인 강남과는 전혀 다른 독특한 일터 문화를 갖게 됐죠. 돈만 좇는 기업이 아닌 사회적 가치를 함께 추구하는 기업이 성수동에 모여있습니다.”
―소셜벤처 말고 큰 기업도 많이 들어왔죠?
“경쟁력 있는 도시가 되려면 삶터, 일터, 쉼터가 조화롭게 발전해야 해요. 일터는 경제, 삶터는 복지·교육·교통을 종합하는 행정, 쉼터는 그야말로 쉼, 재충전이죠. 예를 들어, 쉼터 기능만 있는 곳을 ‘베드타운’이라고 하죠. 일터가 없으면 일하러 멀리 나가야 하니까 삶의 질이 떨어집니다. 강남은 일터는 많은데 삶터와 쉼터가 없어서 쉬기 위해 또 멀리 나가야 해요. 구청장 취임하고 보니 성동구는 이 세 가지가 공존할 수 있는 잠재력과 가능성을 가진 곳이었어요. 그중 가장 약했던 게 ‘일터’라서 기업 유치에 집중했어요. 기업 인허가 원스톱 방식을 도입해 기업이 쉽게 들어올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어요. 그 결과 취임 이후에만 2000여 기업이 성동구 내에 추가로 생겨났어요. 쏘카, SM엔터테인먼트, 현대글로비스, 크래프톤, 무신사 등이 성동구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지역내총생산(GRDP) 성장률은 서울시 자치구 중 가장 높은 편입니다.”
―GRDP가 높다는 건 정확히 어떤 의미인가요?
“일자리가 많다는 것, 세금이 많이 걷힌다는 뜻이죠. 두 가지 모두 개인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칩니다. 개인의 소득과 자산이 증대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뜻이니까요. 세금이 많이 걷힌다는 것은 튼튼한 재정에 힘입어 양질의 사회복지 서비스를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삶터와 쉼터로서도 좋아졌나요?
“지난 8년간 금호·옥수·왕십리 지역의 재개발이 완료되면서 주거 환경이 대폭 개선됐어요. 특히 젊은 층이 성동구에 많이 유입되면서 출산·보육 정책을 강화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어요. 코로나19로 쉼터의 기능도 중요해졌죠. 지금 중랑천 변에 가보시면 아마 놀랄 겁니다. 청년들이 모여서 집에도 안 가고 밤새 야구를 하고 있어요(웃음). 야구장, 축구장, 풋살장 등 다양한 체육 시설을 조성해 운동하기 좋은 성동구를 만들었죠. 지난 3월 용비교 인근에 생긴 ‘용비 쉼터’도 이미 ‘자전거족의 성지’가 됐다고 들었습니다.”
―서울숲 옆에 있는 삼표레미콘 공장이 철거되는 것도 큰 이슈죠.
“30만 성동구민 전체가 나서서 서명 운동, 규탄 대회를 할 정도로 성동구의 가장 큰 숙원 사업이었죠. 6월 말까지 철거를 완료할 예정이에요. 삼표레미콘 공장은 폐수 무단 방류, 미세 먼지 발생, 소음, 레미콘 차량의 도로 파손 등 환경에 미치는 영향이 아주 컸는데, 공장이 이전되면 서울숲의 환경이 훨씬 좋아질 겁니다. 성동구민뿐 아니라 서울시민의 삶의 질을 끌어올릴 공간으로 만들어야죠.”
사회적 약자가 사회적 약자로 묶이지 않는 세상
성동구는 다른 지역에는 없는 독특한 조례를 많이 만든 것으로도 유명하다. 젠트리피케이션 방지 조례(2015년), 소셜벤처 육성 및 생태계 조성 지원 조례(2017년), 필수 노동자 보호 및 지원 조례(2020년), 경력 보유 여성 존중 및 권익 증진에 관한 조례(2021년) 등이 대표적이다. 정원오 구청장은 “모든 것은 균형이 중요하다. 균형이 안 맞으면 지속가능하기 어렵다. 도시도 마찬가지. 도시가 성장하려면 포용이 필요하고 그 핵심은 균등한 기회”라고 말했다.
―사회적 약자들을 포용하지 않으면 도시가 성장할 수 없다는 뜻인가요?
“물론입니다. 삶터, 일터, 쉼터를 같이 가져가야 한다고 했던 것도 결국은 ‘균형’이에요. 앞으로 20년간 전 세계 도시들은 ‘포용 도시’를 지향하게 될 겁니다. 유엔도 언어, 종교, 피부색, 경제력 등의 모든 이유로 약자들이 소외받거나 차별받는 도시는 성장할 수 없다’고 공표했어요. 역사적으로도 전 세계 모든 도시의 흥망성쇠는 포용에 달려있었어요. 포용 도시일 땐 성공하다가 차별이 시작되는 순간 망하죠. 여러 조례를 만든 이유도 사회적 약자에게 균등한 기회를 주기 위해서 입니다.”
―’균등한 기회’란 무엇일까요?
“쉽게 말해 ‘더 신경 쓰는 것’이죠. 사회적 약자들에게 더 관심을 갖는 겁니다. 사회적 약자들이 사회적 약자로 묶이지 않고 같이 잘 살아갈 수 있으면 성동구는 최고의 도시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회적 약자들이 불편하지 않게 하는 정책들을 고민합니다.”
―성동구의 조례가 곧장 중앙정부의 정책으로 확장되는 사례도 있었죠.
“2020년 9월 성동구가 전국 최초로 제정한 ‘필수 노동자 지원 조례’가 대표적입니다. ‘필수 노동자’란 이름을 처음으로 제시했고, 조례 제정 후 8개월 만에 ‘필수 업무 지정 및 종사자 보호·지원에 관한 법률’ 제정을 이끌어냈습니다. 코로나19 위기에서 우리 사회의 정상적인 기능을 유지시키기 위해 감염의 위험을 무릅쓰고 대면 업무를 수행하는 필수 노동자들을 위한 제도였어요.”
―그런 게 우리 사회가 기다렸던 정책이었나 봅니다. 경력 보유 여성을 위한 조례에 대해서도 간단히 알려주세요.
“지난해 11월 제정한 조례입니다. 육아 등 돌봄 경험도 ‘경력’으로 인정해 구청장이 ‘경력 인정서’를 발급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요. 전국 최초로 ‘경력 단절’이란 용어를 ‘경력 보유’로 바꾼 것도 의미 있습니다. 다른 지자체로 경력 보유 여성이라는 용어가 확산하고 있고, 돌봄 노동의 경력 인정에 관한 조례 제정 움직임도 일고 있어요. 입법 논의도 진행 중입니다.”
정원오 구청장은 최근 ESG 관련 책을 펴냈다. 제목은 ‘지속가능도시, ESG’다. 도시 운영과 행정에 ESG를 도입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눈길을 끄는 건 E(환경), S(사회), G(거버넌스)에 또 다른 ‘E’를 하나 더 추가했다는 것이다. Economy(경제)를 더해야 지속가능 도시가 완성된다는 설명이다.
“ESG는 전 세계의 흐름입니다. 도시도 행정에서 ESG를 안 하면 쇠퇴합니다. 이제 도시 평가도 ESG로 하게 될 거예요. 지금까지는 세금, 복지로 도시를 평가했지만 이제부터는 환경, 거버넌스가 부상할 겁니다. 주민들이 더 많은 대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관 주도가 아닌 주민과 함께하는 새로운 차원의 거버넌스를 만들어야 합니다. 도시를 평가하는 지표 자체가 바뀌는 거죠. 거기에 경제(E)를 추가할 것을 제안합니다. 도시는 기본적으로 경제가 없으면 망가집니다. 경제의 핵심은 기업이죠. GRDP를 높이는 방향으로 가야 나머지 ESG도 힘을 받을 겁니다.”
김시원 더나은미래 기자 blindletter@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