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금 시장 틀 깨는 가상자산
‘가상자산 보유자는 기부에 관대하다.’
최근 암호화폐와 NFT(Non-fungible Token·대체 불가능 토큰) 투자자들이 대거 기부에 참여하면서 모금 시장 판도가 바뀌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의 자선단체 피델리티채리터블은 지난해에만 암호화폐로 1억5000만달러(약 1700억원)를 모금했다. 전년 암호화폐 기부액 2800만달러 대비 5배를 웃도는 규모다. 지난해 10월 피델리티채리터블이 발표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2020년 기준 가상자산 소유자의 45%가 1000달러(약 120만원) 이상을 기부했다. 주식 투자자 중 1000달러 이상 기부한 비율은 이보다 낮은 33%로 조사됐다.
최근에는 암호화폐를 넘어 NFT로 모금하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최근 국제구호기구 유니세프와 아프가니스탄 최대 여성 인권단체 ‘우먼포아프간우먼(WAW)’ 등은 자체적으로 NFT 작품을 판매해 기금 조달에 나섰다. 디지털 자산인 NFT에는 구호 프로젝트의 내용을 담을 수 있고, 소유권과 판매 이력 등의 정보가 모두 블록체인 기술로 저장돼 위·변조가 불가능하다. 환전 수수료와 세금으로 빠져나가는 돈도 아낄 수 있다. 또 계약 조건에 따라 첫 판매 이후 2차 시장(secondary market)에서 거래가 이뤄질 때마다 원저작자에게 수수료를 지급할 수 있어 추가적인 기금 마련의 가능성도 열린다.
가상자산의 부상, 모금 시장의 전환
‘NFT 모금’ 시대가 열렸다. 유니세프는 지난달 10일(현지 시각) 설립 75주년을 기념해 NFT 컬렉션 1000개를 판매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더리움 블록체인을 활용해 유니세프가 직접 판매하고, 수익금은 아동 교육 사업 기금으로 활용된다. 현재 제시된 작품 하나 가격은 0.175ETH(이더리움 단위). 1000개가 모두 팔렸을 때 최소 7억원을 모금하게 된다.
관건은 ‘완판’ 여부다. 유니세프는 지난달 23일 사전 구매 등록인 ‘화이트리스트’를 진행했는데, 7000개 넘는 계좌가 구매 신청하면서 사실상 완판을 예고했다. 유니세프는 작품 제작에 참여한 데이터 시각화 전문가이자 예술가인 나디에 브레머에게 부여하는 1개를 제외한 999개는 추첨을 통해 판매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번 컬렉션의 각 작품에는 21국 28만여 학교의 데이터가 저장돼 있다. 지구 저궤도 위성, 머신러닝, 블록체인 등의 기술을 활용해 고립된 세계 학교를 인터넷에 연결하고 교육 격차를 줄인다는 목표다. 헨리에타 포어 유니세프 총재는 “모든 어린이가 행복한 세상을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면서 “유니세프의 첫 번째 글로벌 NFT 컬렉션 출시를 통해 학교와 지역사회를 인터넷으로 연결, 정보 격차를 해소할 수 있도록 지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NFT가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건 지난해부터다. 예술계 중심으로 NFT 거래가 활발해지면서 대중화됐다. 블록체인 분석 기업 체인애널리시스(Chainalysis)에 따르면, 지난해 NFT 생성에 사용된 이더리움 계약 규모는 409억달러(약 40조원)에 달한다. 이는 스위스 투자은행 UBS가 추산한 지난해 세계 미술 시장 규모(501억달러)의 80%에 육박하는 수치다.
시장 규모는 빠른 속도로 불어났지만, 모금단체와의 연결고리는 매우 약했다. 모금단체에 NFT 판매 수익금을 기부하는 방식이 대부분이었다. 대표적으로 트위터 창립자 잭 도시는 지난해 3월 그의 첫 트윗 메시지 “방금 내 트위터를 설정했다(just setting up my twttr)”라는 한 문장을 NFT 경매에 내놨고 290만달러(약 32억원)에 팔았다. 그는 수익금에서 NFT 판매 수수료(gas fee) 5%를 제외한 95% 전액을 암호화폐인 비트코인으로 전환해 아프리카 구호단체 ‘기브디렉틀리(Give Directly)’에 기부했다.
이를 두고 전문가들은 현금과 현물 중심으로 이뤄진 기존 모금 시장의 문법을 깨는 시도라고 분석했다. 조 휴스턴 기브디렉틀리 전무이사는 “암호화폐의 핵심인 투명성, 효율성을 모금단체가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라며 “가상자산의 세계적 인기가 올라갈수록 기부 규모도 비례해 커질 것”이라고 했다.
해외 자금줄 막힌 국가엔 새로운 돌파구
정세가 불안한 일부 국가에서 구호 활동을 벌이는 모금단체들은 해외 자금줄을 가상자산을 통해 마련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은 지난해 8월 미군 철수 이후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인 탈레반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경기 침체와 여성 억압 정책이 쏟아지고 있다. 현지에서 활동하는 구호단체들은 미국 정부의 달러 송금 제재를 피해 NFT 모금을 진행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여성 인권 단체 ‘우먼포아프간우먼(WAW)’은 지난해 10월 첫 NFT 판매 이후 지속적으로 모금 캠페인을 열고 있다. 판매 초기 수익금과 함께 이후 거래가 성사될 때마다 발생하는 수수료 5%도 WAW에 기금으로 전달된다. WAW는 지난해 11월에만 NFT 모금으로 95만달러(약 11억원)를 받았다.
전 세계적으로 가상자산 활용이 급속히 늘고 있지만 한국은 오히려 뒷걸음치고 있다. 체인애널리시스가 지난해 발표한 ‘2021 가상자산 지형 리포트’에 따르면, 한국의 가상자산 채택 지수는 전 세계 154국 가운데 40위였다. 전년 17위에서 13단계 하락했다. 가상자산 채택 지수는 인구 1인당 구매력 대비 블록체인상에서 가상자산을 얼마나 활발하게 사용하고 있는지를 국가별로 산출한다. 가상자산이 가장 활발한 나라는 베트남이었다. 이어 인도, 파키스탄, 우크라이나, 케냐 순이었다. 미국은 8위, 중국은 13위에 올랐다.
NFT 모금이 장점만 있는 건 아니다. 우선 블록체인 기술에 대한 진입 장벽이 높고, 불안정한 법적 지위도 위험 요소로 꼽힌다. 디지털 자산이다 보니 해킹이나 제작자와 구매자의 분쟁 등 예측하지 못한 일이 발생할 수 있다. 또 국가마다 NFT에 대한 법적 지위나 거래에 대한 규제, 권리 관계의 정립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다. 암호화폐 채굴에 많은 전기를 사용한다는 이유로 가상자산이 친환경적이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그린피스는 2014년부터 암호화폐 거래 플랫폼 ‘비트페이’를 통해 기부를 받았지만 과도한 전기 사용으로 인한 환경 파괴 문제를 이유로 지난해 가상자산 모금을 중단했다.
☞NFT(Non-Fungible Token)
블록체인(Blockchain) 기술로 디지털 파일에 고유의 값을 부여해 가상자산에 희소성과 유일성이라는 가치를 부여하는 수단. 소유권과 판매 이력 등의 정보가 모두 저장되며 위·변조가 불가능하다. 최근 NFT를 적용한 미술품, 게임 아이템 등 디지털 자산이 활발하게 거래되며 주목받고 있다. 디지털 파일에 NFT를 적용하는 과정을 ‘화폐를 주조하다’라는 뜻의 ‘민팅(minting)’이라고 부르며, 이를 오픈시, 노운오리진 등 NFT 거래소에 상장하는 것을 ‘리스팅(listing)’이라고 한다.
문일요 더나은미래 기자 ilyo@chosun.com